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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엄마 일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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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마 일기냐는 질문을 다시 생각했다. 그때 내린 두 번째 답은 이거였다. 엄마가 화해의 대상이고 아빠가 용서의 대상이라면, 용서보단 화해가 쉬울 테니까. (2020.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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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작가의 출간 기념 인터뷰를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나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였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이런저런 글에서 튀어나오던 이야기인데 이제서야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출판 계약서에 서명한 이후에 인터뷰를 읽으며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누군가 ‘책 계약했다면서요?’ 물어오면 기대 안 한다고 손사래 치면서도 상상으로는 이미 팟캐스트 녹음도 마쳤다.) 누군가 나에게 왜 엄마 일기였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좋을까. 사실 정답이 정해져 있다. “편집자님이 엄마 글이 좋았다고 하셨어요.”

 

편집자님이 주제를 정해준 것은 아니다. 다른 주제도 좋으니 넓게 생각해보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고민하던 다른 주제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창 그 문제에 젖어 있었기에 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평소 엄마와 보내며 느낀 점을 적은 엄마 (부양)일기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인이 되어 비로소 엄마를 거리 두고 보게 되면서 떠오른 짤막한 글을 올리면 주변 사람들이 자주 반응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글을 쓰자고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하얀 워드 파일에 껌뻑이는 커서만 바라보다 저녁을 다 보냈다.

 

그날 밤, 왜 엄마 일기냐는 질문을 다시 생각했다. 그때 내린 두 번째 답은 이거였다. 엄마가 화해의 대상이고 아빠가 용서의 대상이라면, 용서보단 화해가 쉬울 테니까. 하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니 엄마는 화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해의 대상이었다. 용서보다 시도하기는 쉽지만, 완수하기는 어려운 이해. 엄마를 이해하면서 화해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마도 나의 유년. 머릿속에서 엄마 아빠를 자주 죽이고 그런 자신을 소름 끼쳐 하면서도 늘 착한 딸이었던 지난날의 나.

 

그래서 사실 과거의 이야기는 거의 쓰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의 어떤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쓰다 보니, 엄마가 왜 그때 그렇게 화를 냈는지, 염려했는지, 불안해했는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대화 방식이 바뀌거나 엄마의 불안이 해소된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가 엄마와 나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살아온 날들 그리고 나의 지난날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힌 결과라는 것을, 역으로 실을 풀어가며 알게 되었고 그제야 나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가끔 공감하는 이를 보며 엄마와 내가 겪는 문제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기도 했다. (슬프게도 비극의 여주인공 되기엔 난 너무나 흔한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물론 글을 쓴다고 고통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와 괴로운 순간도있다. 하지만 고통을 말했을 때와 말하기 전의 상태가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 고통을 스스로 언어화하지 못할 때 속이 썩는다는 말은 정확하다. 고통의 원인인 모든 부정의가 오로지 나라는 존재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꺼내 읽고 해석하는 일은 혼자 속 썩이며 참는 일보다 나에게는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내 이야기가 단지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사소하지 않다는 것, 내가 경험한 고통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각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75-76쪽

 

나는 엄마 일기를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보다는 보고 난 후에 엄마가 보일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엄마 인생을 멋대로 해석해버렸다고 하면 어떡하나, 멋대로 공개적인 웹진에 올렸다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나, 등등. 하지만 자매님이 엄마에게 몇몇 글을 보여주었고, 엄마는 글을 몇 번이고 읽었고 읽을 때마다 울었다고 말했다. 메신저로 몇 가지 수정하고 싶은 정보를 보내고는 (예: ‘소승불교’가 아니라 ‘상좌불교’란다.) 덧붙였다. “정연아, 너는 엄마를 참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는구나. 고맙다. 계속 눈물이 났어.” “그런데 회사 사이트에 이런 글을 써도 되니? 너한테 좋을 얘기가 없는 것 같아 미안하네.” 그 순간 화해고 이해고 용서고 다 무용해졌다. 나는 엄마를 갈퀴고 엄마는 나를 갈퀴며 오늘까지 왔지만 그건 결국 지난한 사랑이었음을, 우습게도 엄마 일기를 쓰고 나서야 알아챘다. 그러니까 엄마 일기는 엄마와 내 내면 아이를 만나는 장이자 뭉근한 사랑 고백인 셈. 이제 조금 궁금하다. 엄마 일기를 쓰는 일이 나와 화해하는 일이라면,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게 될까?

 

그건 아마 다 써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아직 쓸 게 많다. 쓰고 싶었는데 사회적 명성(?)을 생각해서 자제했거나 길어질 듯해서 미뤄둔 주제들. 제목은 이렇다. ‘엄마 미안. 나 섹스해.’, ‘엄마가 모르던 서랍 네 번째 칸’, ‘효녀 임계치 테스트: Lv.1 엄마와 단둘이서 여행하기 / Lv.2 엄마와 또 단둘이서 여행하기 / Lv.3 엄마와 또 또 단둘이서 여행하기’ 등등. 궁금하다면 언젠가 출간될 책을 기대해주시라. (보고 계시죠, 편집자님…?) 그리고 당신도 써보면 좋겠다. 당신을 갈퀴고 당신도 갈퀴었을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 내가 정한 기준인데, 좋은 에세이는 나도 비슷한 주제로 써보고 싶어지는 글이다. ‘효녀병 말기 환자입니다만’이 전국구 효녀들의 펜심을 조금이나마 자극했으면 좋겠다.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저 | 어크로스
그동안 평면적으로 존재했던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끊임없이 호명하는 홍승은의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은 나와 타인을 지우지 않는, 숨이 붙어 있는 좋은 글쓰기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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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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