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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칼럼] 작가는 글 고치는 사람
『무기여 잘 있거라』
별스럽지 않은 나의 글 제조 공정은 이렇다. 주제를 정한 뒤 자료를 조사한다. 인용할만한 글도 갈무리해둔다. 초고를 쓴다. 퇴고를 한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친다. (2020. 03. 03)
별스럽지 않은 나의 글 제조 공정은 이렇다. 주제를 정한 뒤 자료를 조사한다. 인용할만한 글도 갈무리해둔다. 초고를 쓴다. 퇴고를 한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친다. 마감 임박해 착수하면 이런 과정을 이틀 안에 마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일주일 걸린다. 원고지 10~20매 분량 글을 일주일 넘기며 붙잡고 있으면 직업적으로 글 써서 먹고살긴 어렵다.
이 과정을 단 하루에 마칠 때도 아주 가끔 있다. 자료와 글 내용의 실마리가 이미 두뇌에 저장되어 있는 경우이자, 초고 작성과 퇴고가 신비롭게도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경우다. 글 주제를 이미 확실하게 장악하고 관련 자료도 예전부터 제법 들여다봤을 때 가능하다. 하루 만에 후딱 쓴 글이 일주일 동안 쓴 글보다 더 나을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일이다.
퇴고도 글 쓰는 이마다 적합한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한다.
첫째, 종이로 출력하여 원고를 살핀다. 모니터에서 읽는 것과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는 건 다르다. 모니터로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종이로 출력해 읽으면 보일 때가 많다. 손으로 종이를 만지며 펜으로 줄 그어가며 읽는 것, 요컨대 아날로그 실물 원고를 마주할 때 고칠 부분이 더 잘 보인다.
둘째, 길지 않은 원고는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길지 않다는 것의 기준은 내 경우 원고지 20매 이내다. 큰 소리로 읽는 건 아니다. 내 귀에 살짝 들릴 정도로 읽어본다. 눈으로 살필 때는 그냥 넘어갔던 부분이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어색하게 다가오곤 한다. 글말, 문어체보다는 입말, 즉 일상적 담화체가 더 자연스럽다고 볼 때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글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
셋째, 내용만 보지 말고 글의 전체 구조도 다시 생각하며 읽어본다. 글 구조의 기본 단위는 단락이다. 단락의 배치와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면 과감하게 바꿔 본다. 어떨 때는 글의 서두와 말미를 뒤바꿔보기도 한다. 초고 쓸 때는 쓰는 것 자체에 집중하느라 전체 구조를 깊이 생각하기 어렵다. 퇴고는 문장과 내용뿐 아니라 구조에 대한 재검토이기도 하다.
넷째, 무엇을 더할까 생각하지 말고 어디를 빼는 게 좋을까 생각하며 검토한다. 퇴고는 기본적으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글에서 뭔가를 덜어내어 더 좋아지는 경우는 있어도, 덧붙여서 더 좋아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정해진 분량이 있는 데 덜어내면 어떻게 하느냐? 일단 덜어내고 다시 쓰면 분명히 더 나아진다. 상처를 도려낸 뒤 새 살이 돋는 것과 비슷하다.
다섯째, 하루나 이틀 정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읽어본다. 방금 담근 김치와 묵힌 김치의 맛이 다르듯, 글도 며칠 묵혀두었다가 읽으면 다르게 다가온다. 앞서 말한 일주일 기간에는 그렇게 묵혀두는 시간이 포함돼있다. 내가 쓴 글을 일부러 조금 낯설게 만드는 기간이다. 바둑에도 ‘훈수 9단’이라고 해서, 대국을 지켜보는 사람이 대국하는 사람보다 수와 판을 더 잘 본다고도 한다.
초고를 쓸 때 좀 미심쩍었던 부분은 나중에 봐도 미심쩍기 마련이다. 미련 없이 삭제하거나 고친다. 한 번 더 읽을수록 고칠 부분이 하나 더 보인다. 그러니 퇴고는 여러 번 할수록 좋다. 나는 원고를 종이로 출력하여 갖고 다니면서 지하철에서도 문뜩 꺼내 읽어보고, 약속 장소 카페에서 기다리면서도 읽어보며 화장실에서도 살펴본다.
사실 초고 쓸 때보다 퇴고할 때가 더 힘들다. 자기 글의 여실한 참상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수리해야하는 지 가늠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고통이 밀려든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수준이 어디인지 오리무중이다. 글에서 완성이란 없다. 어느 단계에서 부끄럽게 독자들에게 건네는 수밖에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이다. “모든 글의 초고는 끔찍하다. 글 쓰는 데에는 죽치고 앉아서 쓰는 수밖에 없다.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 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총 39번 새로 썼다.” 작가의 일에서 적어도 절반 이상이 글 고치는 일이라 본다면,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기보단 글 고치는 사람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저/권진아 역 | 문학동네
20세기 미국소설의 언어와 스타일을 혁신한 위대한 문장가이자 허무주의적 실존주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권진아> 역12,600원(10% + 5%)
전쟁의 허무와 환멸 속에 만난 사랑과 생멸의 준열함 미국소설의 언어를 재창조한 헤밍웨이 문학의 진수 20세기 미국소설의 언어와 스타일을 혁신한 위대한 문장가이자 허무주의적 실존주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두번째 장편소설. 헤밍웨이 스스로 “나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말했던 이 작품은 1차세계대전이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