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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3월 우수작 -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존재

요즘 라노벨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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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실…… 요즘 라노벨에 빠졌어요.”라는 수줍은 나의 고백에 주변 지인들은 적잖은 충격에 빠진다.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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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3월호의 주제는 ‘나, 요즘 이것에 빠졌다’입니다.

 

 

“저 사실…… 요즘 라노벨에 빠졌어요.”라는 수줍은 나의 고백에 주변 지인들은 적잖은 충격에 빠진다. 일명 ‘라노벨’은 라이트 노벨의 준말로 말 그대로 일반 문학 소설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대중소설을 일컫는다. “상아 씨가 라노벨을 읽어요? 진짜 그런 거 안 읽은 것 같은데” 백이면 백 의외라는 듯 놀라는 지인들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과묵하고 소심한 콘셉트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출퇴근길에 읽는 두꺼운 양장본의 고전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칩거하며 주말 내내 황궁 로맨스 판타지를 읽는다고 하니 잘 상상이 안 갈 만도 하다. 


순전히 광고 때문이었다. 마침 알폰스 무하 전(展)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아르누보 예술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은 황금빛에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보는 이들을 현혹시킨다. 팝업창으로 뜬 그 광고 이미지 역시 클릭할 수밖에 없이 아름다웠다. 그 한 번의 클릭으로 그날 밤의 잠을 포기해야 했다.


내가 빠진 라노벨은 웹페이지에 연재되는 형식이었고, 무료 본으로 풀린 120여 화 위로 유료 본이 250여 본이 넘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목요일 저녁 무료로 풀린 120여 화의 절반 이상을 읽어냈다. ‘아 5분만, 5분만 더 읽자.’ 가 약 60화까지 끝없이 이어진 것이다. ‘어떻게 여기서 끊지!’ 도저히 다음 화를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 화가 끝나면 손은 자연스레 다음 화를 누르고 있다. 밤새워서 소설을 읽는 것은 중학생 때 mp3의 5cm 도 안 되는 화면으로 인터넷 소설을 읽었던 게 마지막인데, 그때의 짬이 남아서인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결국 해가 밝고 출근을 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숙면을 했던 지난날보다 더 개운한 느낌이었다. 회사에 가서도 빨리 집에 가서 다음 화를 읽어야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금요일 밤부터 주말이 끝날 때까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무료로 풀린 연재본을 다 읽고 결제를 해야 하는 순간에 닥쳤다.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 미치도록 다음 화가 궁금한데도 쉽사리 결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광고로 유료 본을 얻어내는 방법뿐이었다. 유료 본은 ‘쿠키’를 통해 결제할 수 있는데, 어플 하나를 다운받으면 쿠키 5개를 얻을 수 있는 식이다. 가뜩이나 구식 핸드폰을 사용하던 터라 용량은 옛날 옛적에 다 찼고, 할 수 없이 자주 사용 안 하던 어플을 정리해가면서 쿠키 5개를 얻어냈다. 결국, 더 이상 다운 받을 수 있는 어플이 모두 소진되자 카드사에 쌓여있던 포인트로 결제해서 나와 있는 모든 연재 본을 읽고 난 뒤에는 완결된 새로운 황궁 로맨스 판타지물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라노벨 중에서도 특히나 빠져있는 장르는 황궁 로맨스 판타지이다. 그냥 로맨스 판타지여서도 안된다, 배경이 황궁이어야지만 흥미가 갔다. 이 정도면 전생에 황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나의 황궁 집착은 꽤나 역사가 깊은데, 십대 때 잠시 만화책과 인터넷 소설에 빠져있었을 때도 유독 황궁을 배경으로 한 작품만 골라보곤 했다. 특히나 드라마화된 <궁>에 미쳐있었는데 드라마 OST를 다 다운받아서 들으며 울 정도였다. 그 유별난 황궁집착이 아직까지도 이어져 새로 변하는 이웃 나라 왕자님을 위해 열심히 쿠키를 굽고 있는 것이다.

 

보름달처럼 희어지는 보라색 눈을 가진 이웃 나라 왕자님의 수줍은 고백을 읽을 수만 있다면, 3년 가까이 연애를 못 하고 있는 현실도 웃으며 행복할 수 있다. 황후가 겪는 고통과 시련에 지나치게 이입해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도, 그녀의 사이다 복수 한 방이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12시면 사라지는 유리구두처럼, 월요일이 되면 나의 이웃 나라 일본의 왕자님은 보라색 눈동자를 갖지도, 새로 변하지도 않는다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현실 속에 몰래 유리구두를 숨겨두기 위해 수줍게 ‘덕밍아웃’한 이후, 놀랍게도 “상아 씨가 라노벨을요?”라며 의아해하며 놀리던 이들이 다음 주가 돼서는 자기들도 결제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전생에 황녀였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실은 황궁과 아주 먼 곳에서 지극히 평범한 대중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예술을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을 나누는 관점은 조금 불편하다. 무엇보다 불편한 사실은, 예술의 가치에 저울질을 하고 곁눈질로 남들 눈치를 보고 있는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이다. 전시회에서 본 대다수의 알폰스 무하의 작품은 당시 초콜릿, 술이나 담배의 광고 포스터였다. 그의 전시회에 가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나지만, 화가와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포스터를 봤다면, 절대 지금처럼 감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게 읽히는 책을 읽는다고 가벼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줄곧 남들의 시선으로 내 영혼의 무게를 재 왔던 것이다. 지하철에서 고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분명 내가 맞지만, 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렌즈 대신 안경을 쓴 후 침대에 누워 울고, 웃으며 라노벨을 읽고 있는 내가 더 친근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려고 한다. 물론, 당장 민낯으로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려고 한다. 이번 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달달할 것으로 예상하며, 이제는 망설임 없이 돈을 주고 쿠키를 굽는다.

 

 

김상아 『방귀참지않는용기』라는 책을 준비중인,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수줍음도 많은 94년생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www.86chu.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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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아

『방귀참지않는용기』라는 책을 준비중인,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수줍음도 많은 9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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