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떠나 보내며
낡고 드디어 담담한 이별이었다.
이번 주는 유난히 지나간 장소와 사람들을 자주 생각했다. 이전에도 그래왔지만 이번 주는 특별했다. (2020. 01. 17)
이마가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적이 있다. 소개팅에서,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어지간히 칭찬할 게 없나 보다 생각하면서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던가? 헤어 스타일이 멋지세요.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사람은 아마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번 주는 유난히 지나간 장소와 사람들을 자주 생각했다. 이전에도 그래왔지만 이번 주는 특별했다. 쌓인 과거를 신물이 나도록 곱씹지 않았다. 전광판에 흐르는 글자처럼 과거는 그의 자리로 흘렀다. 내 안에 오래도 머물렀구나, 이제 그만 나가주었으면 좋겠어. 부드러운 척 말하지만 매끄러운 이별은 아니었다.
첫 번째 자취방이 떠올랐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1분도 안 걸렸던 방이라 편세권이라고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그 해 여름에 나는 네 캔에 만 원하는 세계 맥주를 일주일에 한 번씩 사다 먹으며 편의점마다 맛있는 도시락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동네에는 치킨집이 어찌나 많았던지 다 시켜 먹어 보기도 전에 새로운 치킨집이 또 들어섰다. 난생 처음 파닭을 먹어보았다. 떠나온 그 동네를 걸을 때의 마음이 일상을 자주 스치고 지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던 얕은 언덕과 고양이들이 있던 길목.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미화되지도 않았다. 분노도 후회도 없었다. 어떤 감정도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이별을 아주 오래 연습해 오긴 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찾아왔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정말 가는구나 생각하며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나는 담담했고 기억은 기억으로 저물었다. 그만 왔으면 좋겠다고 빌며 바라던 때에는 이별이 오지 않았다. 상념은 기척 없이 스며들기 때문에 나는 막아서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그럴 때는 다시 그 방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양념치킨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했다. 아무렇지 않아졌을 때, 그것으로 어떤 불편함도 없을 때에 이별이 왔다. 달이 차고 기우는 때가 있는 것처럼, 그것을 앞당기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밀려오던 상념이 그랬듯 이별 역시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왔고 달라진 것은 그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일 따름이었다.
에고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의 나』 , 에크하르트 톨레
문득 그 방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즐기라거나 하는 말은 하나도 쓰고 싶지 않았다. 지나간 사건들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힌트를 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답장이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인사를 보내고 싶었다. 역시 이별이었다. 그땐 그랬다고 말하고는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매몰차거나 냉정하지 않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뒷모습을 보이며. 그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도 그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안다.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가게를 나서는 길, 달이 둥글다는 말에 나는 아직은 아니라고, 내일이 만월이라 답한다. 친구는 만월 같은 문어체를 입 밖으로 쓰지 말라고 나를 타박하다가 크게 웃고 나는 따라 웃으며 왜 보름달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한참 궁리한다. 다음 날 퇴근길에 크고 둥근 달을 본다. 매일 새벽과 저녁, 달이 차고 지는 것을 보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안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불교 철학 수업에서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을 배웠다. 테세우스의 배가 시간이 흐르며 낡게 되어 배를 이루던 판자를 하나 둘 교체하게 된다. 어느 날 모든 판자가 처음의 것이 아니게 되는 때가 온다. 이 배는 아직도 그 배일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 질문을 나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내가 나로 유지되기 위해서 과거의 무엇을 평생토록 변하지 않게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은 기억이기도 했고 사상이기도 했고 상처이기도 했다. 많은 역설과 사고 실험이 그렇듯, 들은 뒤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정체성의 무의미함을 말하기 위해 교수님은 역설을 말하였고 나는 역설 자체에 빠져버렸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 제자의 이야기가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아 아래 모두 연결되어 있는 전체가 있어요. 책을 읽는 와중에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으로 듣고 귀로 읽는다. 나를 무너뜨리고 싶어요. 모든 판자를 다 바꿔서 새로 살고 싶어요. 누군가 싱잉 볼을 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오늘 달은 반듯하고 날카롭게 가운데가 잘린 반달, 그 날의 만월과 같은 행성의 다른 모습. 어떻게 벌써 반이나 저물었냐고 슬퍼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에크하르트 톨레 저/최린 역 | 센시오
고통, 불안, 두려움 등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분명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천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관련태그: 이별, 장소, 윤희에게,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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