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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기쁨

내 안에 있던 감정에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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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 달려 있지 않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행위가 그렇듯이 말이다. 남들이 볼 때 무용하다고 생각되는 일일 수 있다. 역시 수학 문제집을 푸는 행위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도무지 만족스럽게 살 수 없다. (2019.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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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대학원에 다닐 때 아이와 남편이 있는 중년 여성분이 같은 전공 박사 과정 중에 있었다. 그 분은 논문 통과만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석사 과정 초반이었던 나와 학교에서 함께 강의를 듣거나 생활할 일은 없었지만 그 분의 어떤 말은 몇 년째 기억에 맴돌고 있다.

 

"아이와 있을 때도 기쁘지만 연구에는 뭐라고 할까, 깨끗한 기쁨이 있어요."

 

깨끗한 기쁨이라는 말의 생경함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깨끗한 기쁨. 그건 우리의 전공에 매우 잘 어울리는 말이었고 또 일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덕목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한 첫 주 주말, 영화관에 갔다.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감정적인 동요를 요구했고 때문에 나는 소설이 소개하는 김지영이 더 좋았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나는 이제는 이미 졸업하고 강단에 계신, 그 박사 과정 선배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영이 딸 아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려던 찰나,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원시킨 다른 여성들이 지영을 붙잡는다. “같이 커피나 한 잔 해요.” 그렇게 가게 된 집에서 지영은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발견한다. " 큰 애가 있나 봐요?" "아뇨, 그거 제가 푸는 거예요." 마음이 요동쳤다.

 

그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깨끗한 기쁨을 주는 일이 나를 먹여 살리는 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영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이 무엇인지도 확연해졌다.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쉬고 있는 나의 일상이 종종 허무로 젖어 들어가는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인 생활 외의 행복을 갈구하는 무엇이 내 안에 분명히 있었다. 이름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었던 그것, 바로 깨끗한 기쁨이었다. 퇴근 길 회사 빌딩에서 나올 때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 영화를 보아도 책을 보아도 따분하고 혼자 있어도 함께 있어도 외로울 때 내가 그리워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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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에서 허새로미 저자는 영어라는 낯선 도구를 빌려 자신의 감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길 요구한다. ‘감동’이나 ‘억울하다’ 같은 너무 큰 단어 안에 묻혀 버린 날 것의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될 때 삶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 말은 나의 삶에도 적중했다. 나는 내 안에 있던 감정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허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항할 작은 창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미분화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언어를 지도 삼아 샅샅이 살펴보는 일은 새로운 종류의 재미일 뿐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연마하는 일이기까지 하다. 감정의 스펙트럼을 새로 배우는 것, 외국인들이나 쓰는 이국적이고 유난한 무언가라 생각했던 형용사를 내면화하는 것,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고 이름 붙이는 것은 내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고 관계를 맺고 키우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깨끗한 기쁨이 무엇인지에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 달려 있지 않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행위가 그렇듯이 말이다. 남들이 볼 때 무용하다고 생각되는 일일 수 있다. 역시 수학 문제집을 푸는 행위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도무지 만족스럽게 살 수 없다. 나는 곧장 영혼의 고양을 떠올렸다. 제대로 기능하는 몸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니, 영혼을 살펴볼 차례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영혼을 달랠 것이 필요하다. 술이나 음식 말고, 무형의 양식이. 수학이나 글 같은, 어쩌면 음악이나 냄새 같은 것. 오롯이 자신을 위해 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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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 를 읽고 유튜브로 여러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고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도 들어보고, 바흐나 베토벤도 시도해본다. 클래식을 듣기 시작하니 유튜브 추천에 여러 새로운 동영상이 뜨기 시작했다. 글렌 굴드의 연주 동영상도 그 중 하나였다. 골든베르크 연주곡을 듣다가 귀를 의심했다. 그 유명하다는 글렌 굴드의 연주인데 누가 이렇게 허밍을 넣은 거야? 레코딩한 사람은 이걸 왜 안 지웠지? 알고 보니 글렌 굴드 본인이 피아노를 치면서 내내 허밍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동영상 댓글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그가 연주를 할 때는 관객을 위해서가 그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 같아."

 

나는 글렌 굴드에, 그의 연주에, 이 댓글에 반해버렸다. 글렌 굴드는 깨끗한 기쁨을 위해 연주하고 있었구나. 그의 연주가 뛰어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지만, 애초에 그는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거였어.

 

대학원을 그만두자 몇몇 친구들이 물었다. 다시 돌아갈 거야?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진 않고?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공부는 다시 하고 싶어. 친구들이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하하, 그래, 돈 벌면 좋지. 아니, 아직도 공부가 하고 싶어?

 

깨끗한 기쁨, 영혼의 고양을 위해 나는 아직 공부를 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 하고 싶다기보다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느낀다. 다시, 정확히 말하자. 느낀다기보다 확신한다.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두 가지 아이콘은 빵과 장미이다. 영화 “노예 12년”에는 “나는 생존하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라는 대사가 나온다. 살기 위해 장미가 필요하고 깨끗한 기쁨이 필요하고 자신을 위한 행위가 필요하다. 고백하건대 이 글은 나의 장미이자 깨끗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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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주연(도서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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