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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에스트로’ 하이팅크의 말러 <교향곡 9번>

파리, 루체른, 암스테르담… 하이팅크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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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귀 기울이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로부터 가장 멀리 갔다가도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돌아와 있다. 음악의 종착점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이다. (2019.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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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음악만이 주는 열락의 순간

 

오랫동안 팬이었던 영화감독을 만나 인터뷰하던 도중이었다. 남달리 좋은 취향을 가진 그에게 좋아하는 지휘자를 묻자 그가 하이팅크라고 말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하이팅크의 지휘로만 듣는다는 말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들었던 실황 공연에서 이 거장 지휘자가 어떻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이팅크의 지휘는 파리에서도 1년에 몇 번 들을 수 있지만 티켓 구하기가 어려웠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접하기 힘들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그의 지휘로 듣고 싶은 마음 하나로 런던, 루체른, 암스테르담, 베를린으로 향했다.

 

하이팅크의 지휘로 듣는 베토벤, 말러와 같은 레퍼토리는 그 자체로 사람을 가장 감정적으로 고양시키는 지극히 순도 높은 음악이다. 음표 하나하나가 새로운 차원의 무엇으로 거듭나, 그 형태와 질감, 맛과 향기까지 가진, 마치 육체를 지닌 듯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베토벤이나 말러 교향곡의 익숙한 선율은 다시 한번 청중을 놀래며 새롭고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포디엄에서 큰 움직임을 보이거나 눈에 띄는 제스처도 표정 변화도 없는 그가, 그저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서 음악과 함께 호흡하는 동안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기량을 한껏 발휘하며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해 마음껏 자신들을 펼쳐 보인다. 오로지 실황에서만 느껴지는 이 경이로운 음악과의 조우 덕분에 나는 언제나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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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콘세르트허바우

 

 

하이팅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저 터널에서 런던으로 향하던 유로 스타가 이유 없이 멈춰 서거나 파리에서 바젤을 거쳐 루체른으로 가던 기차가 파업으로 갑작스럽게 취소되어 꼼짝없이 발이 묶인 적도 있었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역의 코인 로커에 짐을 두고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우버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바젤에서 우선 베른으로 가는 기차를 탄 뒤, 베른에서 간신히 공유 차량을 구해 천신만고 끝에 루체른에 도착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고생스러운 와중에도 하이팅크의 음악을 듣고 나면 이 모든 것을 감수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속한 현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차원의 음악이었다. 견줄 만한 경험을 꼽아보자면 내포 불순물이 하나도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커팅으로 연마된 보석이 뿜어내는 눈부신 빛에 압도되거나, 석양에 물드는 바닷가 하늘의 빛깔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다 이윽고 어둠으로 사그라드는 걸 지켜볼 때처럼 어딘가 경건해지기까지 한 마음이 들었다. 차마 눈을 똑바로 뜨기가 어려워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청각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분명 눈을 감았는데도 총천연색으로 부서지는 그 빛이 닫힌 시야 사이로 스며들어 눈앞을 메우는 것이었다. 한없이 먼 곳까지 뻗어 나가는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내 영혼도 잠시 다른 차원의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오로지 음악으로만 가능한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여정이 주는 열락에 빠져 있다가 눈을 뜨면, 언뜻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한 포디엄의 하이팅크와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보였다. 그들이 합일을 이루며 빚어내는 음표가 공기 중에 실려 피부에 와닿았다. 일광욕을 하거나 몰아치는 바람을 마주할 때처럼 간절히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고는 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붙들고 잠시 멈추어 있다가 가야지, 했을 것이다.

 

“우리 마에스트로는 오늘 또 새로울 거야.”


듣기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별다른 노력 없이 편안하게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를 따라갈 수도 있고, 극도의 집중으로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화성과 음 하나하나에 실린 배음을 느끼거나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을 수도 있다. 귀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한 듣기 이상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음이 도달하는 지점은 결국 듣는 이의 가장 깊숙한 내면이다. 그래서 음악에 귀 기울이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로부터 가장 멀리 갔다가도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돌아와 있다. 음악의 종착점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는 음악에 상념이 더해져 음표들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온갖 노폐물처럼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부유하는 상념들은 음표들이 피부에 와닿을 때, 내가 음악과 마주한 상태로 스스로를 가장 활짝 열어 보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저 바깥으로 흘러 나간다. 가장 순수한 음들과 마주한 덕분에 나는 텅 비었으나 가장 충만하고 오롯한 상태가 된다. 몇몇 명장들의 지휘로 만나는 실연의 음악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오로지 음표와 나만이 존재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음악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이때마다 나는 내 숨소리나 옷깃이 의자에 닿는 소리가 끼어들까, 미동도 하지 않고 호흡도 조심스럽게 내쉬며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하이팅크.jpg

하이팅크

 

 

음악은 종교보다도 구체적으로 내 영혼을 구원한다. 자주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고통받는 아귀처럼 속이 텅 빈 듯 알 수 없는 공허함에 불을 끄고 누워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으나 멀어진 것들, 과거 삶의 궤적이 맞닿아 잠시 가까이 있었으나 놓치고 흘려보낸 것들, 바라고 바랐으나 결국 닿지 못한 것들, 팽팽히 당겨진 줄처럼 극도로 높은 긴장감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썼던 안간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하는 패배감…. 산다는 것은 어딘가에 부딪혀 계속 생채기가 나는 일상의 반복이고 종종 그렇고 그런 일들이 닥쳐왔다. 나에게 바투 다가와 몸을 부딪쳐온 음악 덕분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선율에 얹어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달콤한 디저트에 탐닉하거나, 향기로운 향을 겹겹이 몸에 입혀보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을 뿐, 오로지 음악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어느 가을날 저녁 6시, 공연 시작까지는 두 시간이 남은 시각 파리 살 플레옐 매표소 앞에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관광 온 네덜란드 여행객들이었다. 큰 키와 다소 거친 액센트의 플라망어 덕분에 한눈에 파리지엔들과 구별되었다. 티켓은 이미 매진이지만 일찌감치 와서 라스트 미닛 티켓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에서 29년간 RCO(로열 콘세르트허바우)를 이끈 하이팅크를 “우리 마에스트로”라고 불렀고 “우리 마에스트로”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파리까지 여행 와서도 저녁 시간을 몽땅 희생하는 건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틀간의 투어 중 첫날을 이미 들었지만 같은 프로그램을 또 한번 듣기 위해 이렇게 줄을 선다고 말하자 그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젊을 때 우리도 매번 콘세르트허바우에서 줄을 섰어. 우리 마에스트로는 이틀을 들어도 좋지. 오늘도 또 새로울 거야”라며 비스킷과 초콜릿을 내게 내밀었다. 우유 함량이 높아 맛이 진한 초콜릿 맛과 그들이 “우리 마에스트로”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얼굴에 번지던 미소와 빛나던 눈동자의 반짝임은 잊혀지지 않는 순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작년 8월 29일, 독일 아헨 부근에 머무르던 나는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콘세르트허바우에서 하이팅크의 지휘로 말러 <교향곡 9번>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정성껏 몸을 씻고 손발톱을 자르고, 깨끗한 옷과 편안한 신발을 챙겨 신었다. 하이팅크가 선보인 그날의 말러 9번은 한없이 느리고 또 투명했다. 가장 순도 높은 경지의 음악을 마주하면 몸이 더 정직하게 반응한다.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덜 느껴지고, 맥박 수와 심장박동 같은 신체적 반응들이 즉각적으로 달라진다. 작별 인사를 고하듯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말러의 고뇌와 모든 감정들의 편린이 느린 템포 속에서 고스란히 와닿았다.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말러보다도 풍성한 색채와 단면을 지닌 연주였다. 눈앞에서 시공간이 지워진 듯, 존재가 휘발해버린 듯 아득한 기분이었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일부러 찬바람을 맞으며 비 내리는 암스테르담 구도심의 골목을 정처 없이 걸었다.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 묻어 있던 독특한 냄새 덕분에 그제서야 이곳이 암스테르담이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그 무엇도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밤이었다.


 

 

Bernard Haitink 말러: 교향곡 전곡Gustav Mahler 작곡/Janet Baker, James King, Heather Harper, Norma Proctor 노래 외 5명 | Universal / Decca Record
오리지널 커버 슬리브, 슬립케이스 한정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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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글로 남긴다. 바흐와 말러, 바그너, 피나 바우슈를 위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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