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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강릉으로 떠나는 이유
강릉 고유의 문화를 지켜낸 경계, 대관령 너머
도서출판 가지에서 출간하는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시리즈는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들의 풍경과 맛과 멋, 사람과 공간에 깃들어 있는 서사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 지역에서 자랐거나 일정 기간 살아본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한 ‘본격 지역문화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9. 07. 02)
대관령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영동고속도로.
문향, 예향, 제일 등 강릉을 수식하는 말은 많다. 추상적인 수식어가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수식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대관령 너머’가 될 것이다. 강릉 하면 연상되는 대표적인 지명 가운데 하나가 대관령이다. 외부에서 대관령 너머는 곧 강릉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겠지만 강릉에서는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체험적 공간으로서 대관령 너머와 안쪽을 구별하는 의미이다.
대관령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강릉.
강릉을 상징하는 진산
대관령은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있는 해발 832미터 높이의 고갯길이다. 평창군이 강릉권역에 포함되었던 예전엔 대관령 역시 강릉에 속했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은 평창군과 접해 있다. 강릉에서 대관령은 숱한 이야기가 전하는 지명 이상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 대관령과 대관령면은 별개의 개념으로, 혼동을 막기 위해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대관령면의 이전 명칭은 도암면이다. 도암면은 원래 강릉군에 속했으나 1906년 정선군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다시 평창군으로 편입되었다. 십여 년 전 평창군은 도암면의 개명을 추진했다. 지명도 높은 대관령을 그대로 면 이름으로 가져다 쓰려 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강릉 시민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평창군은 2007년 도암면을 대관령면으로 전격 교체했다. 대관령을 강릉이 소유한 브랜드네임이라고 여겼던 강릉 사람들의 박탈감과 상실감은 대단했다.
그들은 대관령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다른 기초단체와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이자 관문으로서 강릉단오제 때 치제되는 산신과 대관령국사서낭(大關嶺國師城隍)이 상주해 있고, 신사임당이 영을 넘을 때 친정집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전하는 곳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대관령을 평창군이 지명으로 선점한다면 강릉의 소중한 역사적, 민속적 자산들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대관령면과 대관령을 따로 받아들이는 등 입장이 완화된 듯 보인다.
대령(大嶺), 대현(大峴), 굴령(堀嶺), 대령산(大嶺山) 등으로 불려온 대관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 <탑상> 에 실린 ‘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의 기사에서 찾는다. 신라 정신대왕의 태자 보질도가 효명태자와 함께 강릉에서 자고 큰 고개를 넘어 오대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큰 고개를 대관령으로 보는 것이다. 이후 『고려사』 에는 대현으로 기록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야 대관령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대관령산신당과 국사서낭사.
지금은 4차선 고속도로로 직선화되어 있지만 근대화 이전에 대관령은 험한 고갯길이었다. 고개가 험해 데굴데굴 굴러야만 넘을 수 있다거나 곶감 한 접을 짊어지고 가던 선비가 한 구비 돌 때마다 한 개씩 빼먹었더니 정상에서 단 한 개만이 남더라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산이 중중하고 험했다. 특히 겨울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통행이 쉽지 않았기에 대관령은 오랫동안 강원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물리적 경계로서 존재했다. 이 경계의 넘나듦이 수월하지 않았던 사실은 한 비석에 새겨진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관령 반정에서 옛길을 따라 성산 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이병화 유혜불망비’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비몸에는 대관령을 오가는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도록 사비를 털어 주막을 열었던 이병화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추운 겨울 험한 산길을 오가는 여행객에 대한 이병화의 연민과 배려가 잘 읽힌다.
대관령옛길에서 만난 꽃들. (괭이눈)
강릉과 영 너머로 세계 인식
강릉은 동으로는 동해와 맞닿고 서로는 백두대간과 접해 있다. 영동과 영서의 교류는 이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대관령을 통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강릉 사람들은 세상을 두 가지로 인식했다. ‘강릉’과 ‘영 너머’가 그것이다. 여기서 영이란 대관령을 일컫는다. 강릉 사람들은 그들이 인식했던 것처럼 대관령이라는 준령을 넘어야만 중앙으로 통하는 외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대관령옛길에서 만난 꽃들. (동자꽃)
조선시대에 대관령은 서울에서 전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였던 관동대로에 속했다. 서울 흥인문을 출발해 관동대로를 따라 중랑포, 평구역, 양근, 지평, 원주, 방림, 진부, 횡계를 지나 대관령을 넘어야 강릉에 닿을 수 있었다. 길이 높고 가팔라 쉬이 강릉에 이를 수 없었으며, 길의 형세도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해 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앙의 문화가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기 쉽지 않았고, 강릉의 문화 역시 대관령을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강릉은 좀 더 고유색이 짙은 특징적인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리적 경계였던 대관령이 곧 문화적 경계였던 셈이다.
대관령옛길에서 만난 꽃들. (며느리밥풀)
대관령에 근대적인 도로가 개통된 때는 1917년이다. 그 전에는 강릉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꼬박 열흘이 걸렸다. 이러한 사실은 1915년에 쓰인 <서유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은 강릉 사는 여성이 대관령을 넘어 서울을 여행하고 나서 쓴 기행문인데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근대 도로의 개통으로 강릉-서울 간 이동시간은 많이 단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한 길이었던 대관령은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일대 전환을 맞는다. 비로소 동서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후 2001년 지금의 직선화된 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험준한 산길로서 대관령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대관령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동차가 오간다.
대관령옛길에서 만난 꽃들. (흰진범)
이제 더 이상 지리ㆍ문화적 경계가 되지 못하는 대관령은 옛길을 등산객에게 내주었다. 제법 넓은 등산로에서 무수한 생명들을 만날 수 있다. 산길을 비롯해 길을 약간 비껴난 숲에서 사랑스러운 생명들이 자란다.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수줍게 꽃들이 피고 진다. 괭이눈, 현호색, 얼레 지, 구슬붕이, 벌개덩굴, 광대수염, 은초롱꽃, 기린초, 여로, 초롱꽃, 동자꽃, 며느리밥풀, 흰진범, 애기앉은부채 등등…. 먼 옛 날 이 길을 걸었던 뭇사람들도 마주했을 꽃들이다. 무심히 핀 들꽃들은 고개를 갸웃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집주인 길손 보듯 한다.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