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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11화 : 그날은 그러루한 보통 장맛비가 아니었다
『마터 2-10』 연재
이백만은 시장 사거리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늘어나기 시작한 두 칸짜리 서민 한옥들 가운데 제일 구석진 자리의 집을 세 들어 살림을 시작했다. (2019. 05. 15)
영등포가 원래 모래땅이고 여름이면 물이 드는 게 늘 있는 일이어서 겨울만 빼고는 언제나 땅이 질척거렸다. 그러니 오래 전부터 주민들은 영등포를 진등포라고 자조하여 불렀다. 짚신이나 신던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고무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던 작업화 지까다비나 고무신 고무장화가 나온 뒤에는 진등포에 살려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돌았다. 진등포는 점잖은 말이고 그보다 더하게는 비만 오면 물이 들어 흙길이 죽처럼 된다고 죽마루라고도 불렀다.
큰 홍수가 시작되기 바로 한 해 전에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었다. 영등포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지점이오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경성의 길목이라서 전국의 소문이 하루 이틀이면 닿는 곳이라 문안과 경기도 일대에서 일시에 만세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장거리에 파다하게 퍼졌다. 피 끓고 성미 급한 이들뿐만 아니라 구경 좋아하는 이들도 걸어서 한강 인도교 거쳐 문안으로 들어가 친척이나 동무들을 만나고 돌아와서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자기가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백만이 영등포에 와서 십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에 나라는 망했지만 의병은 끊임없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일본군과 총격전도 벌이고 때로는 폭탄 습격도 했지만 잡혀 죽고 스스로 자결하기도 하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아프고 깊은 기억을 남겼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서 잠잠해지고 잊히고 나면 보통의 아무 일도 없는 나날이 물처럼 그 위를 덮고 흘러갔다. 천재지변 역시 그러했다. 한강 기슭에 큰물이 드는 일은 해마다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일이었다.
초여름에 접어들어 음력 오뉴월이 되면 사람들은 장마철을 기억하고 거처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백만이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한쇠의 손목을 잡고는 해가 저물기 시작한 강가로 나가보곤 했다. 멀리 북한산과 남산에 반사된 노을이 비쳐 있고 서쪽으로는 선유도 뒷전으로 붉은 빛이 가득한 하늘이 보였다. 한강은 여의도에서 갈라져 샛강을 이루어 영등포 앞으로 흘렀다가 양화나루 앞에서 한강으로 합수되고 안양천은 오목내 앞의 염창 앞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니 영등포는 그 사이에 끼어있는 곳이었다. 강 건너 마포 일대와 용산에 이르기까지 기슭은 거의가 모래땅이었다.
비가 오다가다 흐렸다 개이기를 거듭하기 시작하면 장마의 초입이었다. 한쇠는 처마 밑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고 깨는 날이 어쩐지 아늑하고 고즈넉해서 오히려 시끄럽기는커녕 잠이 잘 왔다. 그날 밤은 뇌성벽력이 하늘과 땅을 뒤집는 것처럼 요란했고 굵은 물줄기가 하늘을 가득 채우며 쏟아 붓듯이 날이 새도록 비가 쏟아졌다. 이백만은 걱정스럽게 하늘을 쳐다보며 출근을 했는데 바람 때문에 몸을 가릴 것이 없었다. 지우산은 일본 여자들이나 쓰는 물건이고 우비는 그때에 나오지도 않던 때였다. 삿갓이나 쓰던지 도롱이를 뒤집어쓰기 마련이었다. 한쇠가 여덟 살 두쇠는 여섯 살이었다. 한쇠는 열 살이 되어서야 보통학교에 진학했으니 엄마가 장사를 나가면 아우를 돌보며 동네 아이들과 놀러 다닐 때였다.
주안댁은 아이들에게 사랑이 극진하여 눈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장사를 접고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한쇠가 비오는 날이면 남들과 달리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날따라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과, 엄마가 밥상을 챙겨주는 건 물론이고 저녁에 아버지 돌아올 무렵까지 끊임없이 뭔가 군것질 거리를 만들어 함께 먹었기 때문이었다. 수수나 감자로 전야를 부쳐주고 옥수수 또는 고구마를 굽거나 쪄주었고 단 호박도 쪄주고 아버지 몰래 찹쌀 멥쌀을 찧어 인절미도 절편도 만들어 주었다. 이백만은 영문도 모르고 저녁 밥상 앞에서 아이들이 몇 숟갈 뜨다말면 괜히 어디 아픈가 이마에 손을 대보거나 배를 쓸어보고는 했다. 한쇠는 엄마와 단단히 약조를 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가끔씩 두쇠가 산통을 깨버렸다. 우리 떡 해먹었다 뭐. 이백만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마에게 한 소리를 했다. 자네 손이 커서 큰일이야. 이거 살림을 하자는 게야 말자는 게야.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무섭다. 무싯날에 자빠져서 애들하구 밥쌀을 갖구선 떡을 해 처먹어. 그러면 주안댁은 아무 소리 없이 마주앉아서 우걱우걱 밥을 숟가락에 고봉으로 떠서 입에 틀어넣고 그 때문에 말 못하는 시늉을 했다. 눈으로는 두쇠를 흘겨보면서. 아버지 잔소리는 그뿐이었지만 말없이 건넌방으로 가서 공작을 하는 일에 빠져버렸다. 저 노무 쇳조각들을 몽땅 쓸어다 버리든지, 주안댁은 아이들이 듣건 말건 그렇게 혼자 씨불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루한 보통 장맛비가 아니었다. 비가 듣거나 잠깐씩 개거나 하지 않고 밤새 내리던 그 모양새로 계속해서 좌락좌락 물동이채로 붓듯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골목 안의 구석 집이라 햇볕도 잠깐 들다마는 위치여서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런 날 집에서 식구들과 머물러있지 않고 고지식하게 공장으로 출근한 남편을 주안댁은 원망하며 중얼거렸다.
“벽창호 같으니, 이러다 집두 사람두 다 떠내려가면 어디 가서 식구들을 찾을라구 그러나.”
그런데 그 말은 곧 씨가 되었다.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하늘이 더욱 컴컴해진 오후에 주안댁은 드디어 결심을 하고 빈 독을 옮겨 놓고 그 위에 통나무 걸치고 아슬아슬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 올라간 그녀는 기와가 깨질까 조심하며 용마루까지 기어가서 엉거주춤 상반신을 폈는데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동네는 시장 쪽 보다는 조금 높은 지대였는지 아직 골목길엔 물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 너머로는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는데 물이 무릎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저 물이 늘어난다면 꼼짝없이 골목 안에 갇히고 말 터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내려와 한쇠에게 일렀다.
“내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아우 데리고 집 지키고 있거라.”
주안댁이 골목 바깥으로 나가 시장 사거리 모퉁이의 큰 길에 당도하니 사방이 아무 것도 안보이고 흙탕물뿐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진 식구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나와 서로 부르고 찾으며 무슨 난리가 난 형국이었다. 어른들에게는 지금 무릎 위까지 올라갔지만 아이들은 배 위에까지 물이 차올라와 있었다. 물은 점점 불어날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의 키를 넘어서게 될지도 몰랐다. 주안댁은 집으로 돌아오며 물난리가 났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빨리 생각해 보았다. 높은 지대로 가야 한다. 부근에서 가까운 곳은 두 군데였고 남편의 일터와 가까운 곳에 한 군데가 더 있었다. 좀 더 먼 곳에 자기 생각에도 안전한 곳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물이 더 불어나서 중도에 오가지도 못하고 횡액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건사할 아이가 둘이나 된다. 집 동네에서 가까운 곳은 한 방향이니 동북쪽으로 가면 옹기말이 있는데 그녀가 새우젓독이나 항아리를 사러 가던 동네였다. 옹기막이 두 군데 있었고 집은 십여 호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이 동네 어구에 교회당이 들어서고 언덕 전체에 빼곡히 기와집이 들어선 것은 한쇠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옹기막 언덕을 넘어서 샛강 강변까지 다가가면 다시 좀 더 높은 언덕이 나오는데 은행나무 고목이 여러 그루 있는 당산이 있었다. 다른 곳은 시장 사거리를 지나 남쪽 신길리 쪽의 방아곶 나루 앞의 언덕인데 그 아래 샛강 쪽으로는 귀신바위가 있어서 아이들이 여름에 멱 감다 빠져죽기도 하는 깊은 물웅덩이와 바윗덩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자칫 가는 도중에 언덕 아래로 샛강물이 밀려들 수 있어 위험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이 있는 공작창 부근에는 원당산 언덕이 있는데 아마 이백만이 귀가하지 못하면 그리로 피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옹기말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아이들을 재촉하여 집을 나섰다. 무엇이든 물에 뜨는 것을 찾다 보니 집에 있는 거라곤 커다란 나무 함지뿐이었다. 맞춤한 손잡이가 있어 새끼를 꿰어 붙들어 매고 물이 찰랑찰랑 들어오기 시작한 동네 골목길에서는 그냥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다행이 맨땅 보다는 훨씬 나아서 함지는 잘도 미끄러지며 따라왔다. 사방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각자 정한 방향을 따라서 물속을 허위허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안댁은 두 아이를 데리고 걷는데 어떤 곳은 얕았지만 장소에 따라서 깊어지기도 하여 두쇠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께로 차오른 물에 놀라 넘어지자 얼른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두쇠는 흙탕물을 들이키고 캑캑거리며 울었다. 두쇠를 업고 한쇠는 물에 동동 뜬 나무함지를 붙잡고 가도록 하였다. 한쇠는 어려서부터 봄이 지나 초가을 무렵까지 동네 꼬마들끼리 샛강에 나가 놀기를 좋아하여 개헤엄을 칠 줄도 알았다. 그래선지 함지를 붙잡고 가끔씩 두 발을 땅에서 떼고 물장구를 신나게 해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모자 세 사람이 옹기말 언덕 아래 당도하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옹기막으로 올라갔다. 사방에 깨어진 항아리며 독들이 굴러다니고 굴뚝 올린 가마가 두 군데나 있는데 옹기막은 기둥에 지붕만 얹은 작업장이었다. 그러한 작업장이 디귿자로 길게 연이어져 있으니 많은 사람이 비를 피하여 머물만한 장소였다. 비가 그 기세를 꺾지 않고 밤과 낮 동안 한결같이 쏟아져 내리는데 보통 날보다 훨씬 일찍 어둠이 내렸다. 물론 이백만은 소식도 없고 식구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천하장사라 하여도 그런 난리에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옹기막 사람들이 천재가 일어났으니 서로 돕겠다고 작업장 가운데 몇 군데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저녁 밥 때가 늦어지자 마을에서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다 나누어 주었다. 피난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합하여 삼십여 명 되었고 옹기막 사람들까지 합하면 사십 명쯤 되었을 터였다.
물이 점점 차올라 언덕 아래 제법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 옹기막에서 서로 의지하여 하룻밤을 새우고 훤해진 새벽녘에 언덕 아래를 내다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고립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사방이 그야말로 망망한 물바다였다. 옹기말 언덕빼기를 남기고 범람한 물이 온 들판에 가득했다. 주안댁은 거뭇거뭇 솟아있는 지붕들의 형체로 자기네 동네를 가까스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번지고 넘친 샛강물이 거칠게 흘러내려갔다. 멀리 북쪽으로 비죽비죽 고목나무가 서있는 당산 언덕이 보일 뿐이고 서쪽으로 공장지대의 굴뚝이 몇 군데 보였지만 물이 어느 높이까지 차올랐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날 낮에 주안댁이 옹기말에서 큰일을 해냈는데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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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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