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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온다

<월간 채널예스>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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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저 문장을 접하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19.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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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한다. 요즘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때에는 ‘사당오락’, 즉 네시간(이하) 자면서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시간(이상) 자면서 공부하면 불합격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수험생이던 나는 평균 여덟시간은 잤다. 어릴 때부터 잠이 많았다. 밤 열시부터 아침까지 내리 숙면을 취하는 고3 딸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속깨나 태우셨다. 

 

독자와의 만남 같은 곳에 가면, 작가들은 으레 늦은 밤 시간에 일하는 줄로 아시는 분들을 만난다. 한 번은 마감이라 이른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왔다는 내 얘기에, 세상에 이렇게 부지런한 작가가 다 있었냐고 감탄하는 분도 있었다. 부지런이라니, 누구? 나 말인가? 어젯저녁 아홉시 뉴스도 끝나기 전에 잠들었다는 말은 차마 덧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상황이 변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않는 밤이 부쩍 늘어났다. 새벽까지 몸을 뒤척이다 하루일상을 복기하다 보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오후에 커피를 많이 마셨다는 것. 이것은 내게 정말로 놀라운 변화다. 커피를 입에 대기 시작한지 어언 삼십 여년. 그동안 하루 네댓 잔 이상 마셔왔으나 숙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늙음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던 건 2015년 11월, 그러니까 3년하고도 2달 쯤 전이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  사는게 뭐라고』  와  『죽는게 뭐라고』  에 대한 서평이었다. 위의 제목을 내가 붙인 것인지 신문사 쪽에서 붙인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전 마흔세 번째 생일이 지났다.’ 그것이 첫 문장이었다. 이십 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이십 년 후에도 사십 년 후에도 (나라는 인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문장이 뒤에 이어진다. 아직 한 주전자의 커피를 스트레이트로 들이켜도 끄떡없던 시절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쓰지 못할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많이 변했고,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할 거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세 해 전과 비교해보면, 변화는 커피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밥’을 안 좋아했다. 밥과 국, 김치와 몇 가지 나물로 이루어진 ‘집밥’스타일 한식상차림을 평생 못 먹고 살아야 한대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만원에 네 팩을 골라가라는 반찬가게 진열장에서 콩나물, 시금치나물, 숙주나물, 호박나물을 자동으로 주워 담고 있다. 남이 차려주는 ‘집밥’은 무조건 꿀맛이고 심지어 내 손으로 차려먹는 ‘집밥’도 맛있게 느껴질 지경이다.

 

당시 나는 맥주는 잘 취하지도 않고 배만 부르게 하는 ‘가성비 나쁜 술’이라고 불평했다. 지금 나는? 맥주 두 잔만 마셔도 꾸벅꾸벅 존다. 당시 나는 종합비타민 한 알 챙겨먹지 않는데도 잔병치레가 없다고 거만을 떨었다. 지금은? 매일 한줌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지만 알레르기성 비염 등등 몇 가지 만성질환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새치와 피부탄력 저하 같은 부분은 입 아프게 언급할 필요도 없다.

 

친한 친구에게 이 변화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는 차갑게 단언했다. “나이 드는 증거야.” 예전 같으면 괜한 위악인 줄을 알고서 같이 픽 웃고 말았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래도 그런가봐.” 나는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설마 모든 것이 전적으로 ‘노화’ 때문이겠는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 가로놓인 ‘3년 2개월’어치의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지난 몇 해 동안 내 신체가 이전과는 한층 다른 실존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건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었다. 사십대 후반, 그 변화의 속도가 급격히 가팔라진 느낌이 든다.

 

요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나이’와 ‘변화’라는 명제를 곱씹고 있다. 마음과 영혼의 나이만 젊게 유지한다면 세속의 나이 듦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었다. 그것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젊음’을 더 우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 뒤에 숨어서 나는 나이 듦이라는 의미에 대해 제대로 성찰할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했다.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온 듯하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신체적 심리적 변화라는 표현에는 저항이 없지만 노인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라고 했을 때 흥미가 뚝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내 안에 어떤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닌지.’ ( 『100세 수업』 , 9쪽)
 
『100세 수업』  이라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엔 큰 관심이 없었다. 초고령 노인들에 대해 다루었던 EBS다큐프레임 제작팀의 탐사 보고서를 단행본으로 묶은 책이라는 얘기도 흘려들었다. 내가 100세의 삶과 관련하여 아는 거라곤, 일본에서 ‘아라한(around hundred)’이라 불리는 고령의 작가들이 노년의 생활에 대해 쓴 작품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는 정도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저 문장을 접하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책의 부제는 ‘우리 미래가 여기에 있다’이다.

 

지금, 이곳의 노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건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 지당한 사실을 나는 왜 진즉 인지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늙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늙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숨을 고르고  100세 수업』 을 펼친다. 황동규 시인 식으로 말하자면,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100세 수업EBS <100세 쇼크> 제작팀 저/김지승 글/EBS 미디어 기획 | 윌북(willbook)
공공연한 노인 혐오 현상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돈만 모으면 행복한 노후가 보장되는지,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옳은 것인지, 나이 듦에 대한 본질적 질문들을 꼼꼼히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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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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