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그림을 감상하듯 관찰하고 드로잉하듯 쓴다

호기심에서 출발해 소재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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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 대상을 유심히 관찰한 후 전체 구도와 세부의 특징을 잡아내는 드로잉의 기본은 작가에게 필요한 표현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9.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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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그림을 쉽고 재밌게 배워보고 싶어서 동네에 있던 만화 학원에 등록했다. 첫날 학원에서 준 스케치북과 연필을 받아 들고 교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용감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교실에 있던 십여 명의 수강생들은 대부분 그림에 소질이 있는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들이었다. 나름 만화를 잘 그린다는 그들이 체계적인 방법으로 더 풍성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찾는 곳이 만화 학원이었다. 나처럼 그림을 못 그려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 솜씨를 일취월장 키워보자는 나의 다짐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른 수강생들은 만화 그리기의 근간이 되는 인체 드로잉을 2주면 마스터한다. 그림 솜씨에 있어 둔재 중 둔재인 나는 인체 드로잉 단계를 넘어가는 데 두 달이 걸렸다. 그래서 깨달았다. 난 정말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한 달을 더 애써보다가 결국 생긴 대로 살자며 학원을 그만뒀다.

 

드로잉을 배운 시간은 그림 실력보다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달 동안 인체 드로잉을 반복하며 나도 모르게 사람들마다 신체의 비율, 뼈마디의 특징, 근육의 모양 등이 다른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인체를 새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 벌레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처럼 시점과 각도의 차이를 인식하며 대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드로잉은 그저 대상의 외형을 사진 찍듯 그대로 옮겨 그리는 기술이 아니다. 작품의 소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출발하여 형태와 질감, 거리감과 움직임까지 이해해야 한다. 회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물의 전체적인 인상을 파악하거나, 자세한 부분을 기록하기 위해 드로잉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를 가르쳤던 만화가는 인체 드로잉을 잘 하기 위해 해부학을 따로 공부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릴 대상을 유심히 관찰한 후 전체 구도와 세부의 특징을 잡아내는 드로잉의 기본은 작가에게 필요한 표현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송 글 중에는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풍경들을 주의해서 살피고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히 표현하며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글이 있다. 라디오 원고다. 라디오작가의 글쓰기 실력은 오프닝 멘트만 들으면 안다는 말이 있다. 프로그램 시그널 음악이 깔리고 DJ가 친숙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오프닝 멘트는, 청취자들이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풍경이나 상황, 감정들을 재발견하여 가치를 찾게 하는 힘이 있다.

 

그날에 맞는 소재를 정하고, 짧은 글이지만 기승전결을 갖추어 주제를 전달할 구조를 만들고, 프로그램 성격과 DJ 특유의 어투에 맞게 문체를 가다듬는 기술적 작업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라디오작가에겐 주위 대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드로잉하듯이 쓰고, 그림을 감상하듯 주변을 바라본 후 쓴 글은 생생하고 세밀하다. 운전 중에, 혹은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듣는 라디오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청취자들은 머릿속으로 저마다 하나의 이미지를 펼친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들으며 상상하고 추억하는 이야기가 때로는 더 큰 공감과 울림을 준다.

 

인물이나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듯, 사진을 보듯 말이나 글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은 ‘묘사’의 방식으로써 큰 도움이 된다.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을 빼고 어떤 사물이나 인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단순히 ‘그 카페 분위기가 좋아’가 아니라 시각과 청각, 후각 등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듯이 또렷하게 자신이 떠올린 카페를 묘사하면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당장이라도 시도해 보면 알겠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개인적 감상을 넣지 않고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어디서부터 묘사해야 할지 기준점도 잡아야 하고, 꼼꼼하게 한참을 바라봐야 하며, 구체적이고 정확한 어휘들을 찾아 제대로 사용해야 인물이나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다. 관찰력과 표현력이 늘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묘사의 차이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면 알 수 있다. 매주 게스트들을 초대해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 고수인 셰프들이 게스트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주는 「냉장고를 부탁해」는 프로그램 형식이나 출연 셰프들이 거의 고정되다 보니, 그 회 방송의 재미는 게스트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게스트가 누구인지가 전체 시청률을 짐작케 한다면, 무슨 요리가 나오고 어떻게 그 맛을 표현하느냐는 녹화 분위기나 프로그램의 생동감을 결정짓는다.

 

간혹 요리를 먹은 후 출연자가 맛 표현에 인색하거나 너무 추상적인 표현을 해서 진행자들이 난감해 하고 요리사들마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를 만난다. 이럴 땐 나 역시 제작진과 진행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 보는 내내 속이 타들어 간다. 반면, 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향, 입 안에 넣었을 때의 식감, 간의 정도, 음식을 넘긴 후 혀끝에 감도는 맛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출연자들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맛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시청자들에게 직접 그 요리를 맛본 것 같은 상상을 하도록 돕는다.

 

묘사는 연습하면 할수록 늘 수 있다. 그림을 감상하듯 차분하게 써 내려 가보자.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지만 그림을 읽는 눈을 가지면 좋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고, 화가의 멋진 작품도 좋다. 이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면 비디오와 오디오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또는 두 개의 다른 영역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할 때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만화나 그림을 보며 문자와 더불어 이미지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고, 짧은 문구로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에 정답이란 없다. 나에게 맞는 습작이란 결국 하면서 즐겁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방식이면 된다.


 

 

망한 글 심폐소생술김주미 저 | 영진미디어
짧은 문장부터 한 편의 글까지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팁을 비롯해,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지 등 글쓰기 기법과 ‘작가’로서의 태도를 모두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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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주미(작가)

방송국에서 라디오작가와 TV 구성작가로 20년 일했다. 이후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을 비롯해 공공도서관, 문화원에서 글쓰기와 드라마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방송작가 시절부터 겪어온 글쓰기의 시행착오를 기록, 공유하고자 카카오 브런치 매거진 『방송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연재했고 브런치북 프로젝트 금상을 받았다. 현재 미디어 비평가이자 작가로 살며, 읽고 쓰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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