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병
어느 맥시멀리스트의 변명
내게 즐거움을 주는 컵이 일곱 개인데, 아니 더 마음에 드는 컵을 만나게 되면 열 개가 될 수도 있는데, 부정적인 파동을 발산하는 컵은 단 한 개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물건을 줄이지? (2018. 11. 16)
언스플래쉬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은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한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경우엔 애정을 너무 듬뿍 줘버려서 이것도 저것도 다 소중한 물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매번 버리는 일에 실패하면서도 미니멀리스트를 향한 도전은 멈추지 못했다.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책이 새로 나올 때마다 한 권도 빠짐없이 정독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서 버리지 못하고, 오직 상상 속에서만 미니멀리스트로 존재하는데 만족하고 만다. 결국, 미니멀해지려고 사들인 책들이 버리지 못할 물건으로 탈바꿈 하면서 미니멀리스트는 더 요원한 꿈이 돼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바로 이사. 이상하게도 회사에서 자리를 이동할 일이 유독 많았는데, 짐을 싸고 풀 때마다 내가 가진 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이중 삼중으로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책도 책이지만, 책상 위에 일곱 개의 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 마시는 컵, 커피 마시는 컵, 차 마시는 컵, 양치 컵 말고도 기분 따라 컵을 바꿔가며 쓰기 때문에 언제 수가 그렇게 늘었는지도 몰랐는데…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모두 필요한 컵들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옮기게 된다.
이사할 때마다 끝도 없이 나오는 내 물건들을 보면서 많은 동료들이 혀를 내두르지만, 그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나는 정리를 꽤 잘한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사용하고 난 물건은 처음에 그 물건이 있던 자리에 꼭 다시 놓아둔다. 일곱 가지 컵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이들에게도 각자의 자리가 있다. 찬장처럼 세워놓고 쓰는 책꽂이의 맨 위 칸에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작은 찻잔이, 커피 컵과 납작한 컵, 중간 크기의 컵이 그 아래층에, 커피를 내리거나 차를 우릴 때 쓰는 서버와 겨울에만 쓰는 컵이 가장 밑에 있는 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리를 잘한다고 해도 물건의 개수가 지나치게 많다 보니 책상은 항상 가득 차 있고, 그래서인지 내가 정리를 잘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물건은 우리 감정을 담아 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쓸모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즐거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너절하고 장소에 맞지 않는 물건은 모두 치우거나 버리자. 그런 물건들은 부정적인 파동을 발산하기 때문에 소음 공해나 해로운 식품만큼이나 우리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안 드는 물건들에 계속 둘러싸여 지내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그 물건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 나쁜 호르몬이 분비되는 탓이다. 물건 때문에 짜증스런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 저것 때문에 귀찮아 죽겠네. 저것 때문에 정말 열 받네. 저것 때문에 진짜 미치겠네.”
그에 반해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은 크나큰 위안과 안도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좋아하는 물건만 곁에 두자. 그 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 시시한 물건이나 한물간 물건이 우리의 세계를 잠식하게 내버려 두지 말자.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40-42쪽
책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만나면 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컵이 일곱 개인데, 아니 더 마음에 드는 컵을 만나게 되면 열 개가 될 수도 있는데, 부정적인 파동을 발산하는 컵은 단 한 개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물건을 줄이지? 물은 이 컵에 마셔야 가장 시원하고, 홍차는 저 컵에 마셔야 제일 향긋한데, 그래서 뭔가를 마실 때마다 크나큰 위안과 안도감, 평화를 느끼는데… 조금 과장을 보태 『심플하게 산다』를 100번 정도 읽었는데, 다양한 물건을 돌려가며 사용하고 그 물건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맥시멀리스트의 물건 사랑의 크기는 어떻게 줄여야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를 열망했다가, 그냥 생긴 대로 살자며 포기했다가, 이대로는 물건들이 내 삶을 잠식해 버릴까 걱정돼 정말 버릴 물건이 없나 살펴보는 반복의 과정 중에 문득, ‘물건이 많으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의문이 피어났다.
주중은 5일이고, 주말은 2일이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게 주중의 일상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고, 회사에 있는 동안 업무를 위해 들이는 에너지와 노력이 상당한데, 그렇다면 오랜 시간 머무는 장소를 나를 위한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원하는 차를 언제든 끓여 마실 수 있으려면 컵 말고도 최소 10가지 정도의 다양한 차가 담긴 티 박스와 전기 주전자, 티팟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싼 많은 물건들이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물건들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나름의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 많은 물건들을 보기 좋게 수납한다면 더 좋겠고.
우리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잠든 동안 우리를 덮치는 온갖 악몽 앞에서 무력하다. 하지만 정돈된 공간은 우리가 적어도 우주의 작은 한 모퉁이에 질서를 부여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한다.
(중략) 주변에 질서를 부여하면 마음에도 질서가 자리 잡는다. 서랍에서 자질구레한 물건을 치우거나 벽장을 정돈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고 단순하게 만들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86-87쪽
제목만 봐도 힘이 되는 책,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펜, 기운을 북돋아주는 아로마 오일 등, 참 많은 물건들에게 위안을 얻으며 살아간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힘이 될지 모르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오늘도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을 반복해 읽었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소중해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100개의 물건에서 골고루 기운을 얻는다면, 100개의 물건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인 거다. 맥시멀리스트의 물건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좋은 건 좋다고 꼭 말하는 사람
<도미니크 로로> 저/<김성희> 역 10,800원(10% + 5%)
전 세계 100만인이 공감한 삶의 방식, ‘심플’ 유럽, 북미, 중국, 일본, 아랍 국가에 이르기까지 36개국에서 100만부 이상 판매되며 ‘심플한 삶’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감을 일으킨 『심플하게 산다』. 프랑스 출신인 저자는 동양적인 아름다움에 빠져 1970년대 말부터 일본에 살기 시작했다. 서구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