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명랑한 염세주의자

그런 고민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상담을 하면서 그녀가 자주 했던 말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고, 인생은 덧없고, 그런데 뭐 하러 그렇게 해야 하나요.” (2018. 09. 27)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순간을 사는 법을 아는 사람, 그렇게 현재에 살며 상냥하게 주의 깊게 길가의 작은 꽃 하나하나를, 순간의 작은 유희적 가치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상처를 줄 수 없는 법이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민음사)

 

꽤 오랫동안 내가 진료했던 모 기업 여성 임원이 있는데, 마주 앉아 상담을 하다 보면 내가 이분을 치료하는 건지, 이분이 나를 웃기려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건지 매번 헷갈리고 만다. 부부 싸움을 하거나,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공황 발작이 심해지거나, 노모의 병환이 깊어져서 괴로운 시기에도 언제나 예의 그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나라면 도저히 농담이 나올 법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실눈을 뜨며 “선생님 저 시트콤 써도 되겠죠”라며 미드 <프렌즈>에나 나올 법한 제스처를 보여주곤 했다. 그녀가 겪어야만 했던 충격이 별것 아니거나 고통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많은 슬픔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녀가 가진 그 특유의 유머 때문이었다. 한바탕 같이 웃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을 갖고 돌아가곤 했다.

 

10여 년 전에 상담했던 중년 여성이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내게 전해주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6,7 년 전인 것 같다. 그동안은 상담을 하지 않았는데,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에 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 그녀는 학부 때 음악을 전공했는데, 인문학으로 석사를 마치고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박사가 됐다. 박사 논문을 읽어보고 그 소감을 꼭 전해드리겠노라고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다 읽지는 못 했다.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올해 안에는 꼭 논문을 다 읽고 내 생각을 글로 전해 드리겠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상담을 하면서 그녀가 자주 했던 말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고, 인생은 덧없고, 그런데 뭐 하러 그렇게 해야 하나요.” 본인 스스로도 염세주의자라고 했다. 삶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 아니냐, 라는 태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대화를 나눠도 끝은 한결 같았다. “삶은 허무하니,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냐”라는 말로 끝났다. 나는 그녀의 논리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심리치료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박사를 하게 된 데에는 내 영향도 있다고 했다. 아,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위 논문을 두 손에 들고 기억을 더듬어봤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지. 내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를 변하게 한 건 내가 아니었다.

 

온갖 고통을 뚫고 오늘에 이르게 된 건, 그녀가 명랑한 염세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우울하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고 할 때에도 그녀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진 적이 없었다. 염세적인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차마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품고도 열정이 식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흰색과 검정색 옷만 입고 왔던 그녀가 풀어낸 허무주의를 내가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밝은 기운 때문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구하려고 애써야 할 것 같지만, 살면서 부딪히는 골치 아픈 문제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라든지 “결혼하는 게 나을까, 그냥 혼자 살아야 할까?”라던가 “두 번 떨어진 공무원 시험에 재도전하는 게 맞을지, 지금이라도 적당한 곳에 취직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그만둬야 할지 지금은 경기가 안 좋으니 그냥 참고 일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과연 정답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즉문즉답으로 해결책을 척척 내놓는 멘토들도 있지만, 나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사연을 자세히 듣다 보면 결론에 이를 때도 간혹 있지만,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정신과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답이 쉽게 나올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답을 알 수 없게 되는 사연이 훨씬 많다.

 

 

언스플래쉬 22.jpg

            언스플래쉬

 

 

인생에 궁극적인 답은 없다. 성경이나 불경을 아무리 읽어도 인생의 의미 따윈 나오지 않는다. 추석날 보름달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뭘까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물어도 깨달음을 얻게 될 리 없다. 과거를 들추고, 미래를 내다 봐도 보이지 않는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답은 원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주 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디제이가 던지는 질문에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대답은 “그런 고민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라는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란 사람이 김새는 말만 늘어놨으니 디제이가 별로 좋아했을 리는 없겠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답을 구하려 하지 마라. 삶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내는 핀잔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네가 쓴 책이 안 팔리는 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제발 아저씨처럼 굴지 마. 힘이 들수록 재미있는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를 해줘야지. 넌 그런 유머가 부족해.” 맞다. 아내의 말이 백 번 옳다.

 

아무리 슬퍼도 삶은 흘러간다. 기왕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콧노래를 부르며 슬픔을 견뎌야 한다. 슬프다고 슬픈 표정만 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다.

 

“…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당신이 화난 풍랑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노래는 배 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바꿀 수 있다.”
( 『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 웅진지식하우스)



 

 

쓰기의 감각앤 라모트 저 | 웅진지식하우스
그 생각이나 느낌을 당장 글로 적어보고 싶어졌을 테니까. ‘이토록 쓰고 싶은 이유’와 ‘그럼에도 써야만 하는 이유’에 관해서, 평생 호주머니에 간직하고 때때로 꺼내봄 직한 메시지를 넘치도록 담고 있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 저/<최재경> 역15,300원(10% + 5%)

미국의 작가 지망생들이 손꼽는 인생 책 [뉴욕 타임스], 아마존 서점 베스트셀러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쓰기 카테고리를 추가했다.” “잘 쓰고 싶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쓰기의 감각』은 미국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에게 필독서이자 위로와 용기를 북돋는 인생 책으로 꼽힌..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