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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마크 밴호네커 『비행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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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임에도 불구하고 신간 한 권을 뚝딱 읽었다는 이야기, 안 그래도 늦은 마감이 조금 더 늦어졌다는 이야기, 아직까지 원고를 전송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슬픈 이야기다. (2018.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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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감을 했다. 아니다. 아직 편집자에게 메일을 전송하기 전에 이 글을 시작했으니 정정해야 맞다. 마감을 한다. 과거형과 현재형의 거리가 이토록 머나멀다는 데에 마감의 비애가 있다.

 

읽고 싶은 책은 꼭 마감 중일 때 출간된다. 물론 마감 중이라 갑자기 더 읽고 싶어졌을 수도 있다. 이번 마감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감은 언젠가 끝날 것이므로 (끝나야하므로!) 일단 책을 사서 쟁여놓기로 한다. 책들을 곁에 쌓아두면 한시라도 빨리 읽고 싶은 조바심이 손가락 끝에 전달되어 마감이 조금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소설을 쓰다말고 온라인서점 장바구니를 들락거리는 행위에 주술적 이유가 포함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마감 중 주문한 책들은 유난히 빨리 도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점 택배상자를 뜯는 심정은 치아교정기를 착용한 채 풍선껌의 은박지를 벗기는 아이의 마음과 비슷하다. 설레고 속상해서 괜히 책등 하나하나를 쓰다듬어본다. 그 중 한 권을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만지작거린다. 김연수의 새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다. 차례만 먼저 살짝 훑어보기로 한다. 정말이다. 이 정도는 마감의 신도 용서해주시겠지. 이런 산문집의 매력 중 하나는 목차를 살피다 끌리는 소제목을 발견하면 거기 먼저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는 것. 내 기분 따라 나풀나풀 건너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목차에 ‘이코노미석은 지상, 아니, 천상 최고의 창작공간’이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얼른 142쪽을 펼친 건 내 손이 아니라 우리집 고양이 손인지도 모른다. 첫 문장은 이렇다. ‘마감은 코앞인데 한 문장도 써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어지는 문장은 또 이렇다. ‘지금은 한 문장이라도 썼으니까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벌써 두 문장이나 썼네. 어이쿠, 세 문장이나!’

 

글 속에서 개인적 호칭을 부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다. 선배님!!! 이라고 느낌표를 세 개쯤 넣어 외치고 싶다. 선배란 내 길을 앞서 걸은 사람, 뒤에 오는 후배에게 이런 지혜를 전수해주는 존재를 부르라고 만든 호칭일 테니.

 

그는 이 글에서 극한 마감의 고통에 대처하는 중요한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다. 이동하는 교통수단에 오르라는 것. 오래 전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  를 강의 차 오가던 지하철 안에서 썼던 일화를 들려준다. 움직이는 곳에서 하는 마감의 위력이라면 나 또한 알고 있다. 아직 소설쓰기까지 시도해보진 못했고 짧은 에세이나 신문 칼럼 같은 글이지만 나도 택시 뒷좌석에 앉아 원고깨나 썼다. 그러나 새로운 작업 환경을 개척해보려는 능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다 못해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이라는 점에서 왠지 부끄럽다. 역시 선배는 괜히 선배가 아니다. 나는 당장 노트북을 챙겨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리라는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을 보라.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제 지하철에서는 인터넷이 터진다는 점. 그런 사정은 버스도 마찬가지다’

 

아아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면 불가능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큰 적은 인터넷이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고 와이파이 환경이 좋아질수록 유혹을 견디기도 더 힘들어졌다. 핑계거리도 풍부하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저런 자료가 필요하고, 팩트 확인이 필요하고, 포털엔 국어사전도 있고 유의어 사전도 있고. 에, 또........ 나로 말하자면 일찍부터 그런 위험성을 자각한 바, 한때 작업실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았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땠느냐고? 작업실엘 잘 안 갔다.

 

‘바로 이점 때문에 임박한 마감을 위한 새로운 창작공간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장거리 비행기 안이다. 비행기에 앉으면 우리는 일정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다. 두 끼 식사도 주니까 금상첨화다 (중략) 이건 말 그대로 하늘이, 즉 3만 피트 상공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언젠가, 아마도』, 144-145쪽)

 

 

출처_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누군가에겐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얼마나 진지한 진담인지 나는 안다. 알고도 남는다. 장거리 비행기 안이 마감에 최적화된 장소라는 것은 그 상황의 강제성 즉 ‘어쩔 수 없음’에 있다. 인터넷이 터지지 않으며, 꼼짝 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고, 밥까지 주는 공간이라니. 더 없이 이상적인 작업실이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거리까지 가는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라고 했다. 경유를 2번이나 3번 해야 하고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만 못해도 이틀은 잡아야 하는 곳. 이 직업을 계속 하는 한 ‘언젠가, 아마도’ 그곳에 가는 비행기에 오를 일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그때 내가 웃고 있을지 아니면 울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 글의 결론은 마감임에도 불구하고 신간 한 권을 뚝딱 읽었다는 이야기, 안 그래도 늦은 마감이 조금 더 늦어졌다는 이야기, 아직까지 원고를 전송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슬픈 이야기다. 어떤 슬픔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이 깃들어 있듯이 이 이야기에도 희망이 있다면 역시 독서의 힘은 위대하여 마감 중 우울 증상으로 괴로워하던 내 영혼이 독서 후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 그리고 좋은 책은 좋은 책을 부른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마도』  안에는 ‘이코노미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장이 하나 더 있다. ‘이코노미 석에 앉아 조종사의 눈으로’라는 그 장에 소개된 책이 마크 밴호네커의 『비행의 발견』 이다. 영국항공의 부기장인 저자가 보잉747기의 조종석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의 세계를 그린 책이라는데 거기엔 아래와 같은 부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달쯤은 내 비행기에 누가 죽거나 위독해서 여행하는 승객은 몇 명이나 될까, 이런 밤에 아래 세상의 빛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자주 의문이 생겼다’

 

이런 문장이 담긴 책을 주문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나는 그만 또 다시 온라인서점의 결제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이 책은 부디 마감 후에 도착해주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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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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