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청년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

『선망국의 시간』 펴내 문화인류학자의 시각으로 본 대전환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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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60, 70대 분들도 정말 고생 많이 하셨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누구한테도 고생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어쨌든 우리는 그 사회를 만든 책임도 있는 세대인 거죠. 그리고 저는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입시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손해배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2018.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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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곳은 일찌감치 망한 나라(선망국, 先亡國).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에 휩싸였던 곳.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서구 언론과 지식인들은 희망을 발견한 듯 보였다. “현 시대의 모순을 누구보다 첨예하게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 한국 시민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는 것이었다. 과연 한국은 ‘망함’의 시기를 극복함으로서 선망하는 나라(선망국, 羨望國)가 될 수 있을까.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쉽게 낙관하는 대신 확실한 진단을 내린다. 세상이 계속 좋아질 것을 믿는 근대 문명은 수명을 다했고 지금 우리는 전환의 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마음속 깊이 다른 시간대로의 이동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선망국의 시간』 은 대전환의 시기에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과 다가올 시간에 대해 성찰한다. 인류학자로서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대안교육, 마을살이, 청년문제와 관련해 대안적 공론의 장과 실천적 담론을 만들어 온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통찰과 지혜가 담겼다. 지난 4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비롯해 인터뷰와 강연록, 대담을 모았다.

 

“그간 오로지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통합을 강조하며 달려온 ‘국민’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연대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망국(先亡國)의 사람들은 “‘위’의 역사가 만들어낸 주체로서” 단일성과 통합성을 강조해 왔으며, 이들 ‘착한 국민’은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지혜로운 시민’으로 태어났다는 것.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건너갈 시간 속에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주체”로서의 시민과 그들이 가진 다양성과 연대가 자리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바람으로, 저자는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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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르기의 시간이 필요한 때


‘선망국’이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망한 나라(先亡國)’, ‘선망하는 나라(羨望國)’가 그것인데요. ‘먼저 망한 나라’라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잖아요. 일제의 식민지를 겪었고, 그 후에 한국전쟁까지 겪었어요. 일본만 해도 전쟁을 겪은 후의 시간이 서양하고 동시대성으로 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6.25 때문에 10년 늦어졌고, 그것도 아주 강압적인 형태의 군사독재적인 경제발전을 짧은 시간에 했어요. 그러면서 극단적인 불균형 발전이 됐고 ‘먹고 살면 된다, 강한 나라가 돼야 한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외부에 목적을 정해놓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렸죠. 한편에서는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이상향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87항쟁을 했고요. 민주화도 굉장히 짧은 시간 내에 한 건데, 그것도 구조라는 거대한 차원에서의 민주화죠. 정말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시민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조건은 아니었잖아요.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싸워야했을 때는 작은 목소리들은 그냥 잠잠하라고 말했던 거죠.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시면서 ‘선망국(先亡國)’의 징후를 감지하기도 하세요?


현 상태를 보면 사람들이 너무 괴로운 상황인 거잖아요. 우리가 여성 혐오를 계속 이야기하는데 미소지니(misogyny)의 여성 혐오에 더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혐오 사회가 된 거죠. 제 생각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굉장한 냉소와 자포자기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걸 넘어서서 굉장한 혐오와 적대가 일어나는 것 같아요. 선망국(先亡國)이라고 말할 때, 최근 벌어지고 있는 남녀 간의 전쟁이나 초미세 먼지를 사례로 들 수 있을 텐데요.

 

여성 혐오와 관련된 부분은 어떤 건가요?


며칠 전에 미국친구와 여성혐오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미국에도 ‘프라우드 보이스proud boys 자랑스러운 남자’ 등 혐오 사이트가 많은데 강자와 동일시하려는 기득권 출신 청년들이 드러내는 인종차별적인 신나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죠. 어떤 대상을 항상 자기 밑에 놓고 지배하고 싶어 하고, 특히 여자는 자기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성향을 보이는데 여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을 거예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왜 인종차별이 아니라 여성 차별로 가버렸을까요? ‘된장녀’ ‘김치녀’ ‘한남’ 등 모욕적 용어로 남녀 반목 현상이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청년들은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데이트를 부지런히 하는데 말이지요.

 

왜 유독 한국에서 여성혐오가 심할까요?


남자만 군대를 간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이고요. 심층적 이유는 남자 청년들이 ‘3포 세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여자청년들도 어렵긴 마찬가지겠지만 혼자 잘 살거나 직장이 없어도 집에서 일을 돕거나 비혼으로 그런대로 잘 지내는 편이지요. 가장이 되는 꿈을 꾸면서 산 남자들이 앞이 안 보이는 거죠. 여자와 결혼을 해서 가족을 이루어야 어른이 되는데 어른 되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렸죠. 실제 상황에서는 데이트 비용을 어렵게 마련했는데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이 화가 나고 잘나가는 여자들 보면 자기 자리를 뺏긴 것 같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외톨이가 된 청년들이 온라인에 모여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며 혐오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지요. 미디어는 이런 현상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정부는 화장실 몰래 카메라 등 여성 혐오 범죄를 제대로 처벌 하지 않고 있고, 청소년들은 이런 적대적 청년들이 만든 온라인에 들어가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IS에 간 청년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라고 한 것이 그런 현실의 단면이죠. 남자는 군대 가는 것을 보상하라는 역차별론과 여성 혐오가 사회의 동력이 된 것 같으니 선망국이 된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선망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건 우리가 힘겹게 ‘국민’에서 ‘시민’이 되었는데 최근에 ‘시민’에서 난민이 됐다는 거거든요. 우리 모두가 난민이라는 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기후 문제만 보더라도 이건 재난이고 우리는 난민이 된 거잖아요. 이런 시점에서 ‘조금만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식의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조급하게 굴다가 더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문제를 잡아야 되는 거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시간’이라는 단어를 넣은 거죠. 선망국이냐 아니냐는 식의 논란에 시간을 많이 쏟지 않으면 좋겠어요. 근대적인 시간을 넘어서 정말 다른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숨고르기와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한데,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글쓰기가 괴로운 순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진리를 말하려는 행위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지는 시대”라고 쓰셨고, “더 이상 합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글 쓰는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하셨는데요. 사안 사안마다 해결될 수가 없는 거라는 걸 느끼는 거죠. 우리가 ‘청년일자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게 ‘일자리’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풀릴 수가 없는 거거든요. ‘일거리’와 ‘활동’의 개념이 들어가야 하죠. 또 ‘사유’와 독점의 개념으로는 AI 시대, 탈노동사회의 문제를 풀 수 없죠. 공공재와 공유 개념이 들어와 주어야 해요. 취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 존중되고 기본 생계가 유지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죠, 그런데 그런 논의가 전혀 되고 있지 않으니 절망적이죠. 

 

<한겨레신문>에 연재하셨던 칼럼도 다수 실려 있어요.


칼럼을 쓸 때, 특히 세월호 이후에는 계속 우울해졌어요. 그래서 ‘우울해지지 않고 이 시간을 그대로 살아내는 방식이 무엇일까’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글 쓰는 시간 자체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된 건데, 그러면서 나 자신도 견디게 됐고 칼럼도 계속 쓸 수 있었어요. ‘그만 써야지’라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글쓰기가 괴로운 순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진리를 말하려는 행위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지는 시대”라고 쓰셨고, “더 이상 합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글 쓰는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하셨는데요.


사안 사안마다 해결될 수가 없는 거라는 걸 느끼는 거죠. 우리가 ‘청년일자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게 일자리라는 개념으로 풀릴 수가 없는 거거든요. 기본적으로 사유의 개념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진 공공재이기 때문에 시민배당을 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게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형태로 국가의 정책이 굴러가고 있잖아요.

 

쓰는 행위가 공허하게 느껴지실 때도 있나요?


우리 세대는 나라가 막 좋아지는 계몽주의 시대도 살았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혐오와 가짜 뉴스가 더 판을 치는 세상인데, 글쓰기를 즐겁게 하기는 힘들죠. 탈계몽주의 시대에는, 정말 기도라든가 다른 어떤 게 있지 않은 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왜 문제를 풀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소리나 하냐’고 지식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요. 최근에는 책을 세 페이지 이상 못 읽는다는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그건 정말 이해가 돼요. 그만큼 바쁘니까 그런 거죠.

 


‘난민이 된 시민들’의 지혜를 빌려야


기본소득, 시민배당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이 담론이 활성화되고 긍정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회의적인 게 사실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모든 사람한테 100만 원씩만 주면 자존감 가지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그러면 다시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죠. 그래서 시민 배당제도에 합의하고 실험을 시작해야 해요. 그런데 청년수당을 준다면서 계속 조건을 달고 간섭을 하고, 제대로 실험하지 않고 있죠. 10년을 두고 준비를 하면 되는 거잖아요. 누가 대통령이든 상관없이.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가지 않고 급하게 이상한 복지제도를 만들어 아무런 성과 없이 국고를 탕진하면서 사회를 바로잡을 시간도 뺏기는 것이 안타까운 거죠.

 

그렇지만 희망을 발견하실 때도 있겠죠?


그래도 모여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잖아요. 나는 그 분들을 ‘시민’이라고 불러요. 거기에 희망을 두는 거죠. 광화문에 나갔던 자각한 시민들이 모여서 시대 공부를 시작하고 아이를 같이 키우고 동네에 모여 밥을 나누고 동네잔치와 동네 정치를 시작하면서 ‘이게 살만한 삶이구나’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더라고요. 그러느라 바빠져서 책을 안 본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책을 같이 본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희망이 있는 거예요. 요즘 ‘엄마들의 페미니즘’ 같은 모임이 생겼던데 그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하면서 스산한 난민에서 시민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난민처럼 살고 있었는데 모이다 보니 다시 시민이 되는 거죠.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난민이 된 시민들’의 지혜가 정치판을 바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국가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얼마 전에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즐거운 놀이터, 안전한 피난처다’라는 문장을 읽었어요. 뭐든지 실험할 수 있는 즐거운 놀이터와 정말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피난처에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올 수 있는 거죠. 그걸 하기 위한 시민배당제도를 실현시켜야 하고요, 그래야 우리 사회가 선망국이 되는 거예요. 개인이 무시된 국가주도적인, 선진국이 되려고 마구 달리는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면 현재의 초복합적 현실을 읽어낼  수 없는 거예요. 문명이라는 게 흥망성쇠의 사이클인데 지금은 내려가는 중이지요. 바닥을 치고 다시 오를 때 난민적인 시민들이 역할을 할 거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자기 삶을 들여다보고 실험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홀로 있던 자리에서 서서히 나와서 상호부조 하는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그 동안 나/우리가 어떤 짓을 했는지’ 물으면서 변화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해요.

 

청년배당의 경우에는 성남시에서 실시한 바 있는데요. 작가님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가요?


굉장히 좋은 실험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실험을 곳곳에서 하면 좋겠어요. 기본소득 전문가인  강남훈 교수와 성남시가 관학협으로 추진한 좋은 사례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원 금액이 너무 적었죠. 제가 이야기하는 건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비용을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라는 청년 집단이 그 비용을 실험하고 있는데 두 명이 방을 쓰면서 공동 주거로 살 경우 최소 70만원이면 살 수 있다고 해요. 그들은 아주 많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해서 상호부조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고요. 지금 서울시에서도 청년 수당을 주고 있는데 관료적 틀 안에서 해야 하니까 실효를 못 내고 있어요. 제대로 마스트 플랜을 짜고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가면서 단계적으로 시행하면 모두가 선망하는 선망국이 될 텐데 말이죠.

 

자세하게 말씀해주신다면요?


AI에 투자를 해서 사람이 하던 노동을 로봇이 하게 할 것이라면 사람들은 로봇을 만드는 일을 하게 해야죠. 로봇과 경쟁 하는 것이 아니라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사색하고 게으른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하죠. 로봇을 활용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하려면 모든 시민들이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시간을 확보해야 해요. 국가의 역할은 시장을 견제하면서 모든 국민/시민들이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잖아요. 특히 후기 근대로 갈수록 성찰적이고 자발적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고요, 그런데 관료제가 경직되면 뭘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려요. 그런 면에서 현 정부가 역점을 둘 것은 관료행정개혁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시민 배당 제도를 택하면 관료행정일 자체가 엄청나게 줄어들게 되죠. 나는 문재인 정권의 개혁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민들은 급격하게 가난해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명석해지고 있죠. 또한 글로벌 감각을 가진 사이버 시대의 세계 주민이 되고 있고요. 그런 건강한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국가를 만들어갈 때라는 것이죠. 그간 ‘싸우는 국민’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삶을 일구는 시민’으로 살아가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활발한 공론화의 장을 만들어내야 하고, 국가는 군림하려 들지 말고 ‘난민적 시민들’의 힘과 지혜를 빌려야 하는 것이죠.

 

그런 시민들을 위해서 기본소득 제도가 필요하고요.


예,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어야 되는 거죠.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의 소비자 시민이 아니라 의논하고 실험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는 자율적이고 성찰적 시민이 되기 위한 ‘자기만의 방’과 공유 공간, 그리고 생계활동비가 필요한 거죠, 지금은 국가에서 지원금을 주면서 계속 청년들에게 프로젝트를 하라고 해요. 획일적인 입시공부 하느라 제대로 프로젝트를 해본 적도 없으니 뭔가 하는 척을 계속 하지만 낭비되는 시공간.

 


청년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


청년배당과 관련해서 “지원이라기보다는 청년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는 차원”이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60, 70대 분들도 고생 많이 하셨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누구한테도 고생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나는 우리 사회가 그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어쨌든 6070 세대는 이 사회를 만든 책임도 있는 세대인 거죠. 그리고 저는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입시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손해배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시민배당 이야기를 하면 ‘그 많은 사람한테 어떻게 주느냐’라고 하니까, 단계별로 하자는 거고 그 때 나는 청년부터 주자는 편이예요. 농사짓는 농부들부터 주자는 분들도 있지요.

 

실제로 대학에서 수업을 진행하시면서 청년들과 만나고 계시잖아요. 기성세대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나 울분을 느끼는 청년들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우석훈 박권일씨가  『88만원 세대』 를 썼을 때가 2008년이었는데 이미 신자유주의에 자발적으로 편입하기로 한 친구들은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있었어요. 그 친구들은 자기계발서를 거의 성경처럼 읽었더라고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주문을 읽는 거예요.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스스로 계발하고 끝없이 노력하라.” 이런 주문을 외운 세대 학생들은 울분을 안 느끼려 애를 쓰죠. 강자를 비판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편에 서려고 하죠.

 

‘나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예,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며 달리는 거죠. 그런데 최근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노오력 해도 안 되는 거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시작한 것 같아요. 세월호 사건으로 “이것이 나라냐?‘라고 묻기 시작한 시민들이 많아졌고 구의역 청년 스크린 도어 사망 사고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들을 크게 각성시켰죠. 그래서 광화문의 분노도 깊어졌던 거고요. 아래로부터 크게 달라지고 있죠. 이 책도 달라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서 쓴 거고요(웃음).

 

‘교육의 전환’, ‘전환의 교육’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이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자만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부모는 아이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존재로 여겨 불안과 공포 속에서 관리하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 착각이 엄청난 불행을 몰고 온 거잖아요. 지금 입시교육이 안 바뀌는 이유도 그런 거죠. <민들레>에서 또 재밌게 본 내용이 있는데, 아이들이 밤에 한두 시간 유튜브를 보고 웹서핑을 하는 게 ‘유일하게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보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학교에 가면 타율적 존재로 지나야 하죠. 이들이 아무리 피곤해도 자기가 선택한 유튜브를 한두 시간 보면서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겠다/않았다“는 자존을 유지한다는 겁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야’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라는 거죠. 아이들은 자신들이 난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런 면에서 여기서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를 이 아이들이 실천하고 있는 거지요. 아이는 이미 스스로가 난민임을 알아차렸는데, 그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나 가족이 도움이 될 수가 없죠. 거대한 타이타닉호가 가라앉고 있으면 작은 배들을 보내서 구제해야죠. 아이를 사랑한다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아이들의 안간 힘이 제대로 탈출로 이어질 수 있게 도와야 하겠죠.

 

“나는 좋은 사회란 사람들 얼굴에 화기가 돌고 홀아버지가 아이 하나를 잘 키워내는 사회라 생각한다”고 쓰셨습니다. 어떤 모습의 사회를 꿈꾸세요?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주민자치회관 같은 공공기관이나 공유공간을 밤 늦게까지 오픈 하라는 거예요. 주민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국 잘 끓이는 주민은 와서 국 끓이고 반찬 잘 만드는 주민은 반찬 만들고 서로 알고 지내면 된다는 거죠. 그러면 집밥 좋아하는 청년들이 가서 배우고, 그 날은 거기에서 밥을 먹는 거죠. 홀아버지도 아무런 문제없이 아이랑 거기 가서 밥을 먹는 거예요. 안전한 삶의 장소가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거기가 놀이터도 되고 정보센터도 되고 취업 알선소도 되고 작은 예술 무대와 전시장이 되기도 하겠죠. 그때의 취업은  ‘일자리’일 필요가 없고 좋은 ‘일거리’면 되고요. 돈을 버는 일이기보다 사회에 필요한 일이겠죠. 모여서 함께 밥을 먹고 놀 공간이 있고 삼촌, 이모, 누나, 형 비슷한 이들이 이웃이라면   아이들은 그런 분위기에서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고, 아빠가 혼자 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죠. 여유를 안 주고 생존에 허덕이게 하는 체제를 바꾸어야 해요.

 

다시 시민배당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게 되네요.


저는 정말로 시민배당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새 정권부터 본격적으로 계산을 하고 경제 5개년 계획 세웠듯 지속가능한 사회 회복 5개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봐요. 소득주도는 하나의 이슈일 것이고, 적어도 아주 큰 서너 개의 주제 중에 하나가 시민배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땅, 하늘, 자원은 모두 공유재다’, ‘최소한의 삶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안에 살게 하는 건 국가가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시민 배당을 주고 그 다음부터는 시민들을 믿어야 하죠, 시민들이 알아서 할 텐데, 저는 시민들이 굉장히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삶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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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학번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


“싸울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세상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테지요”라고 하셨는데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대상으로 싸워야 하는 걸까요?


혐오와 적대를 일으키는 세력이 누구라고 가리키는 체제를 벗어나야 할 것 같고요. 요즘 댓글을 계속 보고 있으면 죽을 것 같잖아요. 혐오와 적대 세력이 하는 일들을 보고 있는 게 힘들죠. 그런데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서로를 돌보는 사람들이니까요. 일단은 나를 살게 하는 삶의 장소, 시간, 관계를 확보하는 게 되게 중요해요. 온라인을 보면 지금이 적대와 혐오로 가득 찬 것 같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형태로 고민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거거든요. 그런데 SNS에서는 적대와 혐오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거죠.

 

맞습니다. 인터넷이나 SNS를 잠깐만 봐도 불안감을 느껴요.


사실 페이스북의 주커버그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대학에 다닐 때는 자기한테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한 사람이잖아요. 어쨌든 회사를 망하게 하지 않으려면 누구한테 팔든가, 아니면 빅데이터를 어떻게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사람도 자율성이 거의 없는 거죠. 그런 게 적인 거죠. 남자, 여자가 적이 아니고, 특정 정당이 적이 아니고요. SNS에 끊임없이 접속하게 하는, AI로 끊임없이 가게 하는, 무기를 끊임없이 사게 하는, 그런 것들도 모두 적이죠. 호락호락한 적은 아니고, 그 체제에서 정면으로 칠 수 있는 적도 아닌 것 같아요. 골리앗이랑 싸웠던 다윗처럼 어떤 다른 식의 전쟁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삶을 추슬러야 된다는 거죠. 하루하루 혐오와 적대 속에 휩쓸리지 않는 형태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명상의 시간, 같이 방안을 찾는 관계,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되는 거죠.

 

90년대 학번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신 것 같아요.


80년대 학번 남자들은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를 하기 위해서 개인이 될 수가 없었어요. 시민이 될 수 없었고, 국가 대 국가로서 싸우면서 자기가 바로국가인 거예요. 그래서 586 세대를 보면서 굉장히 걱정되죠. 개인이 없고 시민도 아닌 오로지 국민이고 자신이 국가인 주체는 위험하죠. 국가가 성숙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개인이 돼야 하거든요. 그 개인 시민들이 90년대 학번들부터 본격적으로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국가나 가부장의 폭력적 구조에 들어가지 않고 개성 있는 나로서 살겠다고 생각한 세대죠. 그래서 여성 남성이 동료로서 잘 어울린 세대예요. 결혼을 해도 명절에 자기네 집과 아내네 집을 번갈아 가면서 간다든가, 그런 생각을 상식적 합리적으로 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데요. 이 사람들이 IMF가 터지고 신자유주의화 와중에 생존에 급급해지고, 그러면서 그 중에 일베처럼 된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살다가 힘드니까.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요?


초심으로 돌아가야죠. 일상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민감한’ 시민으로서 역할을 본격적으로 해야 해요. 갑질없는,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죠. 제대로 구조를 보지 못하고 약자한테 분풀이하는 청년들의 일베화 흐름을 막을 수 있어야 하죠. 그 위 세대가 국가가 돼야 했기 때문에 못했다면, 그 밑의 세대는 신자유주의에서 생존하기 급급해서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구조와 문화 둘을 볼 줄 아는 중간 세대가 이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죠. 90년대 학번 친구들이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즐겁게 공생할 수 있는, 그런 가족과 사회와 마을을 만들어가야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선망국의 시간조한혜정 저 | 사이행성
근대 산업사회가 구조적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파괴의 단계인 ‘위험사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전환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지혜와 방법을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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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선망국의 시간

<조한혜정> 저14,400원(10% + 5%)

이 책은 시대 흐름을 읽고 대안교육, 마을살이, 청년문제 등에서 대안적 공론의 장과 실천적 담론을 만들어 온 인류학자 조한혜정의 4년만의 단독 저서다. 그는 지금 이 시대를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 ‘궐위의 시간’이라고 진단한다. 오래된 왕은 죽고 새 왕은 오지 않은 과도기, 그것은 곧 근대 산업사회가 구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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