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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에 대한 나의 이야기

스트레스에는 약보다 운동이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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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가, 지금은 멍한 정신을 깨우고 하루 종일 집중력을 좋게 유지하려고 새벽부터 뛰고 있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다 극심한 스트레스 덕택이다. (2018. 08. 09)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나는 달리기를 싫어했다. 운동회를 싫어했고, 체육을 싫어했다. 학창 시절 체육 수업 전에 몸을 풀어야 한다며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게 했던 선생님도 미워했다. 오래달리기가 대입 학력고사 성적(정확히는 체력장 성적)에 들어가던 시절이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쉽게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의 등을 바라보며 약해빠진 내 장딴지근육과 넙다리곧은근을 원망했었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나에게는 달리기가 그랬다.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를 못하기도 했지만, 빨리 달리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없었다. 자꾸 순위를 매기고, 일정 시간 안에 주파하라고 밀어 붙이니 달리는 것이 더 싫어졌다. 그저 내가 원하는 만큼, 내 몸에 맞춰 달리라고 했으면 싫어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달리기와 나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군의관으로 입대해서 장교 훈련을 받던 시기에도 달리기 때문에 꽤 고생했었다. 몇 킬로미터를 정해진 시간에 통과하지 못 하면 벌점을 받게 되고, 그러면 휴가 시에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교관의 속 보이는 협박에도 겁을 먹고 어떻게든 빨리 달리려고 애쓰던 때였다. 의사 시험에 막 합격하고 입대한 예비 중위들이나, 나처럼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들어온 예비 대위들은 거의 대부분 저질 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경상북도 경산의 훈련소 연병장을 달리다 보면 얼마 못 가 비실비실 처지는 훈련병이 속출했다. 레지던트 시절 운동은커녕 피곤에 절어 시간만 나면 누워 있기 일쑤였고, 주말에도 모자란 잠을 몰아 잤으니 입대할 무렵에는 저질 체력으로 변해 있었다. 일과가 끝난 늦은 밤이면 술과 야식으로 수련의의 설움을 풀다 보니 근육을 키울 새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멍한 정신을 깨우고 하루 종일 집중력을 좋게 유지하려고 새벽부터 뛰고 있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다 극심한 스트레스 덕택이다.

 

3년 전쯤이 내 인생에서 달리기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다. 오전 5시 아이폰 알람이 울리면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뜨고 주섬주섬 양복을 찾아 입고 피트니스 센터로 갔다. 어차피 달리다 보면 땀이 날 거고, 달리기가 끝나면 샤워를 하게 되니 세수도 않고 집을 나왔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찌뿌둥한 몸을 움직여 러닝머신에 간신히 올라가서 Mumford & Sons의 <Wilder Mind> 앨범을 틀어놓고 달렸다. ‘아, 뛰기 싫다’는 생각이 금방 끌어 올랐다. 그래도 억지로 참고 ‘Tompkin Square Park’ 노래 비트에 맞춰 발을 움직이면 8~9km/h 의 속도가 나왔다. 이 앨범의 끝에서 두 번째 곡 ‘Only Love’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들으며 뛸 때는 온 몸에서 짜릿한 전기가 통하면서 트레드밀의 속도를 더 높여서 뛰었다. 앨범의 러닝 타임 48분을 꽉 채워 달리면 대략 400칼로리 정도를 태울 수 있었다. 이렇게 새벽 운동을 마치고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집에 가기 전에 또다시 피트니스 센터에 들러서 20분 정도를 더 달렸다.

 

시간이 넘쳐났거나, 일이 적어서 한가했던 게 아니다. 뱃살을 빼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하루를 잘 버티기 위해 달려야만 했던,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때였다. 나를 괴롭히던 직장 상사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사표를 써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일하던 시절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달리지 않고는 넘쳐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나서 달리지 않으면 상념에 잠겨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나마 아침에 달리고 나면 의욕이 차올랐고, 커피를 덜 마시고도 정신이 맑아졌다. 절대 잊지 못 할 비난의 말들을 나에게 쏟아내던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달리면서 삭혀 내고 있었다. 당연히 나를 품어줄 거라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밀어냈을 때의 원망도 달리기를 하면서 지우려고 했었다. 비록 트레드밀에서만 달리는 인도어 전문 러너지만, 이때의 달리기 습관을 지금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에는 약보다 운동이 더 효과적이다. 정교하게 시행된 임상 연구들을 보면, 약한 정도의 우울증에는 운동이 항우울제만큼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뻐근하다는 점만 빼면 부작용도 없고, 돈도 들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꾸준히 운동한 환자는 항우울제로 치료한 이보다 재발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이다.

 

달리기 싫을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달려야만 하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는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집중력을 높이려는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내 나름의 은밀한 목적도 있다. 늙어서도 여행을 꾸준히 다니려면 체력이 좋아야 할 텐데, 미리 미리 운동을 해둬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소비의 동물인지라, 달리기를 하다 보니 좋은 운동화가 있으면 자꾸 사고 싶어진다. 멀쩡한 러닝화가 있는데도, 반발력을 높여 더 오래 달리게 해주는 밑창을 과학적으로 깔아놓은 것이 새로 나왔다는 광고를 보면 기어코 사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즈노 운동화를 즐겨 신는다는 것을 그의 에세이를 읽다가 알게 되었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동양인 러너에게 미즈노 운동화가 적합한지를 그의 소설 문장보다 더 흡입력 있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후에 학회 참석차 싱가폴에 갔을 때 국내에는 출시되지 않았던 그 브랜드의 러닝화를 사려고 쇼핑몰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해외에서 공수해 온 러닝화를 신어도 내 달리기 실력은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왠지 더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다.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록을 꼼꼼히 적어두고 관리하던데,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솔직히 귀찮다. 그저 내 정신이 선명해질 만큼 달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위적인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 알려주는 목표에 맞춰 달리는 게 좋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대략 몇 킬로미터 정도 달렸겠구나’라는 감이 온다. 아니나 다를까. 트레드밀의 통계를 열어 보면 내가 느낀 정도대로 나온다. 트레이닝 셔츠 아래로 땀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커피 서너 잔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명료해진다. 느리지만 꾸준히 달리다 보면 몸의 찌뿌둥한 기운이 사라진다. 지금의 나에게 달리기는 카페인이 듬뿍 든 신맛 나는 룽고이자 타이레놀이다.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키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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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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