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렐 아펠(Karel Appel)과 후세인(Husseine)

예전의 나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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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그때 나는 카렐 아펠의 작품을 보게 되었을까? 나는 왜 하필 그때 후세인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그때 나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무작정 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2018. 03. 07)

작년 이맘때쯤, 나는 일을 그만두고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위해서도 연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다른 공간에 놓아두면 지쳐 버린 내 마음이 아주 조금은 변할 거란 기대로 그곳에 갔다. 반겨줄 사람 한 명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으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났다. 그래야 할 필연적 당위도 없었고, 꼭 파리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무작정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걷기도 하고, 아무 곳에서나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아이폰에 담아뒀지만 자주 듣지 않던 음악을 일부러 골라 듣기도 했다. 멍 하니 흘러가는 강물을 보기도 했고, 독특한 디자인의 신발을 신거나 가방을 맨 파리지엔이 눈에 띄면 멀찍이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낮부터 걷다 쉬다 하며 닿은 곳이 파리시립현대미술관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곳에 가려고 목적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도도 없이 흘러가듯 그곳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상설 전시는 공짜. 초등학생들이 전시관의 메인 홀 전체를 가득 메운 벽화 앞에 둘러앉아 인솔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스르륵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특별 전시실에서는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로만 봐 왔던 카렐 아펠(Karel Appel)의 작품들이 있었다. ‘아,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 미술 문외한인 나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실물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약간의 설렘도 있었지만 속내는 ‘그래 봐야 컴퓨터 화면으로 봐왔던 장난 같은 이미지들이 모여 있는 것 아니겠어’가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눈으로만 훑으며 지나치듯 작품을 하나 둘 보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앞의 작품이 눈에 밟혀 되돌아가 확인하고, 그리고 다음 작품 앞에서는 조금 더 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이 묘한 느낌은 뭐지?’ 이 작품이 아름다워서? 처음 기대와 달리 진정한 예술처럼 느껴져서? 컴퓨터 화면으로 작게 보이던 이미지가 큰 캔버스에 담겨 눈앞에 떡 하니 있으니까 압도당해서? 이 묘한 감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곰곰이 따져봤지만, 딱 이거다 하는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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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렐 아펠 <Desert Dancers>

 

 

정체되었던 도로가 서서히 뚫리듯 내 두 발도 다음 전시실을 향해 움직이려고 하던 그 순간, 과거의 기억 하나가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그래 후세인... 이라크에서 봤던 그 꼬마 아이 후세인’

 

2004년의 뜨거웠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향해 가던 시절에 내가 우연히 만났던 다섯 살 소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소년의 기구한 사연 때문이다. 이라크 나시리아 지역 어느 다리 근처에 그 소년이 살던 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가 쏜 지 정확히 알 수 없는 폭탄이 날아와 집 근처에 떨어졌고 그 후부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를 찾아오기 전에도 여러 선생님을 만나 진찰 받았지만, 딱히 귀에 문제가 생긴 것도 발성 기관에 장애가 생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말을 못 했다. 어어 하는 소리조차 간신히 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군의관이 왔다 하니 진찰이나 한번 받아 보자 하는 마음으로 왔던 것이었다.

 

말을 할 수 없고, 글도 쓸 줄 모르니 소년은 그림으로 말했다. 나는 종이 위에 그려진 후세인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를 썼다. 그 소년을 보고, 소년의 그림을 보고,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했다. 도대체 뭘 그린 걸까. 말을 할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으니 소년이 뭘 그린 건지 물어도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짓 발짓 하며 자기 마음을 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불쑥 내 앞으로 내놓았다. 가족일까, 친구일까? 빨간색과 파란색이니 적과 아군이 맞닥뜨린 것인가? 후세인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 여기며 며칠을 두고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폭격으로 집도 부서지고 말도 잃은 소년을 어떻게든 도와주어야겠다는 묘한 책임감을 느끼며 그 그림을 손에 놓지 않은 채 몇 날 며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속에 뭔가 해답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매달리고 매달렸던 그 아이가 10년도 훌쩍 넘어 파리의 미술관에서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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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나시리아에 살았던 5살 소년 후세인의 그림

 

 

왜 하필 그때 나는 카렐 아펠의 작품을 보게 되었을까? 나는 왜 하필 그때 후세인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그때 나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무작정 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정신과 의사가 아닌 다른 일을 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예전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 그 어떤 정신과의사보다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사람과 삶에 대해 탐구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말 못 할 괴로움도 많았다. 대한민국의 여느 직장인처럼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어려움이 찾아오곤 했다. 때론 원망도 생기고, 분노가 깊은 곳에서 일기도 했지만 명색이 정신과의사인지라 스스로를 달래며 버텼다. 그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나는 점점 메말라갔다. 파리에 머물던 그때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우연히 카렐 아펠을 만났고, 후세인을 떠올리고, 젊디젊었던 뜨거운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어쩌면... 지치고 힘들어서 놓아버렸던 열정을 카렐 아펠 앞에서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라고.

 

“어린이는 버림받은 자, 내맡겨진 자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힘을 가진 자이며, 보잘 것 없고 불확실한 시작이면서 영광스러운 결말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 내재한 영원한 어린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하나의 부적응, 불이익, 신적 특권, 그리고 궁극적 가치와 무가치를 동시에 하나의 인격에다 실현한 측량할 수 없는 존재에 해당한다.”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원형과 무의식칼 구스타프 융 저 | 솔
스위스 발터 출판사가 융의 방대한 전집에서 그의 사상 전체를 포괄하면서도 기본 자료로서 꼭 필요한 핵심 논문들만 모아 펴낸 기본 저작집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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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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