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 그때 나는 왜 독일로 유학 갔을까?

일본이 수입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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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마다 자리 잡은 러브호텔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유럽의 성’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점심 정식이 한상 가득 차려지는 일산이나 분당의 식당 인테리어가 뜬금없는 ‘아르누보’ 양식인 이유는 무엇일까? (2018. 01. 05.)

1. 과거는 현재의 질문으로 재구성된다

 

<김정운의 인터벨룸>은 ‘역사적 맥락’에 던져진 한 개인의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개인사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왜 그때 독일로 유학을 갔을까?

 

‘인터벨룸(interbellum)’. ‘인터(inter)’는 ‘사이’를 뜻하고 ‘벨룸(bellum)’은 전쟁을 뜻한다. ‘전쟁과 전쟁 사이(between wars)’를 뜻하는 라틴어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이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1차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2차대전이 시작한 1939년 사이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운의 인터벨룸>이 꼭 그 기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사이, 지역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빈과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다. 100여 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일과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역사는 사실(事實)이 아니고 사실(史實)이다. 개인의 역사든 국가의 역사든 과거는 항상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된다는 뜻이다. 관점에는 항상 주체의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인터벨룸_사진1.jpg

 1987년 독일에 유학 가서 처음 찍은 사진. 독일에서 공부하면 괜히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여겨지던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성벽에서 찍었다. 내게 독일은 ‘지적 허세’의 성지였다. 그러나 그 기원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까지 올라간다.

 

1987년 11월에 독일 서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으니, 꼭 30년 전 일이다. 당시 베를린 직항 노선은 없었다. 서방의 항공기는 소련 상공을 지날 수 없었기에 알래스카를 들러 기름을 넣고 가야 했다. 위장병 때문에 한약을 잔뜩 넣은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고 18시간을 버텨야 했던 당시 비행기 좌석을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저려온다.

 

당시에는 독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분단국이었다. 예멘도 분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만 여전히 분단된 국가로 남아 있다.) 독일 통일의 과정을 직접 눈으로, 몸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사건이 그렇게 엄청난 일인 줄 그땐 잘 몰랐다. 아무리 집중해 들어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미나 진도를 쫓아가기에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교수 생활도 10여 년 했다. 나름 잘 버티던 교수직을 충동적으로 때려치우고 일본에서 4년간 다시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교토 인근의 미술 단기대학에 다니며 일본화를 공부했다. 2년 전, 일본에서 전남 여수로 들어와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여수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단지 아는 사람이 없고, 바다가 눈앞에 있다는 이유로 이곳을 선택했다.

 

이런 내 삶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유학의 동기부터 좀 더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독일로 유학을 간 것은 도피에 가까웠다. 내 대학 시절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시작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야기된 ‘87년 민주화투쟁’으로 끝났다. (박종철 사건은 요즘 영화화되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1980년, 나는 건축과에 들어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인기 연속극의 주인공이 주로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노주현으로 기억되는 연속극 주인공은 폼 나는 제도판에서 건축 설계를 하다가 두세 명의 여자와 동시에 연애를 했다. 그냥 그게 몹시 부러웠다. 그래서 건축과에 갔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대학의 현실은 달랐다.

 

대학에 입학하고 축제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낮에는 데모하고 밤에는 자취방에 모여 세미나와 토론에 열중했다. 인문ㆍ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선배들이 사용하는 ‘보케블러리’는 뭔가 달랐다. 공업수학 문제나 풀어야 했던 공대 1년생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였다. 참으로 ‘폼 나’ 보였다. 목표가 바뀌었다. 이 암울한 현실에서 한가롭게 건축 공부나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수를 했다. 사학과나 사회학과에 가야 ‘폼 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대학의 인문 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1년도 채 못 다니고 제적됐다. 제적된 이튿날 바로 강제징집을 당해 화천 백암산 일대를 30개월 박박 기다가 제대했다.

 

제대를 하니, 군사정권은 그동안 제적된 학생들을 일괄 복교시켜주는 ‘유화조치’를 취했다. 운이 좋았다. 복교를 하니 1학년 때의 성적을 기준으로 심리학과를 가야 했다. 당시 심리학과는 가장 인기 없는 학과였다. 정말 뜻이 있거나 성적이 나빠 어쩔 수 없이 가는 학과였다. 운 좋게 복교는 되었으나 복교 이후의 대학 시절은 비참했다. 그저 운동권 언저리를 쭈뼛거리며 지냈을 뿐이다. 많이 비겁했고,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졸업할 때가 되니 친구들은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며 인천, 부천으로 갔다. 난 그쪽 체질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취직할 수도 없었다.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대기업은 서구 자본주의의 끄나풀에 불과한 매판 자본주의라고 그토록 비판했는데, 어찌 삼성이나 대우 같은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까. 계속 공부하는 것이 그나마 부끄럽지 않은 피난처였다. 그러나 국내 대학원 진학은 불가능했다. 수업 거부를 할 때마다 맨 앞에 앉아 있던 나를 제자로 받아줄 교수는 없었다. 미제국주의라고 돌 던졌던 미국으로 유학갈 수도 없었다.

 

대안은 당시 한국처럼 분단되어 있던 독일이었다. 우리와 고민의 내용도 같으니 공부할 내용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른바 서구 좌파의 당시 본거지는 서독의 서베를린과 마르부르크였다. 독일의 학비가 무료인 것도 아주 큰 매력이었다. 생활비는 적당한 아르바이트로 해결되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학생들의 천국’이라는 독일로 유학을 갔다. 여기까지는 내 독일 유학의 아주 사적인 이유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선택은 항상 더 큰 문화적ㆍ역사적 맥락에서 이뤄진다. 내 독일 유학 결정을 둘러싼 보다 큰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다.

 

한때 독일어, 독일문학은 괜히 폼 났다! - 왜?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난 세기 한국인에게 독일어와 독일 문학, 독일 학문은 격조 있고 ‘폼 나는 것’이었다. 독일은 괴테와 쉴러, 그리고 베토벤의 나라였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를 끝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괴테의 문학은 엄청난 것으로 생각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교향곡 5번이 <운명>이고 ‘빠빠바 밤’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고등학생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독일어는 가장 인기 있는 제2외국어였다. 독일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독사’로 불렸다. ‘독어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독사’처럼 집요하고 무섭다는 뜻도 있다. 희한하게도 어느 학교나 독사가 있었다. 몽둥이로 ‘데어(der) 데스(des) 뎀(dem) 덴(den)’을 외우게 했기 때문이다. ‘데어 데스 뎀 덴’은 독일어의 남성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들이다. 영어와는 다르게 독일어의 명사에는 ‘성(性)’이 있었고, 각 성에 맞게 관사를 써야 했다. ‘격(格)’에 따라 정관사, 부정관사의 어미도 달라졌다. 이를 일일이 외우기란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데어 데스 뎀 덴, 디 데어 데어 디…’로 이어지는 정관사 전체를 응원 구호로 썼던 기억도 있다.

 

웬만한 대학에는 독문과 혹은 독어독문학과가 있었다. 80년대 초반까지도 독어 관련 학과의 인기도 꽤 높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독일 사이의 경제적ㆍ문화적 교류의 수준을 고려할 때, 독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이가 그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여행 자유화가 이뤄지고, 해외 교역이 활발해진 1980년 이후로 독일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한다. 실용적 활용도가 훨씬 높은 일본 관련 학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폼 나는 독일어는 ‘거품’이었다는 이야기다. 내 독일 유학도 이 거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대체 독일어는 당시 한국에서 왜 그렇게 폼 나는 것이었을까?

 

‘폼 나는 독일어’는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다. 내가 독일로 유학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가장 반가워하셨다. 일제 강점기 때 이북에서 의학전문학교(醫專)를 다니셨던 아버지는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독일어로 의학 용어를 공부했던 기억을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의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생을 사셨지만, 아버지께 독일어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자부심’ 그 자체였다. 내 아버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독일은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폼 나는 독일어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독일 철학과 독일 문화는 ‘교양’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고교 평준화 이전에 고교 입학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선배들은 독어 단어를 일부 기억한다. 내가 독일서 공부했다고 하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자신들이 독어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이 경험했던 근대 일본은 독일의 아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일본의 법과 문화 곳곳에는 독일이 흔적이 아주 깊이 새겨져 있다. 독일에 유학할 당시, 법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자신의 지도교수가 쓴 교과서가 일본 법학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이 밝혀져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독일에 유학 와서 공부하다 보니, 그 문제의 교과서와 독일의 한 법학 교과서가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도교수는 일본 책을 베꼈고, 그 일본 책의 저자는 독일 법학 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말이다.

 

법학 책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독일의 법과 제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사법ㆍ행정 영역에서 독일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1889년에 제정된 일본 민법은 독일 민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하는 법률 개념 대부분은 이에 상응하는 독일 개념들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일본 민법 체계가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도입되어 오늘날의 법체계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법 관련 영역에서 대륙법이 대세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의학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한국 의사들은 환자가 못 알아듣게 영어를 섞어 간호사에게 지시한다.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한 지시가 대부분이다.) 처방전도 영어로 마구 흘려 쓴다. 이런 모습은 아주 오래됐다. 서양의학이 일본에 들어온 후부터 있었던 모습이다. 차이라면 당시 일본 의사들은 영어 대신 독어를 썼다. 근대 이후, 새로 서양 의학을 배워 진료하는 일본 의사들 사이에는 진료 기록이나 처방전을 독일어로 쓰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독어를 쓰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권위를 인정받던 시대가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내 아버지는 나의 독일 유학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셨던 것이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대본영은 독일의 참모제도를 그대로 모방해 만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자세히 다루겠다.)

 

당시 일본에서 ‘교양’이란 곧 독일 철학과 독일 문화를 뜻했다. 일본에서는 1886년 이후 제국대학령에 따라 제국대학이 설립되기 되었다. 제국대학에서는 서양 학문이 본격 수입되어 소개되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데칸쇼부시(デカンショ節)>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데칸쇼 데칸쇼 하면서 한 반년 지내보세, 아요이요이, 그 다음 반년은 누워서 지내세! 요시 요시 데칸쇼 (デカンショデカンショで半年暮らす. アヨイヨイ. あとの半年ねて暮らす. ヨ-オイ ヨ-オイ デッカンショ)’ 입학 시험을 치르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마음껏 놀아보자는 내용의 노래다. 재미있는 것은 후렴구처럼 쓰이는 ‘데칸쇼(デカンショ)’의 뜻이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들의 철학 책을 읽다보면 지루하고 졸음이 온다는 것을 노래로 풀어냈다. 뒤집어 생각하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 그리고 독일의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국대학 학생들에게 ‘교양’으로 강요했다는 뜻이다. 이른바 ‘데칸쇼 교양’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기저에 깔려 있는 ‘서양’은 두 갈래로 들어왔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근대 초기의 일본이 해석해서 자국에 적용한 유럽, 즉 일본식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다. 독일 프로이센의 모방에서 시작한 일본식 옥시덴탈리즘은 인터벨룸 시기까지 계속된다. 이 일본식 옥시덴탈리즘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일본식’이란 이름으로 수입되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방 후, 미군 부대를 통해 수입되다가 미국에서 직접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직수입된 미국 문화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도 있었지만 미국식 서구화라는 대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 둘 중, 일본을 통해 수입된 유럽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 아주 미흡하다. 우리가 지워버리고 싶은 ‘일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수입한 유럽’은 아직도 곳곳에서 우리의 문화와 생활에 아주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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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닷없는 유럽풍의 러브호텔. 왜 변두리의 러브호텔은 죄다 유럽의 성을 흉내 냈을까?


변두리마다 자리 잡은 러브호텔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유럽의 성’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점심 정식이 한상 가득 차려지는 일산이나 분당의 식당 인테리어가 뜬금없는 ‘아르누보’ 양식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중년남자들이 학창 시절 입고 다녔던 교복이 ‘프로이센 군복’과 유사한 까닭은 무엇일가? 한때 양옥집의 이름이 ‘프랑스풍 2층집’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의 60퍼센트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은 어떤 경로로 들어온 것일까? 이 같은 질문은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계속된다. 내 젊은 날, 도피처로 어쩔 수 없이 택했던 독일 유학도 이 같은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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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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