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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안아키

한 가지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악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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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믿고 당뇨나 고혈압이나 암 치료를 중단했다가 상태가 나빠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학에서는 백 마디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마디 허튼 말로 환자가 건강과 목숨을 잃는 경우입니다. (2017. 12. 11.)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1.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의 탓인가요?


2. A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몇 가지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어느 날 B란 사람이 나타나 A의 부족한 부분을 맹비난합니다. 그러더니 옳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말을 하면서 A가 틀렸으니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B의 말은 옳은가요?

 

1번은 쉽죠? 그렇지 않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죠. ‘나만 잘해도 소용없다. 갑자기 들이받는 걸 무슨 수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올바로 살아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삶이에요. 부처님은 생로병사를 말씀하셨지요. 공교롭게도 모두 의료와 관련이 있네요.

 

2번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준 미달 정치인들이 선거 때 흔히 저런 짓을 하죠. 상대방을 비난하면 자기가 높아진다고 믿고 흠집내기에 열중합니다. 정작 공약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허황하기 짝이 없는 데도 말이죠. A의 부족한 점을 비난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과B가 옳으냐는 문제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A가 옳든 그르든, B는 자기 말을 입증해야 합니다.


왜 뜬금없이 철학적인 얘기를 늘어놓는 걸까요? 저는 <안아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사태 이후 사이비 의학책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대부분의 책에서 동일한 논리를 동원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알면 사이비를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최근 『환자혁명』이란 책이 인기입니다. 건강 서적 1위를 휩쓸고 있지요.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입소문을 타더니, 카페가 결성되어 회원 수가 2만 명에 육박합니다. 기시감이 듭니다. <안아키> 때 딱 이랬지요. 그래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질이 낮은 책이었습니다. 이런 책을 몇몇 언론에서 대서특필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또다시 <안아키>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책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보를 알려야 할 의무감이 들었습니다.『환자혁명』 의 논리도 <안아키>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양을 잘 챙기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잠을 잘 자면 병에 걸릴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인 건강론이라면 나쁠 것 없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렇게만 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비약하는 데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 심장병도 낫고, 우울증이나 암까지 낫는다는 겁니다.

 

정말인가요? 평소에 영양, 스트레스, 수면 관리를 잘 했다면 병에 걸리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뚜렷해서 잘 관리하면 막을 수 있는 병도 있지만, 모든 것을 잘 관리해도 찾아오는 병도 있습니다. 병이 뭔지 아는 사람은 저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영양, 스트레스, 수면 관리를 잘 했다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조금 바꾸면 결국 ‘병에 걸리는 건 모두 내 탓’이란 소리가 됩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인기가 없겠지요? 그러니 2번 전략을 동원합니다. 제약회사와 의사와 현대의학과 정부와 기업이 짜고 약을 팔아먹기 위해 진실을 감춘다는 겁니다. 현대의학에 한바탕 맹비난을 퍼부은 다음, 바로 ‘그러니 내가 옳다’로 비약합니다. 가만히 보시면 사이비 의학책들이 다 이런 논리로 흘러 갑니다.

 

그런데요. 영양을 잘 챙기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잠을 잘 자면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정말 의사들은 그런 것들을 ‘비밀’로 감추고 약만 지어 주나요? 예를 들어볼게요. 『환자혁명』 은 고혈압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으로 ‘몸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약을 쓰지 말라는 거지요.

 

이 말이 옳을까요? 나이가 들면 혈압이 올라가는 건 맞습니다. 건강한 음식만 먹고,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대부분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혈압을 떨어뜨려주면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물론 약을 안 쓰고 떨어뜨리면 더 좋지요. 하지만 건강한 음식만 먹고, 잠을 잘 자는 게 항상 맘 먹은 대로 되지는 않잖아요.

 

육아 칼럼이니 육아 얘기를 해보지요. 일단 백신 이야기가 나오네요. 이 칼럼에서 여러 번 다루었지만 현재 백신이 특별한 위험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없고, 질병을 확실히 예방한다는 증거는 넘칩니다.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괴담은 참 끈질기기도 합니다. 처음 괴담을 퍼뜨린 사람이 백신 회사를 고소하려는 변호사들과 짜고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영국에서 의사 면허가 취소되었는데도, 엉뚱한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확대 재생산됩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괴담이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근 20년간 자폐증의 역사를 추적한 미국의 기자 스티브 실버만은 저서 『Neurotrib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간 단체에서 후원하는 대부분의 연구가 잠재적 원인과 위험인자를 밝히려는 끝없는 탐색에 집중된 나머지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계획들은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저자는 어린이 면역 질환과 아토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원인으로 드는 것이 제초제와 화학물질, 가공식품, 식품첨가물, 대기오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좋을 리 없지요. 하지만 성조숙증에서 얘기했듯이 아토피나 면역 질환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은 걸 확실한 것처럼 얘기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세요.

 

모유 수유? 이건 소아과 의사들이 입에 달고 사는 얘기고요. 오히려 모유수유가 불가능한 여성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대두되는 형편입니다. 제왕절개? 안 하면 좋죠.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어쩌야 할까요? 이 양반이 툭하면 들먹이는 게 장내 세균총입니다(자기 클리닉에서 유산균을 팔더군요.) 장내세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과학자 롭 나이트는 저서 『내 몸 속의 우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프로바이오틱스의 한 가지 문제는 효과가…과장되어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생물 중 어떤 것도 사람에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안아키>에서 활동하던 부모들이 다시 카페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현대의학의 무능과 부패가 싫어서 대안을 추구했을 뿐인데 억울하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대의학이라기보다 의사들이 문제란 건데, 그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무능하고 권위적인 의사들을 두둔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악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해를 끼치지 말라.”『환자혁명』에도 좋은 얘기가 많습니다. (뻔한 얘기들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 책을 믿고 당뇨나 고혈압이나 암 치료를 중단했다가 상태가 나빠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학에서는 백 마디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마디 허튼 말로 환자가 건강과 목숨을 잃는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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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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