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먹는 여자

남성사회가 소망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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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몸은 별로 먹을 게 없다. 초콜릿, 고추, 소시지, 오이, 바나나 등인데 대부분 성기에 집중되어 있다. 돼지 수육에서 자연산 회까지 온갖 유기농 산해진미를 온몸에 고루고루 갖춘 여성의 몸에 비하면 영 부실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가공 육류도 있고 음식이 서로 궁합도 잘 안 맞는다. (201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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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장관에 지명되었던 후보자가 42년 전 좋아하던 여성의 도장을 파서 허위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갑자기 사방에서 “옛날에는 (여자를) 보쌈도 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를 보쌈한다니, 여자의 살이 정말 돼지 수육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보쌈이 먹고 싶은데 날이 더워서 수육을 삶기가 귀찮아 참고 있으니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지 어언 50년 가까이 되었어도 지구별의 남성들은 달나라에서 토끼가 방아 찧던 시절의 ‘낭만’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세상이 진화를 하든 진보를 하든, ‘남자의 본능’이란 세계를 끌어 붙들고 언제나 수렵과 채집의 시대로 돌아가 ‘사냥꾼’ 본능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은 예견되었던 일이다. 이 세상에서 비유 척결이 목표도 아니고, 그건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불균형적으로 퍼져 나가는 우리의 차별적 언어는 ‘자연’이나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힘으로 축적한 수치스러운 흔적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여자만 먹거리에 비유될까. 남자도 물론 먹거리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그 범위가 훨씬 좁고 활용도가 낮음은 물론이요, 나타나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일단 남자의 몸은 별로 먹을 게 없다. 초콜릿, 고추, 소시지, 오이, 바나나 등인데 대부분 성기에 집중되어 있다. 돼지 수육에서 자연산 회까지 온갖 유기농 산해진미를 온몸에 고루고루 갖춘 여성의 몸에 비하면 영 부실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가공 육류도 있고 음식이 서로 궁합도 잘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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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시인의 불확실성>, 1913년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의 그림 <시인의 불확실성>을 보자. 아프로디테 토르소와 바나나 한 무더기가 있다. 여성의 벌거벗은 몸뚱이와 바나나가 함께 있으니 오늘날에는 에로스적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데 키리코의 그림은 수수께끼다. 그의 다른 그림 <몽파르나스 역>에도 바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시인의 불확실성>의 뒤편에 기차와 배가 있듯이, 몽파르나스 역에 놓인 기차와 바나나의 관계는 여행을 연상하게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기차역과 증기기관차는 미술과 영화에서 꾸준히 새로운 문명과 이동의 자유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불려나왔다. 당시의 바나나란 이렇게 이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국적’인 문화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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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몽파르나스 역>, 1914년

 

지금 바나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과일이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바나나가 비쌌기 때문에 주로 손님이 오면 맛볼 수 있는 선물용 과일이었다. 마치 ‘일제’ 전자제품처럼, 바나나를 먹어 본 경험은 다소 ‘고급 수입 문물’을 체험한 듯한 기분을 안겨줄 정도였다. 이렇게 당시 바나나가 가지고 있던 ‘수입’, ‘고급’의 상징성이 오늘날 사라졌듯이, 상징은 그렇게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혹은 개인적 경험에 따라 가변적이다.


상상력의 ‘자유’가 아주 협소한 영역에 있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상상의 성애화는 상상력을 길러주기는커녕 상상력의 범위가 성애 안에 갇혀서 확장을 못 하게 한다. 그러니 ‘바나나’에 대한 상상력이 뻔해지고 ‘바나나 먹는 여자’ 타령이나 하게 된다. 성차별적 인식이 얼마나 상상력을 가둬 놓는지, ‘페리에 광고’ 논란이나 ‘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의 성 해방과는 무관한, 남성의 여성을 향한 자유로운 대상화를 마치 ‘리버럴’의 정신이라도 되는 양 갈망한다. 여자를 죽이거나 벗기는 진부한 표현을 무한 반복하면서 상상의 자유를 외치는 희한한 상황이다. 한 여성 연예인이 입에 휘핑크림을 잔뜩 뿌리는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반응을 떠올려보자. 여성을 대상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적 판타지가 어쩌고 하면서 자유를 외치다가도 정작 여성이 입에 휘핑크림을 뿌려대며 얄궂게 웃으니 온통 성질을 내기 바쁘지 않았나. 그 성난 반응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일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여자들에게 ‘성기처럼 생긴’ 오이와 바나나 등의 음식을 직접 만지지 못하게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요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남자들이 이 식재료를 잘라서 준다고 한다. 길쭉하게 튀어나온 물건을 입에 넣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성을 비틀어 보여주는 장면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등장한다. 복남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남편이 들고 있던 칼끝을 자신의 입에 물고 혀로 살살 핥는다. 이에 정신 못차리고 남편이 느슨해진 틈을 타 상황은 전복되고 복남이는 순식간에 그 칼을 입에 물고 남편을 찔러 죽인다. 길쭉한 것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구멍만 있으면’ 여자 성기를 연상하는 구멍애자들에게는 심지어 블랙홀도 외설스러운 작명으로 보였다. 그 머릿속이야말로 진짜 블랙홀이다. (이 논란은 『The Black Hole, 25 Years After』, 『The Black Hole War』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남성기에 비유되는 먹거리에 대해 늘 품고 있는 궁금증이 있다. 남성기에 대한 비유는 묘하게도 평상시 모습이 아니라 발기된 상태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바나나를 남성기에 비유한다. 심지어는 ‘가운데 다리’라는 말도 있다. 대상화라기보다 오히려 남성성의 과시용으로 쓰인다. 즉, 바나나, 소시지 등은 여성에 의한 남성의 대상화가 아니라, 남성사회가 소망하는 이미지다. 다시 말하자면 오이, 고추, 바나나, 소세지 등으로 남자가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먹는 여자’를 대상화하며 이 여자들을 보는 쾌락을 누리려 한다. 이러한 마음을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포장하면 바로 JTBC에서 방영했던 <잘 먹는 소녀들>이라는 방송이 되는 것이다. 이 방송을 보면 먹는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가 어떻게 문화가 되는지 알 수 있다. 닭 뼈를 먹는 여성의 입을 클로즈업 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있다. 몇 년 전 방앗간에 고추를 빻으러 간 엄마. 덜 맵다는 고추를 텃밭에 심었는데 고추가 무지하게 맵다고 했더니 방앗간 사장님이 말하길, 가뭄이 심한 후에 장마가 계속되는 악조건 속에서 고추가 더 맵다고 했단다. 실제로 고추 전문가들의 의견을 찾아봤다. 고추의 맵기 정도는 크기가 아니라 습도와 관계있다고 한다. 건조한 지역의 고추는 덜 맵고 습기가 많은 환경에서 자란 고추는 각종 병충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매워진다고 한다. 곧, 고추의 매움은 온도와 습도 등 환경의 영향이지 고추 크기와 일치하진 않는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아마도 작은 고추가 맵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열망이 담긴 표현일 것이다.


남자의 성기는 음식보다는 주로 공구나 기계에 비유한다. 총, 카메라처럼 무언가를 찍거나 쏘는 도구다. 그래서 ‘물건’이 된다. 남자의 물건. 이 물건들은 찍고 쏘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몰카 범죄의 난립은 ‘물건’에 해당하는 남성의 성기와 눈을 기술적으로 확장한 성범죄다.


얼마 전 미국 남서부의 뉴멕시코 주에 가니 온통 고추투성이였다. 집집마다 걸어놓은 고추들은 색깔도 크기도 다양할뿐더러 황토색 어도비 양식의 건축물과 어우러져 보기에 예뻤다. 마음에 잠깐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주는 고추들. 조지아 오키프의 활짝 핀 꽃이 떠오르는 뉴멕시코에서 고추 그림이 그려진 컵을 하나 사왔다. 아침에는 바나나도 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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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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