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놀이

오은 『유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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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거기로 뛰어가는 것. 그리하여 ‘나’를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것. 오은의 시는 그런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가 그리는 도약은 기쁨의 도약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어서, 결국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감행하고야 마는. 그런 내몰려버린 상황이 『유에서 유』를 크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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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나의 별명은 황소와 황진이였다. 내 성이 황이기에 아이들이 그런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언어의 유사성을 이용해 다른 언어들을 연결시키고는 하니까. 어른의 입장에서야 시시하고 재미없는 놀이일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장난도 너무나 즐겁다. 새로우니까. 세상의 여러 개념들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니까.

 

시의 주된 방법론으로 말놀이를 사용하는 오은의 시에도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있다. 세상의 여러 개념들을 연결시키며, 새로운 개념을,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오은 시의 작동방식인 것이다.

 

오은의 새 시집 『유에서 유』는 이러한 새로움의 발명이 지속되는 한편, 쓸쓸함의 정서가 더욱 진하게 나타난다. 아이의 놀이가 점차 어른의 놀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세상에 즐거움 말고, 다른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런 어른의 놀이.

 

너무에 대해, 너무가 갖는 너무함에 대해, 너무가 한쪽 팔을 벌려 나무가 되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비로소 생장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세상을 향해 팔 뻗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품은 부정적 의미는 사라져

 

나무는 너무 많이 흔들린다

 

너무 너다워
너무 쑥스러워
가지가지 비밀들이 수줍게 움텄다

 

너무
나도 너도 아름다웠다

 

-「너무」 부분

 

시인은 ‘너무’가 ‘나무’가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너무’가 한 팔을 뻗어 ‘나무’가 된다는 시인의 진술은, 바깥을 향해 팔을 뻗음으로써 타자를 만나는 순간을 그려내는 것이고, 동시에 ‘너’가 ‘나’로 전환되는 순간을 조성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서정시의 근본 원리 가운데 하나이고, 그 과정 속에서 이처럼 기호의 임의성을 이용해 의미의 필연성을 창출해내는 것은 오은 시인만의 독보적 능력이다. 오은 시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관념의 발명이 만들어내는, 인식의 가벼운 도약의 순간에 있다.

 

나무가 너무 많이 흔들릴 때, 관념과 존재는 뒤섞이며 기묘한 혼재의 상태에 놓인다. ‘너’와 ‘나’가 함께 흔들리며 함께 하는 그 놀라운 마술의 순간, 그리하여 ‘너무’ ‘나’도 ‘너’도 아름다워지는 이 기적적인 인식의 도약이 오은의 시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도약의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 놀라운 가벼움의 영역에서도, 오은의 시는 기뻐보이지가 않는다. 조금 침울하고, 조금은 쓸쓸하고, 또 조금은 씁쓸한 정서가 시의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너를 살렸어
이 문장이 이 시를 살렸어
이 단어가 이 문장을 살렸어

 

네가 이 단어를 살렸어
네가 물속 깊이 잠겨 있던
이 단어를, 하나의 넋을 건져 올렸어
-「구원」

 

 이 놀이의 출발은 어디에 있는가. 말로 말을 부수고 다시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이 놀이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말놀이는 ‘구원’이 필요하기에 시작되었으며,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살리며 끝을 맺으려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오은의 시는 때로 슬프게 느껴진다. 오은의 어떤 시들은 구원이 필요해서,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과 말들을 이으며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문장과
“뛰어가는”으로 끝나는 문장이
“여기”와 “거기”를 경계로 나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중략)

 

다시 꿈꾸기가 겁나는데
섣불리 끝내기가 부끄러운데

두 다리를 오므리기에는 너무 커버려서

 

나는 여기에서
거기로 뛰어갔다
-「어른」

 

여기에서 거기로 뛰어가는 것. 그리하여 ‘나’를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것. 오은의 시는 그런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가 그리는 도약은 기쁨의 도약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어서, 결국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감행하고야 마는. 그런 내몰려버린 상황이 『유에서 유』를 크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쓸쓸하고, 그렇기에 씩씩하다. 주저앉을 수 없어서, 이미 ‘어른’이니까, 담담하게 도약을 감행하는 것. 그것이 오은의 시가 갖게 된 묘한 파토스의 정체가 아닐까. 관념이 물질이 되고, 물질이 관념이 되는 이 놀이가 지속되면서, 오은의 시는 점차 더 쓸쓸해진다. 구원이 필요한 세계에서,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어른의 쓸쓸한 놀이. 오은의 시는 어느새 그런 어른의 놀이가 되어 있었다. 


 

 

유에서 유오은 저 | 문학과지성사
오은의 세번째 시집 『유에서 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거침없는 폭로와 상처, 어둠, 쓸쓸함 등의 감정을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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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유에서 유

<오은> 저10,800원(10% + 1%)

무에서 유를,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오은이 선보이는 언어의 마술 오은의 세번째 시집 『유에서 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 2013) 이후 3년 만의 시집이다.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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