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잔의 중년심리학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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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주인과 종이 아닌데 무슨 신분관계를 맺으랴.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달라졌다. 물론 나는 딸에게 물과 그릇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노비 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아버지와 나 사이의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대화(dialogue)라기보다
반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신분을 확인하는 의식(ceremony)에 머물렀다는
점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음, 110쪽

 


1.


일요일 저녁, 모처럼 가족이 다 함께 밥을 먹는다. 주말 알바를 다녀 온 대학생 딸도 막 손을 씻고 식탁에 앉는다. 잠시 후, “아빠 물 한 잔만 줄래?” 라고 말한다. 정수기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딸이 일어나 물을 따른다. 또 잠시 후, 이번에는 앞 접시가 하나 필요하다. “미안한데 앞 접시 하나만..”  딸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아빠 그냥 드시면 안돼요?”. 가는 말 오는 말이 곱지 않게 오고 간다. “야. 너는 아빠한테 그것 하나 못해주냐?” “ 알바 다녀와서 피곤한데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그러면 짜증나잖아요.”

 

이런, 망할 기지배. 속에서 욱하고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앞에 있던 아내는 예기치 못한 상황전개에 우물쭈물거리고 나는 한 마디를 더 하려다 에이 관두자, 이러면서 수저를 내려놓고, 딸도 쪼르륵 제 방으로 들어가면서 단란할 뻔 했던 가족 주말 식사는 파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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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 들어와 삐진 새색시처럼 앉아있자니, 억울함과 분함과 서운함의 감정이 마구 몰려온다.  2 주가 지난 지금 그 감정의 근원을 찬찬히 따져보니 우선 억울함은 본전생각과 닿아있다. 나 어릴 때 아버지와 밥상을 같이 할 때는 늘 어려웠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생선처럼 좋은 음식이라도 올라오면 늘 아버지 차지였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행여 입 속에 밥풀을 머금은 채 말을 하거나 형제들끼리 킥킥거리며 장난이라도 쳤다가는 오줌 지릴 정도로 야단을 맞아야 했다. 아버지가 물을 떠오라고 하면 군말 없이 물을 떠와야 했고, 행여 막걸리라도 받아오라고 하면 빈 양은 주전자 달랑달랑 들고 반 시간은 족히 걸리는 양조장을 걸어갔다 와야 했다.

 

아버지가 된 지금 그 정도의 대우를 받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릇 하나 달라는 것에 정색을 하는 딸을 보며, 옛날 생각도 나고 본전 생각도 났던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이제 다 컸다고 저리 튕겨나가? 라는 분한 감정은 부록. 평상시 웬만하면 마음 불편해서 심부름 하나 시키지 않았건만 모처럼 가족들 다 모였을 때 애비 대우 잠시 받아보려고 했던 것을 못 받아줘? 라는 서운함은 사은품.

 

그러고 보니 딸이 대학생이 된 이후, 몇 번의 충돌이 연속 있었다. 같이 청소를 하다가, 같이 산책을 하다가 팽하니 토라졌고 몇 일 후 화해의 과정에서 또 한바탕 부딪쳤다. 일관되게도, 딸은 아빠가 왜 이리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느냐고 따졌고, 또한 한결같게도 나는 딸에게 왜 이리 무례하냐고 야단쳤다. 내 입에서 나온 말 조각들은, #아빠가 네 친구냐? #이건 야단을 치는 것이지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다 #왜 네 입장에서만 생각하냐? 와 같은 것이었고, 딸은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아빠는 독선적이야 #아빠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 #아빠는 내 마음을 정말 몰라 와 같은 것이었다.

 

독선적이라니? 열 마디 하고 싶은 것도 한 마디만 하고, 제 투정 다 받아주며, 저들 커가면서 집 안에서 실제 눈치는 누가 보고 있는데 독선적이라니? 그러나 이런 횟수가 최근 몇 차례 반복되자 스윽하고 드는 의심, 혹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2.


전인권은 자신의 책 『남자의 탄생』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최근 10여 년 사이 나는 실패를 거듭해왔다”. 착한 아들, 훌륭한 학생, 친절한 동료였으나 중년에 접어든 지금 그들과의 관계에서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며, 스스로 묻는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처음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건, 올 봄에 출간된 나의 졸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독후감을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직접 들을 때였다. 선배는 ‘한국 남성의 자기 고백적 성찰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남자의 탄생』이라 말했고, 전인권이 저자라고 했으며, 나는 들국화의 전인권을 떠올렸다가, 그 사람과 동명이인임을 알았고, 나의 책은 ‘한국 아버지의 자기 고백적 성찰서’로 그 책을 능가한다는 과찬을 들었을 때, 우쭐함보다는 쑥스러움이, 무엇보다 그 책 『남자의 탄생』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58년 개띠, 그러니까 살아있다면 전인권 저자는 내년에 육십이 된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주도했으며 봉건적 부모와 신세대 자녀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베이비부머’ 세대다. 그는 이 책을 마흔 중반에 썼고, 마흔 후반에 암으로 사망했다.

 

마흔을 넘기면서 그는 내가 그러했듯 중년의 통과의례를 톡톡히 치렀던 것 같다. 잘 살아온 것 같은데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혼돈감. 젊잖은 것 같으면서 폭력적이고 민주적인 듯하면서 독선적이며 수평적 인관관계를 중시하는 듯하면서도 권위적인 자신의 양면성을 작가는 자각한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실패의 중년으로 만들었는지의 연원을 더듬어 가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바둑을 차근차근 복기하는 프로 기사처럼, 의사 앞에서 정신분석을 받는 내담자의 자세로, 그는 5살부터 12살까지의 유년기를 파고 들며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와 친구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과 환경을 분석해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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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나의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졌다는 것을’ (19쪽). 가부장적 아버지, 원칙 없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가풍 속에 동굴 속 황제처럼 키워지고 국가주의와 병영주의에 오염된 학교에서 가치관을 익한 소년이 시간이 지나 중년이 되었을 때, 번번히 직장 후배와 충돌하고 아내와 다투며 자식과 갈등하기 시작하는 것은 예견된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은 동굴 안 왕국의 신하들이 아니므로, 그를 동굴 속 황제로 인정해줄 이유가 없으므로.

 

“사적 기록을 통해 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조명하는 유일무이한 텍스트”라는 책 뒤의 해설은 다소 과장된 느낌도 들고, 내 안에 남아있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처방은 진부하거나 막연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저 위의 노비문장 속의 ‘신분을 확인하는 의식’은 벼락처럼 직선적이고 폭포처럼 통렬한 통찰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을 가려고만 했고, 나더러는 나의 길을 가라고 했다. 정작 두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는 길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신분관계로 맺어진 아버지와 나의 관계였다.” (95쪽) 는 구절은 좀 더 친절하게 신분이라는 핵심어를 설명한다.

 


3.


나를 포함해서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신분관계’ 말고 ‘인간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던가?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끌어안고 안쓰러워하고 고함도 치고 삐지기도 했지만 한 이불 속에서 뒹굴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인간 관계’라고 명칭 했을 때, 아버지는 수직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저 위에 계신 분이었고, 훈계하거나 명령하거나 야단치는 분이었으며, 아들은 그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 내며 기대에 부응하고자 고군분투하는. 그러니까 그 둘은  ‘신분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마치 유전처럼 제 몸 속에 신분적 관계의 소통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키고 세대를 이어 이것을 계승시키는 한국 남성의 특수성. 바로 여기에 중년 전인권의 실패가 있었고 우리집 밥상머리의 불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분적 관계’로 나를 분석하면 스스로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회사에서도 나는 직원들과 ‘인간관계’보다는 사장과 직원이라는 ‘신분관계’에 더 익숙해져 있음을 인정한다. 후배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데, 언제나 그들보다는 내가 위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해서 가끔 술자리에서 불손하다는 것을 트집잡아 후배를 야단치려 한다. 아내가 문자 한 통 없이 운동 후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대부분 그런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심기가 비암처럼 꼬이는 것을 보면 그 놈의 가장이라는 권위의식을 관 속까지 가지고 갈 것 같아 한심하고 혐오스럽다.


인간이 인간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주인과 종이 아닌데 무슨 신분관계를 맺으랴.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달라졌다. 물론 나는 딸에게 물과 그릇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딸은 거부할 수 있고 나는 그 거부를 ‘아빠에게 그것도 못해주냐’ 며 시비할 수 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 의식의 문제다. 명령을 해야 본전을 차리는 것이고 부탁을 하면 모양이 빠진다는 생각, 나는 정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독후낙서(讀後落書)


『남자의 탄생』이 작가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형성과정을 심리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분석했다면.『TO KILL A TIGER- a memory of KOREA』는 한국 여성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한국 여성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이 매우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 대학 졸업 후 도미, 이후 한국인으로서 영문학 박사 취득 및 영문학 교수가 된 작가 Jid.Lee는 한 발짝 떨어진 객관의 시선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내밀한 가족사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비록 한국 번역서가 아직 나오지 않아 아쉽지만, 미국 출판계와 아마존 등에서 좋은 호평을 받은 책이고 『남자의 탄생』이 한국 남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 책은 한국 여성의 의식적 뿌리를 이해하는데 충분히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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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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