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섬에서 홍차를 마시는 시간

하루 한 상 – 열다섯 번째 상 : 스리랑카 홍차 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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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홍차 한 잔이었다. “어떤 차를 드시겠어요?” D 홍차 집 메뉴판에 적혀있던 이름들. 누와라 엘리야, 갈레. 홍차의 나라, 스리랑카 도시의 홍차와 맛을 설명해 놓았었다. 그리고 캔디라는 이름 밑에 적혀있던 설명. ‘스리랑카 옛 왕조의 수도 캔디에서 온…’ 2년 전 그 홍차를 마시며 이번 실론섬(스리랑카의 옛 이름) 여행은 정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열다섯 번째 상은 스리랑카 홍차 한 상.

Pot of Tea, 홍차 한 상

 

D 홍차 집은 차를 티포트에 넉넉히 담아 티코지로 감싸서 서빙해 주고 기본 홍차 한 잔으로 리필도 가능했었다. 그 모든 게 ‘급히 마시고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오랜 시간 따뜻하게 즐기세요’라는 표현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때부터 홍차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느긋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내가 마신 홍차의 도시, 캔디. 그리고 그 나라 스리랑카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시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리랑카를 위한 시간을 따로 넉넉히 떼어두었다. 티포트에 가득 담긴 홍차처럼.

 

스리랑카에 도착하고 삼 일째, 메뉴판에서 보았던 캔디에 도착했다. 두 번째로 큰 도시답게 복잡하다. 정신없는 거리를 걷다 발견한 ‘Tea centre’라는 나무 푯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1층은 티숍, 2층으로 올라가니 차를 마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둘이서 ‘Pot of Tea’를 하나 주문하니 티포트와 두 개의 찻 잔을 내준다. 홍차 한 상을 받은 기분이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긴다. 밖의 소음과 매연은 먼 우주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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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대는 캔디 호수와 티센터에서의 홍차 한 잔

 

 

이 홍차 한 잔이 내 앞에 오기까지

 

홍차에 한창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에 읽었던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가 떠오른다. 1800년대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차 마시는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맥주와 커피 등 남성들만을 위한 사교 음료가 번성하던 시기. 차가 수입되면서 여성들의 티파티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도자기, 티 가운 등 차와 관련된 다양한 문화가 전파되거나 새로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인기에 비해 중국산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영국이 인도와 스리랑카를 식민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차 나무를 심었다. 지금 그 두 나라는 홍차 생산량과 수출량에서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스리랑카의 홍차는 고원지대, 이른바 힐 컨트리(Hill Country)에서 대부분 재배된다. 누와라엘리야, 캔디, 우바, 딤불라, 루후나 등이 5대 맛 좋은 차 생산지인데 우리는 우바(Uva) 지역의 하푸탈레(Haputale)라는 마을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 토마스 립톤이 만들었다는 차 농장과 공장, 그리고 그가 홍차를 마시며 그 모든 걸 내려다보았다는 ‘립톤 시트(Lipton’s seat)’에 가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낮게 펼쳐진 차밭의 초록이 싱그럽다. 하지만 이내 마음 한쪽이 불편하다. 결국 이 모든 게 식민시대의 산물이며 100년 넘게 적은 양의 임금을 받고 아직도 고된 노동을 하는 타밀족(차 농장의 노동자가 필요해 영국이 인도에서 강제 이주시킨 민족)에 대한 불편함일 것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모두 인사를 건넨다. 그들의 미소를 보며 내가 되려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든다. 정상에서 찻잔을 손에 쥐고 ‘이 홍차 한 잔이 내 앞에 오기까지’를 생각해보며 왠지 모를 겸허한 마음으로 한 모금씩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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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차따기를 끝내고 먼 하늘을 벗 삼아 쉬는 타밀 여인들.

그녀들에게 좋은 휴식이 되길 빌면서 내려왔다.

 

 

마음에 주는 음식, 하루 한번 홍차

 

스리랑카에 와서 우리는 매일 적어도 하루 한번 홍차를 마시고 있다. 두세 번 마실 때도 있다. 아침에 온기를 더할 때, 오후의 피로가 무거울 때. 따뜻한 차는 손을 먼저 데워주고 코와 입에도 훈기를 전해주고 마지막엔 속과 마음을 풀어준다. 김소연 시인의 책,  『마음 사전』에는 차에 관한 이런 문구가 나온다.

 

밥은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두 개의 찻잔과 때에 따라 티포트, 우유와 설탕을 앞에 두면 마음에게 주는 한상이 준비된다. 경사진 차밭과 애덤스 피크를 보며 마셨던 플레인 티, 번잡한 기찻길 옆 달달하고 보드라운 하푸탈레에서의 밀크티, 너른 들판을 마주하며 들이켰던 보타니칼 가든의 레몬 아이스티, 둥둥 구름 위에서 로티를 씹으며 홀짝였던 립톤 시트의 모닝티. 아마 나는 홍차를 마실 때마다 각각의 도시와 시간이 떠오를 것이다. 실론섬에서 홍차를 마시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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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섬 홍차 메들리

 

 

(부록) 남편의 상: 기차에서 홍차

 

안녕하세요. 하루하루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홍차를 즐길까 구상하는 남편입니다. 이곳 스리랑카 힐 컨트리 여행의 백미는 기차인데요. 4시간 정도 달리는 캔디와 엘라 구간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산과 산 사이 마을을 잇는 기차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계곡과 차밭, 숲을 보고 있노라면 배가 고플 새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중한 홍차 시간을 거를 수는 없죠. 기차가 떠나기 전 부리나케 식당에서 한두 잔을 보온병에 담아와 마시곤 합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에서 차 한 모금과 초록빛 풍경은 지겹게 느껴질 만한 이동 시간을 어느 때보다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어줍니다.

 

하푸탈레 숙소에서 기차 기적 소리가 울릴 때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기도 하고, 이곳 사람들처럼 철도 위를 걸어 마을 너머 언덕까지 가보기도 했습니다. 기차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 것은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를 쓰신 기관사님의 팟캐스트 방송이었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아침 기관사가 보는 철도의 풍경과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한때는 서울역이 공항처럼 국제선과 국내선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손기정 선수도 기차를 타고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기관사가 되기에는 좀 늦은 것 같습니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점심에 평양냉면을 먹고, 저녁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갈아타서 툰드라 벌판을 지나보고 싶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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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에서 홍차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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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이소부치 다케시 저/강승희 역 | 글항아리
이 책은 일본의 홍차 권위자가 쓴 역사기행서다. 중국, 일본, 영국의 차 문화에 일가견이 있는 저자는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에 그간 자신이 연구해 온 지식을 모두 실었다. 홍차와 관련있는 회화, 지도, 각종 유물 사진을 실어 홍차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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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윤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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