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의 절도일기 예고편

‘이제야말로 독서를 해야겠어’ 하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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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결심을 밝히자면, 나는 2016년에 최소 25권의 책을 읽기로 했다. 아울러, 하는 김에 저자들의 스타일과 구성법을 하나씩 훔쳐오기로 했다. 이는 예전에 영화를 볼 때마다 제목을 기록해놓은 연유와 비슷하다. 그것은 내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천재작가가 아니기에, 본 영화의 제목마저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 결심은 작년 성탄절 후, 해운대에 위치한 한 호텔 객실 창가에 앉아 했음을 밝혀둔다. 굳이 호텔에서 했다는 것을 왜 언급하느냐면, 객실비가 아까워서다. 내가 치른 비용에 비해 유용한 혜택을 받지 못했거니와, 그날 밤 이룬 숙면이 인상적이라 추가비용을 내고 호텔 베개까지 사 왔기 때문이다. 이에 이 결심을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했다는 것을 굳이 밝히는 바이다. 아,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
 
그러면 이 결심이 무엇이냐면, 조금만 기다리시라. 나는 소설가이므로 원래 지면 채우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버는 현실적 방법은 지면을 가급적 현란한 단어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말을 돌려 오천 원 정도 번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알고 보면 꽤나 양심적인 사람이므로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 내 정신 봐라. 그 전에 잠깐. 내가 왜 이런 결심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지금 결실만 중시하는 풍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과정과 근원을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 주목하는 경향으로 인해, 우리는 성과주의에 빠졌고, 이로 인해 관료들은 전시행정을 하게 되었고,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성적만이 최고인 것으로 여기는 과오를 범했으며, 사회구성원들은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단지 화폐로만 환원해버리는 실과를 범했다. 하여, 작금의 개탄스러운 사회 풍토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결심의 이유를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방금 또 만 원 정도를 더 벌었다. 영차.
 
그 결심의 이유는 바로 내가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소설가란 누구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가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게이건, 레즈비언이건, 기독교인이건, 불교도건, 시크교도건 간에,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설은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그냥 쓰면 되는 것이다. 손으로 쓰면 된다. 간혹 손이 없어 발로 한 자씩 쓰는 작가가 있다면, 미리 사과의 뜻을 표한다. 소설을 쓰는 것은 이처럼 간단하다. 방금 또 만원을 벌었다. 어기영차. 
 
그런데,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직접 경험을 한 것을 바탕으로 쓰기도 하고,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쓰기도 한다.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사람은 조지 오웰이나 헤밍웨이 같은 실천파들이며(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쓰기 위해 참전까지 했다.),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사람은 언급하기에 불가능한 대부분의 작가다. 나는 굳이 밝히자면, 애석하게도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데, 딱히 직접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독서를 창작의 샘물로 쓰는 것도 아닌,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필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부류다.
 
'아! 이제부터 소설을 써야지'라고 결심하고, 그 다음 날부터 소설을 썼다. 자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참회의 심정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육년 간 소설을 쓰다 보니, 그야말로 밑천이 바닥난 노름꾼 처지가 됐다. 인간의 직접 경험이란 기껏 몇십 년에 불과한 것이고, 생각의 샘물 역시 마르기 마련이다. 하여, 나는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이제야말로 독서를 해야겠어' 하고 결심했다. 작가라는 작자가 원고를 쓴다는 핑계로 독서를 차일피일 미뤄왔으니, 실로 뻔뻔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고백은 더 부끄러운데, 나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장편 소설 두 권을 읽었다. 책 제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두 권 다 국내 작가의 소설이었다. 그 외에는 도무지 소설을 읽을 끈기라는 게 없어서, 견뎌내지 못했다. 완독이 불가능했다. 하여, 내가 세운 최초의 결심은 '나를 독자로 상정하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키는 데 지난 육 년을 쏟아 부었다.
 
이렇게 육 년을 보낸 끝에 나는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썼지만, 독자들로부터 '오히려 너무나 쉽게 읽혀 허전하다'는 평을 받았다. 사실, 평은 별 상관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나 같은 독자가 별로 없는지, 내 책을 사주는 독자들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소수 열혈 독자는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이는 전업 작가에게 치명적인데, 소설이 팔리지 않으면 결국은 다른 업계를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음. 문학의 언덕에서 결판을 내야겠어. 이제 피스톨을 뽑아 천 미터 밖의 찌그러진 깡통을 맞추는 연습을 해야 될 때야!' 하며 서부 총잡이를 흉내 내며 독서를 결심했다.
 
하여, 이제야 결심을 밝히자면, 나는 2016년에 최소 25권의 책을 읽기로 했다. 아니, 고작 스물다섯 권이 무어냐고 반문한다면, 조금 더 기다리시라. 일단, 2주에 최소 한 권은 완독하기로 했는데,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원칙이다. 최소 한 권이기에 실질적으로는 한 해에 오십 권을 읽을지, 백 권을 읽을지 나조차 모르겠다. 아울러, 하는 김에 저자들의 스타일과 구성법을 하나씩 훔쳐오기로 했다. 이 독서에 대한 짤막한 감상은 일기에 써두기로 했는데, 이는 예전에 영화를 볼 때마다 제목을 기록해놓은 연유와 비슷하다. 그것은 내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천재작가가 아니기에, 본 영화의 제목마저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읽은 책에 대한 감상까지 곁들여 간헐적 일기를 쓰기로 했다(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쓸 것이며, 일상의 이야기도 곁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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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절도일기'를 육필으로 쓰게 될 다이어리

 
또 하나 고백할 것이 있는데, 사실 나는 제목을 정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하여, 이 독서일기를 뭐라 정할지 꽤나 깊은 고민을 했다. 일단, 뭐든지 영어로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내 본성이 '리딩 다이어리'라고 초안을 제시했으나, 어쩐지 너무 단순한 것 같다는 나의 다른 자아가 이 의견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작가적 자의식에 사로잡힌 또 다른 자아가 '최민석의 리딩 다이어리'는 어떠냐고 고작 이름 석 자를 앞에 붙인 제목을 제시하여, 결국 내 자아끼리 제목 때문에 멱살잡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관대하고 성숙한 작가답게 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때, 나의 뇌 속에서 솔직하고 양심적인 자아가 고백했다. '사실, 이 독서는 이미 죽은 대문호들과 당대 필자들의 생각과 스타일을 훔쳐 오는 행위잖아! 그러므로, 솔직하게 '스틸 다이어리(Steal Diary)'라고 하는 게 어때?'라고 물었고, 나는 이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순간에 작가적 자의식에 사로잡힌 (아까 그) 자아가 협조하지 않으면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겠다는 자세로 '그럼 기왕 하는 것 <최민석의 스틸 다이어리> 어때?'라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침묵해왔던 나의 창의적이고 현명한 자아가 "그럼 간명하게 훔칠 '절(竊)' 자와 서적 '도(圖)' 자를 써서, 최민석의 '절도 일기'로 함세"하고 가세했다. 나는 너그럽고 인자한 중년 작가답게 '사실. 제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읊조린 뒤,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야, 분량을 채우는 것이라고!' 하며 제안을 수용했다.
 
자, 이제 '최민석의 절도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지면이 가득 차 버려 다음 회부터 시작해야 한다(소설가란 대체 이런 부류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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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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