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내가 사랑한 수다 <한밤의 아이들>
이토록 뻔뻔하면서도, 대범한 이야기
세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짧은 이야기와 긴 이야기. 긴 이야기는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 장황한 이야기, 수다스러운 이야기,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이야기, 정치적 함의가 있는 이야기, 생의 전체를 녹여낸 이야기, 나아가 생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는 이야기도 있다. <한밤의 아이들>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짧은 이야기와 긴 이야기. 긴 이야기는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 장황한 이야기, 수다스러운 이야기,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이야기, 정치적 함의가 있는 이야기, 생의 전체를 녹여낸 이야기, 나아가 생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는 이야기도 있다. <한밤의 아이들>이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들의 작가라 불릴 만큼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다. 독자를 기겁하게 만들만큼 쏟아지는 문장과 본 적 없는 신조어의 폭포는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고, 읽는 이의 뇌와 영혼을 쪼그라들게 만들만큼 위압적이다. 고백하자면, <한밤의 아이들> 도입부는 내게 <수학의 정석> 중 ‘집합’ 장과 같다. <수학의 정석>을 덮었을 때 겉 페이지의 ‘집합’장만 새까맣게 만든 학생처럼, 지난 몇 년간 한밤의 아이들 중 앞부분 100여 페이지에서 오래 맴돌았다. 그만큼 이 책을 읽는 데, 오랜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런 와중에 <한밤의 아이들>이 영화로 개봉을 했다고 하니, 가슴은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호기심, 기대, 흥분, 조바심, 떨림으로 진동했다. 과연 많은 선후배들이 칭송하고, 만나는 이마다 “당신이 좋아할 것”이라며 망설임 없이 추천했던 그 이야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심리는 호기심에서 출발했고, 흥분을 유발했으며, 행여 그 이야기가 별로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과,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몇 년간 뒤섞여 유발된 알 수 없는 떨림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실로 진동이 아니라면 어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나는 다행이라는 듯이 진동했다.
전국 단관 개봉이라 결국 IPTV로 봐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토요일 오후,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영화가 시작되자 울리는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는 마치 바람과 협연을 펼치듯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 ‘가슴을 어루만졌다’는 이 부끄러운 표현을 감히 내 손을 쓰는 파렴치한 짓도 <한밤의 아이들>을 보고나면,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에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원작은 애초부터 아기가 병원에서 뒤바뀌고, 그 아기 중 한 명은 부잣집, 다른 한 명은 가난한 집으로 보내지는 ‘왕자와 거지’같은 설정을 아무런 죄책감이나 동요 없이 뻔뻔하게도 자행했다. 게다가, 한 인물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수다스럽게도 32년 전으로 거슬러가,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외할아버지는 주인공의 엄마를 낳고, 엄마는 주인공을 낳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언젠가 자식을 낳는다(장황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뻔하다). 나아가 TV 연속극처럼 자매끼리 한 명의 남자를 번갈아가며 사랑하며, 차례로 남편으로 맞는 대범함도 선보인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나면, 조사나 형용사 따위로 끙끙대지 않게 된다. 시선은 거대한 서사로 향하게 되고, 사소한 표현의 차이 같은 것쯤이야 용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독자로서도, 관객으로서도, 작가로서도 좀 더 큰 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더욱이 <한밤의 아이들>은 익히 알려진 대로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이 아닌가. ‘마술적’이라는 단서가 무엇인가. 어떠한 사물이 ‘~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온전한 그 사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술적이라는 말은 마술이 아니라는 걸 천명한다. 마술과 같은 분위기를 풍길 뿐이다(물론, 살만 루슈디의 마술은 황홀하다). 결국,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은 완벽한 사실주의일 필요도 없으며, 완벽한 마술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작가의 자유영역이 최대치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사랑하고, 수다의 기쁨을 알고, 서사에 굴레를 씌우길 거부하는’ 작가들이 사랑하는 기법이다. 필력이 하찮은 나 역시, 그간 활용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이러한 영역에 매료돼왔다. 그러니,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주인공 살림 시나이가 떠나는 파키스탄으로, 인도로, 방글라데시로, 나 역시 서울의 한 빌라 소파에 앉아 함께 떠나며 가슴을 졸이고, 해방감을 느끼며, 감격에 젖었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뭄바이 여행’ 티켓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새벽이 될 때까지, 다시 『한밤의 아이들』을 읽었다. 물론, 예전에 여러 차례 읽은 도입부였지만, 명작이란 대개 그렇듯 친구처럼 늘 같은 수다를 떨어도 정겨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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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