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내가 사랑한 수다 <한밤의 아이들>

이토록 뻔뻔하면서도, 대범한 이야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세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짧은 이야기와 긴 이야기. 긴 이야기는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 장황한 이야기, 수다스러운 이야기,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이야기, 정치적 함의가 있는 이야기, 생의 전체를 녹여낸 이야기, 나아가 생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는 이야기도 있다. <한밤의 아이들>이다.

11.JPG

 

세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짧은 이야기와 긴 이야기. 긴 이야기는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 장황한 이야기, 수다스러운 이야기,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이야기, 정치적 함의가 있는 이야기, 생의 전체를 녹여낸 이야기, 나아가 생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는 이야기도 있다. <한밤의 아이들>이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들의 작가라 불릴 만큼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다. 독자를 기겁하게 만들만큼 쏟아지는 문장과 본 적 없는 신조어의 폭포는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고, 읽는 이의 뇌와 영혼을 쪼그라들게 만들만큼 위압적이다. 고백하자면, <한밤의 아이들> 도입부는 내게  <수학의 정석> 중 ‘집합’ 장과 같다. <수학의 정석>을 덮었을 때 겉 페이지의 ‘집합’장만 새까맣게 만든 학생처럼, 지난 몇 년간 한밤의 아이들 중 앞부분 100여 페이지에서 오래 맴돌았다. 그만큼 이 책을 읽는 데, 오랜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런 와중에 <한밤의 아이들>이 영화로 개봉을 했다고 하니, 가슴은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호기심, 기대, 흥분, 조바심, 떨림으로 진동했다. 과연 많은 선후배들이 칭송하고, 만나는 이마다 “당신이 좋아할 것”이라며 망설임 없이 추천했던 그 이야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심리는 호기심에서 출발했고, 흥분을 유발했으며, 행여 그 이야기가 별로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과,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몇 년간 뒤섞여 유발된 알 수 없는 떨림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실로 진동이 아니라면 어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나는 다행이라는 듯이 진동했다.

 

22.JPG

 

전국 단관 개봉이라 결국 IPTV로 봐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토요일 오후,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영화가 시작되자 울리는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는 마치 바람과 협연을 펼치듯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 ‘가슴을 어루만졌다’는 이 부끄러운 표현을 감히 내 손을 쓰는 파렴치한 짓도 <한밤의 아이들>을 보고나면,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에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원작은 애초부터 아기가 병원에서 뒤바뀌고, 그 아기 중 한 명은 부잣집, 다른 한 명은 가난한 집으로 보내지는 ‘왕자와 거지’같은 설정을 아무런 죄책감이나 동요 없이 뻔뻔하게도 자행했다. 게다가, 한 인물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수다스럽게도 32년 전으로 거슬러가,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외할아버지는 주인공의 엄마를 낳고, 엄마는 주인공을 낳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언젠가 자식을 낳는다(장황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뻔하다). 나아가 TV 연속극처럼 자매끼리 한 명의 남자를 번갈아가며 사랑하며, 차례로 남편으로 맞는 대범함도 선보인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나면, 조사나 형용사 따위로 끙끙대지 않게 된다. 시선은 거대한 서사로 향하게 되고, 사소한 표현의 차이 같은 것쯤이야 용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독자로서도, 관객으로서도, 작가로서도 좀 더 큰 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더욱이 <한밤의 아이들>은 익히 알려진 대로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이 아닌가. ‘마술적’이라는 단서가 무엇인가. 어떠한 사물이 ‘~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온전한 그 사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술적이라는 말은 마술이 아니라는 걸 천명한다. 마술과 같은 분위기를 풍길 뿐이다(물론, 살만 루슈디의 마술은 황홀하다). 결국,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은 완벽한 사실주의일 필요도 없으며, 완벽한 마술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작가의 자유영역이 최대치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사랑하고, 수다의 기쁨을 알고, 서사에 굴레를 씌우길 거부하는’ 작가들이 사랑하는 기법이다. 필력이 하찮은 나 역시, 그간 활용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이러한 영역에 매료돼왔다. 그러니,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주인공 살림 시나이가 떠나는 파키스탄으로, 인도로, 방글라데시로, 나 역시 서울의 한 빌라 소파에 앉아 함께 떠나며 가슴을 졸이고, 해방감을 느끼며, 감격에 젖었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뭄바이 여행’ 티켓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새벽이 될 때까지, 다시 한밤의 아이들』을 읽었다. 물론, 예전에 여러 차례 읽은 도입부였지만, 명작이란 대개 그렇듯 친구처럼 늘 같은 수다를 떨어도 정겨운 법이다.

 

 

[추천 기사]

- <나이트크롤러>를 위한 헌정소설
- 한 번의 만개 <프랭크>
- 영화라는 삶의 미장센 <러브 액추얼리>
- 사랑의 완성에 필요한 세 가지 〈말할 수 없는 비밀〉
- 삶의 이유 <피아니스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9,900원(61% + 1%)

* 의 감동을 넘어서는 명작이 온다! * 뛰어난 상상력과 기발함을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 '뿌리'에 대한 질문을 무국적 세계관과 복잡한 가계도를 역경과 자각을 통해 축약! *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뛰어난 영상과 몽환적인 음악, 현실과 초현실의 절묘하게 표한 작품! * 세계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