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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유 <피아니스트>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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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삶은 우리에게 거창한 선물을 가져다주지도, 거대한 행복을 잠복시켜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살아야 하는 나날이 차마 헤어지지 못한 어떤 관계처럼 도망치고 싶은 대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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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내게 책을 읽고 싶은 욕구와 영화를 보고 싶은 욕구는 얼추 비슷한데, 그리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다. 색깔로 따지자면, ‘블루’ 계통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이해되는 희망의 색이 아닌, 말 그대로 영어권 내에서 해석되는 ‘우울함’의 느낌이다. 이러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대부분의 책은 삶의 고통을 다루고, 대부분의 영화는 한 인물의 생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다른 이야기다. 독자로서도 필자로서도, 때로는 읽지 않거나 보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부채감까지 드는 작품이 있다. 이런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경우, 식자의 행렬에 동참해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대화에서 벙어리로 있어야 한다. 기껏 답해봐야, ‘하하하. 그 작품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라는 지겨운 답변을 되풀이해야 한다. 소설로 치자면, ‘전쟁과 평화’, ‘오디세이’(당연히, 읽어보지 않았다) 같은 것이고, 영화로 치자면, ‘대부’, ‘시민케인’ 같은 것이다. 이런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영화가 하나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다.

 

자, 이제 앞서 읽은 두 단락을 깨끗이 잊어도 좋다. 이 모두는 사실 영화 <피아니스트>가 가진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간을 들여 설명한 것이었으니까. 글 전체에서 잉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 어떤 영화나 소설에 이런 잉여의 수식마저 예절로 느껴진다. 영화 칼럼을 2년간 쓰면서 <피아니스트>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탄생에 기여한 모든 이와 관객에 대한 실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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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끊임없이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과연 생은 어떠한 대상인가? 

그것은 실행자의 선택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숭고한 대상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생에 정답 따위는 없다. 그것은 실로 건방진 생각이다. 한낱 인간이 생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단언컨대 그들은 사기꾼이거나, 건방진 사람이다(물론, 성직자들은 때로 직업상 이런 말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과도한 정답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생에 대해 함부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때, 가장 설득적인 방식은 주장이 아닌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실화를 다루고 있다. 나치에게 점령당한 1940년대의 폴란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살아야 할 이유가 날로 희박해지는 여생을 위해, ‘게토를 탈출하고, 폐허가 된 거리에서 혼자서 울부짖고, 스스로를 감금한 채 빵 한 조각으로 몇 주를 버티고, 병을 이겨낸다.’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으로 하여금 ‘그저 숭고하게 죽는 게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감상을 전하지만,  이 실존 인물 스필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에게 생의 목적은 거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두 번째 질문은,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온다. 독일군에게 학대 받아 죽는 것이 차라리 숭고해 보였던 시기, 5년 넘게 숨어 지낸 스필만은 어느 날 나치 장교에게 발각되고 만다. 이 순간, 영화는 마치 한 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른 한 명은 살인에 대한 갈등을 느낀다는 잠시 정적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필만의 연주를 들은 독일군 장교는 그에게 몰래 빵을 가져다 주며, 꿈과 희망이 없는 유대인의 은닉을 돕는다. 그러다 정세가 변해 러시아 군대가 패권을 잡고, 독일군이 퇴각할 때가 되자 그는 기어코 살아남은 스필만에게 묻는다. 


 “그래. 전쟁이 끝나고 나면 뭘 할텐가?”


 이 질문을 받은 스필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왜냐하면 이미 가족은 모두 죽었고, 연정을 품었던 여인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로 아무 것도 없다. 진정, 왜 살아야 하는 지 그 이유가 궁금했던 찰나에 그는 잠시 주저하다 대답한다. 


 “연주를 해야지요.”


 그는 가족과 친지와 친구는 물론, 거의 모든 동족이 죽은 상태에, 혼자서 남아 외롭게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는 삶을 잇기 위해, 5년 이상 주린 배를 움켜쥐며 숨어 산 것이다.

 

때로, 삶은 우리에게 거창한 선물을 가져다주지도, 거대한 행복을 잠복시켜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살아야 하는 나날이 차마 헤어지지 못한 어떤 관계처럼 도망치고 싶은 대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영화는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에게 단지 하나의 예시만 보여줄 뿐이다. 생을 이토록 숭고하게 지켜내려 했던 한 인간이 있었다고. 그가 살아야 했던 이유는 사실 별 것 아닌 것 일수도 있다고. 살아남은 이 사람은 참혹하기만 한 일상이 반복될지라도, 내일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있었다고. 그는 단지 삶이 충일했던 때에 반복적으로 해왔던 것을, 모든 것이 무너진 때에도 지속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살 가치는 충분하다고.

 

*
첫째, 셋째 주 금요일에 연재 되었던 영사기는 앞으로 화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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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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