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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 잘못 마셨다고 때리기 있기 없기

뻔하고 재미 없는 군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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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마지막 글을 ‘2015년 결산’이라는 소재로 써 보려 했으나, 딱히 그 정도의 글을 쓸 정도로 박학다식한 사람이 아니라 소재 막히면 튀어 나오는 군대 이야기로 올해를 마무리할까 한다.

오랜만에 군대에서 알게 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당연히 군대 이야기를 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쌍둥이들은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을, 초등학교 친구와는 초등학교 시절을, 대학 친구와는 대학 시절을 이야기하듯, 군대 친구와는 군대 이야기를 할 수밖에. 물론, 우리 둘 다 너무나 뻔하니까 군대 이야기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다. 삶은 어떠냐, 월급은 많이 받냐, 집주인이 월세를 얼마나 올렸냐, 너네 집에는 녹물 나오지 않더냐, 로또는 사고 있냐, 연금복권도 괜찮다더라, 외계인은 존재할까 등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금세 소재가 떨어졌다. 어느덧 빈 술잔에는 두 사람의 군대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군대 이야기라는 게 생중계로 본 스포츠 경기를 뉴스로 다시 시청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 아는 결과를 굳이 또 보듯, 군대 이야기도 상대방이나 나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 1년만에 만나서 반복했다. 나와 그 친구는 똥군기 심한 내무 생활을 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져서 구타, 가혹행위 등 악습이 다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 시절은 아니었다. 배치 받은 날 더블백을 풀자마자 군홧발이 명치로 날아 들더라. 식기 닦을 때 손 보인다고 맞고, 점호 때 목소리 작다고 맞고, 밥 늦게 먹는다고 맞고, 침구 각 못 잡는다고 맞고, 잘 때 코 곤다고 맞고, 맞고 맞고 계속 맞았다.



조직화된 폭력


폭력은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이뤄졌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단순히 자기보다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때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적인 원한에 의한 폭력도 금지였다. 폭력은 부대 내 위계 질서 틀에서 작동되었다. 지금도 쓰이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내무실 안에는 크게 5가지 계급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이 생산 수단의 소유 유무나 통제 가능성으로 결정된다면 군대에서는 짬, 그러니까 입대한 뒤 내무반에서 지낸 시간으로 정해진다. 그 시간에 따라 우리끼리는 사역병, 받치기, 중간, 열외, 환자라고 서로의 계급을 불렀다. 


사역병은 식기 닦기나 청소, 짐 나르기 등 주로 육체 노동을 담당했고 받치기는 장비를 점검하거나 열외를 보좌(근무복 다리기, 군화 닦기, 야참 수요 조사 등등)했다. 중간은 사역병이나 받치기가 이상한 행동(이른바 '쳐 빠진 행동')을 하지 않도록 내무실 전반을 돌보면서 부대원들의 근무 일정을 관리했다. 열외는 말 그대로 열외다. 이들은 훈련이나 근무 같은 공식적인 일정만 소화하지, 기타 잡무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된 존재였다. 거기에 더해 열외는 내무실 내 PC나 개인 휴대폰, 헬스장, 탁구장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물론 휴대폰은 소대장이나 중대장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환자는 열외 중에서 분대장을 뗀, 그러니까 주로 제대까지 1달도 안 남은 사람을 일컫는다. 존재감이 전무하여 앞으로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으니 무시해도 좋다.


부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열외가 가장 많이 때릴 것 같으나, 열외는 때리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었다. 어느 조직이나 이상한 애들은 꼭 있어서 환자 시절까지 욕하고 때린 사람도 있긴 했지만 주로 중간에게 "중간아, 요즘 사역병 이빨이 자주 보이네. (이빨이 보인다는 표현은 웃는다, 혹은 잡담을 한다 정도의 의미다.)"라고 한 마디 하는 걸로 그들의 역할은 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중간은 “여기는 사회 아니다, 군대다.”라는 틀에 박힌 대사를 뱉으면서 사역병 수석(사수)만 때리거나, 아니면 사역병 전부를 다 때렸다. 전자의 경우에는 맞은 사수가 중간이 퇴장하자마자 “여기는 군대다, 사회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나머지 사역병을 구타했다. 당연히 중간이 사역병 한 명을 일대일로 때리기도 했다. 주로 갓 들어온 막내를 맨투맨으로 팼다.


나는 다행히도 사수가 간디 급의 비폭력 평화주의자라 사수에게 맞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중간에게는 심심치 않게 맞았다. 여러 명의 중간에게 돌려 가며 맞았지만 유독 기억나는 인물은 A다. 당시는 K-1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마침 A는 이종격투기 팬이어서 사역병을 때릴 때 입식타격기 기술을 사용했다. 꽤 아팠다. 물리적인 폭력도 참기 힘들었지만, 폭력으로까지 가는 과정이 정말 짜증났다. 그는 "넌 이것을 잘못했으니 맞아야 해"가 아니라 일단 때리고 뭘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정답을 맞히면 다행. 오답이면 한 대 더 때리고 물었다. 그렇게 정답을 말할 때까지 때리는 타입이었다. 



로우킥을 자주 차던 A


때는 2005년 여름에서 가을로 가려던 어느 날. 영국 런던 출근길에서 벌어진 테러로 세계가 흉흉했고, 대한민국은 APEC을 앞두고 긴장했다. 대 테러 방지를 위해 경비 업무가 많던 시기였다. 우리 소대는 24시간 주요 시설 경비 업무에 투입되었다. 막내였던 나는 새벽 2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가장 안 좋은 시간에 로우킥 때리길 즐기던 중간과 함께 순찰을 돌았다. 그 시간에는 딱히 할 게 없다. 거동 수상자는커녕 유동 인구 자체가 없으니까. 할 게 없으니 그와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았다. 말 대답 잘못했다간 맞기 십상이라 전혀 졸리지는 않았다.


A : 내 인생 최고의 만화는 『더화이팅』(복싱 만화)이었다. 봤나?

나 : 네, 다는 아니고 조금 봤습니다. 

A : 복싱은 좀 아나?

나 : (최대한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잽은 짧게, 훅은 좀 길게, 어퍼컷은 올리는 거 아닌지 말입니다.

A : (한숨 쉬며) 화장실로 따라 와라. 로우킥 좀 맞자.


(하필 근무지 근처에는 24시간 개방하는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안, 당연히 아무도 없고, '퍽'이라는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A : 왜 맞는지 알겠나.

나 :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A : 권투를 모르면서 알은 체 한 게 네 죄다. 설명이 과히 틀리진 않았으나, 권투를 해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네가 말할 자격은 없다. 다음부터는 귀로만 대충 들은 지식을 어쭙잖게 꺼내지 말거라.


이번 근무는 무사히 지나게 해 달라고 빌었건만 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작부터 별 시답잖은 이유로 맞았으나 한 대로 끝났으니 나름 선방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 뒤로 나는 "네 그렇습니다."나 "아닙니다." 혹은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다. 그렇게 다음 조 교대까지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다. 교대 시각까지 30여 분을 앞두고 A는 갑자기 목이 마르다며 편의점에 가자고 했다. 설마 편의점에서 때리진 않겠지, 하며 따라갔다. 그는 바나나 우유 두 개를 골라서 계산했다.


A : 내가 사는 거다. 마셔라.

나 : 감사합니다. (차렷 자세로) 맛있게 드십시오. (벌컥벌컥)

A : (한숨 쉬며) 화장실로 따라 와라. 또 맞아야겠다.

(화장실 안, 역시나 아무도 없고, '퍽'이라는 소리가 다시 허공을 가른다.)

A : 이번에는 왜 맞는지 알겠나.

나 : 맛있게 드십시오를 더 크게 외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퍽)

A : 틀렸다. 왜 맞는지 알겠나. 이번에 틀리면 허리 써서 로우킥을 차겠다. 하체만으로 차는 로우킥보다 훨씬 세다.

나 : A님이 드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마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퍽)

A : 나는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도 틀리면 허리 돌려 미들킥이다. 옆구리가 꽤 아플 것이다.

나 : 제가 너무 거지처럼 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시 참 복도 없게 먹는다는 지적을 그에게 많이 들었던 터였다.)

(퍽, 아야, A의 말처럼 과연 아팠다.)


A : 틀렸다. (한숨 쉬며) 바나나 우유를 봐라. 뭐가 보이나.


나는 찬찬히 바나나 우유 뚜껑과 몸통을 살폈다. 혹시 유통기한이 지났는데 확인 못했나? 정가보다 종업원이 비싸게 계산했는데 눈치 못 채서? 그것도 아니면 바나나를 땄을 동남아시아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내 잘못을 몰랐으며,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5초 정도가 흘렀나. 침묵을 깨고 그는 내 구레나룻을 잡아 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해 본 사람은 알 텐데, 뺨 맞는 것보다 훨씬 더 기분 나쁘고 세게 당기면 꽤나 아프다)


A : 거기 뭐라고 써 있나. '흔들어 드십시오'라고 써져 있다. 왜 안 흔들어 먹나?


바나나우유.jpg

10년 전에 내가 마신 바나나 우유와 다른 바나나 우유지만

여전히 일부 바나나 우유에는 ‘흔들어 드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성인군자도 있긴 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노래방 새우깡은 꼭 노래방에서 뜯어야 하며 꼬깔콘은 구멍에 아이스크림을 채워서 먹고, 조리퐁은 우유에 말아 섭취하며, 라면에는 기호에 따라 꼭 계란과 파를 넣어야 할 터였다. 원래도 학교에서의 체벌이라든지 군대에서 폭력을 반대하긴 했지만, A를 만나면서 폭력은 절대 안 된다는 신념은 굳어졌다. 폭력이란 일단 허용되고 나면 비이성적인 개인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남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맞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추상적인 폭력보다는 특정인에 의한 구체적인 폭력을 기억하고 그에 치를 떠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A에게 받았던 불합리한 대우를 여전히 기억한다. 황당함과 분노,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불쾌한 감정이다. 이런 불쾌한 감정을 삭일 만한 위안을 책에서 얻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바로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던 유대인으로,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묘사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분석하려는 사상적인 담론이나, 과거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거침 없이 조소한다. 홀로코스트는 해명될 수 없고, 갈등이 해소될 수도 없다고.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일 뿐, 섣불리 화해하지 말라고.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으로는 『아우슈비츠의 여자들』과 더불어 대작인 작품이다. 20세기 중후반에 쓰여진 글답게 이해하긴 쉽지 않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이 와 닿는다.


수용소에서는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정신은 결정권이 없었다. (중략)

지혜라는 말이 세상에 관한 긍정적인 지식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지혜로워지지 않았다. (중략) 정신적인 차원의 정의가 심오한 깊이라면, 우리는 수용소에서 '더 깊어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더 선해지지도, 더 인간적이지도, 인간에 대해 더 호의적이고 윤리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변적인 이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탈인간화된 사람의 행동이나 범행을 보면서, 인간의 타고난 존엄에 관한 생각에 의구심을 품지 않은 채 그 사람을 쳐다볼 수 없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용소에서 지냈던 사실은 정신적으로는 전혀 가치가 없었다. 우리는 말하자면 확고부동한 확실함을 얻었는데, 정신은 하나의 유희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하면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유희하는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52~54쪽)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91쪽)


그에게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자면 바나나 우유 말고도 꽤 많은데, 그렇다고 그 경험을 홀로코스트에 견줄 만큼 잔혹하진 않았다. 앞서 언급한 간디 같은 평화주의자 사수도 있었고, 글 초반에 등장한 술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친구와도 좋은 추억이 많고, 무엇보다 A에게 한창 시달릴 때 구원해준 성인군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내무실 내 폭력을 없앴고, 사역병이 헬스장을 쓰도록 허락했으며, 탁구장도 개방해줬다. 선임의 성은 '성'이었는데 성인군자라 내가 성 씨로 기억하는지, 아니면 실제 성이 성 씨였는지 가끔 헷갈릴 정도로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였다. 따르는 후임이 많았는데, 역시 리더십은 인품에서 나온다. 도덕성은 지도자에게 필수 덕목이다.


반면 중간인 A에 시달린 경험 때문에 제대한 뒤에도 '중'자가 들어간 단어는 꺼려졌다. 『4월의 공기』 주인공처럼 나도 "중간에 있는 중간 관리자도 싫었고, 중산층도 싫었고, 중도주의자들도 싫었고, 중미도, 중구도, 중복도, 중탕도, 중구난방도…… 아무튼 중간은 죄다(18쪽)" 싫었다. 아, 예외로 중식은 좋아한다. 그나저나, 그 A와는 제대한 뒤에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는데,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꼭 묻고 싶다.


"그때 바나나 우유 안 흔들어 먹었다고 때리셨죠. 왜 그랬어요?"


진심 궁금하다. 꼭 바나나 우유를 흔들어 먹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 나는 다시는 그 바나나 우유를 마시지 않았다. 바나나 우유를 흔들어 먹어야 한다는 그 옹졸한 이유 때문이다. 그 바나나 우유가 어느 회사가 만든 제품인지는 밝힐 수 없다. 참고로 저 사진에 나온 흰 색 바나나 우유는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나나 우유는 노란 색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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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민규(인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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