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부산의 남과 여

Man & Woman in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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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 다른 취향으로 여행한 남자와 여자의 부산은 얼마나 다를까? 네 가지 테마로 즐긴 그들의 부산 여행을 비교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여자는 도심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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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와 해운대 사이를 연결한 광안대교는 효율적인 이동로인 동시에 부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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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에 오르면 하늘 아래 어깨를 맞댄 수많은 집과 가로등 불빛이 어우러져 멋진 야경을 선사한다.

 

 

Eating


Man 태종대 갯바위, 살아 있네


숱하게 부산을 들락날락했지만, 태종대 유원지는 이번이 초행이다. 바다와 해변이 지천에 널린 부산에서 굳이 영도 끝자락에 있는 태종대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게다가 유원지 특유의 촌스러운 분위기일 게 뻔하다는 선입견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태종대로 가기로 결심했다. 오로지 해산물 1접시를 맛보기 위해. 1980년대 말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인상 깊게 감상한 이라면, 최민식과 하정우가 매서운 파도가 몰아치는 갯바위에 걸터앉아 회와 소주를 나눠 먹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마침 태종대 유원지의 영도등대 아래 갯바위에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간이 포장마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최근 알았다.


태종대 입구에 도착한 순간, 고민에 빠진다. 유원지마다 하나쯤 있는 ‘코끼리 열차’가 태종대에선 다누비 열차라는 이름으로 운행하는데, 이를 탈지 아니면 호기롭게 걸어야 할지 같은 소소한 고민이다. 관광이 주목적이 아닌 이상,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일단 열차 매표소의 줄에 합류한다. 대기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바라보니 머뭇거리다간 1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열차 표가 금방 동날 태세다. 열차를 타고 태종대 전망대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관광객은 내리자마자 과거 자살바위라 불리던 자리에 세운 전망대로 몰려간다.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전망대의 풍광은 단연 압도적이다. 하지만 오늘은 감탄사를 내뱉는 무리를 뒤로하고, 곧장 영도등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거침없이 내려간다. 갯바위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삼춘요, 한 접시 하고 가이소.” 계단 끝 갯바위에서 방문객을 맞는 아지매의 호객 소리가 반갑게 들려온다. 여기에도 이곳 나름의 질서가 있다. 태종대 인근 하리(오늘날 지명은 동삼동)에 사는 아지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터라 손님을 오는 순서대로 나눈다. 널찍한 대야에 담긴 멍게, 해삼, 개불, 산낚지, 소라, 광어 등 각종 해산물 중에 원하는 것을 골라 주문한다. “저 할멈은 올해로 여든을 넘겼다 아잉교. 여그 등대 아래서 50년 넘게 장사하는 기라.” 아지매가 한쪽에서 잠시 쉬고 있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주문한 멍게와 해삼, 소라를 솜씨 좋게 썰어 낸다.


해산물 1접시에 시원소주를 담은 쟁반을 들고 빛 바랜 돗자리를 깐 평상에 자리를 잡는다. 평상 바로 앞에는 그리던 대로 거친 파도와 짙푸른 망망대해가 에워싸고 있다. 솔직히 이곳의 해산물 맛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운이 좋으면 해녀가 갓 잡은 소라와 전복 등을 맛볼 수 있지만, 대다수 해산물은 이른 아침 항구에서 떼어다 파는 것. 그러니 부산에서 제대로 된 해산물을 맛볼 요량이라면, 자갈치시장이나 광안리의 민락 회센터로 가는 편이 현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실망하고 돌아가는 이 또한 드물다. 초장을 듬뿍 찍은 해삼 1점을 먹다가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뒤, 몰아치는 파도를 향해 “살아 있~네”라고 외치는 맛이 있으니까.


해산물에 소주를 곁들이니 제법 취기가 밀려온다. 문득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다 뜻밖의 묘수를 발견한다. 태종대 앞바다를 1바퀴 돌아 태종대 입구 근방에 있는 자갈마당까지 가는 유람선 은하수호가 갯바위 바로 옆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갈 때는 다누비 열차, 돌아올 때는 유람선, 그렇게 남자의 로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코스를 완성했다. 은하수호 위에서 조용필이 구슬프게 부르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며 태종대의 위풍당당한 비경을 감상하는 일은 보너스다.

 

- 태종대 유원지 입장료 무료, 다누비 열차 2,000원(편도),

   유람선 1만 원, 부산광역시 영도구 전망로 24, taejongdae.bisco.or.kr
- 영도등대 갯바위 모둠 해산물 3만 원, 8am~8pm,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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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등대 옆으로 신선바위와 웅장한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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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인근 하리에서 잡은 멍게는 영도등대 갯바위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이곳에서 먹는 해산물과 소주.

 

 

Woman 부산의 가로수길에서


부산 방문은 이번까지 합쳐 다섯 번쯤 되는데, 서면은 처음이다. 행여나 길을 잘못 들까 구글맵을 연신 들여다보다 문득 고개를 드니, 커다란 표지판이 나를 비웃듯 정면에 버티고 섰다. ‘전포 카페거리’. 요즘 웬만한 도시엔 하나쯤 있는 게 카페거리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름표까지 달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동천로에서 ‘궁리마루’라는 재미난 이름의 과학 체험관(8월 말까지 운영하고 기장군 국립부산과학관으로 이전한다)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특색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숍 등이 모여 있다.

 

해운대나 광안리가 여행객을 위한 부산의 명소라면, 서면은 현지인이 즐겨 찾는 부산의 명동이다. 서면 최대 번화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이 거리는 최근 몇 년 새 도심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놀라운 것은 이곳이 불과 5년 전만 해도 쓰레기 무단 투기로 몸살을 앓았고, 우범지대로 손꼽히는 동네였다는 사실. 한때 공구 상가와 전기 상가가 밀집해 있다가 빠져나간 자리에 하나 둘 카페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태원 후리덤부터 뉴욕다방, 런던 치킨 앤 비어, 은하수 식당까지. 거리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스케일은 국내외를 넘어 지구 밖까지 아우르고 저마다 개성 넘치는 간판과 인테리어를 자랑하기 바쁘다.

 

그중에서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아마 모루식당일 것이다. 빈티지풍 하얀 타일로 마감한 외벽, 자그마한 나무판에 하얀색 글씨로 써놓은 간판, 문가에 놓인 오래된 대합실 의자와 크고 작은 화분. 문을 연 지 3달 남짓한 모루식당은 어디를 찍어도 분위기 있는 사진이 나오는 외관과 인테리어 덕에 인스타그래머 사이에서 화제였다. 식당에 입성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치 않다. 오픈 30분 전부터 대기는 기본, 가게로 들어서면 카운터에서 주문과 계산이 먼저다. 운이 좋으면 단 하나뿐인 1층 테이블에 앉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신발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다락방 같은 아담한 공간은 모두 좌식. 동그란 밥상 앞에 앉으니 키 작은 빈티지 선풍기의 파란색 프로펠러가 신나게 돌아가며 시원한 바람을 뿜어낸다. 낮게 걸린 선반과 장식 없이 담백한 가구, 아기자기한 소품을 찬찬히 둘러보는 사이 벽걸이 CD 플레이어에서 일본 음악이 흘러나온다. 일본식 카레 이외의 메뉴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분위기다.

 

“잠시 일본에 산 적도 있고, 여행으로도 자주 방문할 만큼 일본을 좋아해요. 카레는 캠핑을 가면 즐겨해 먹는 메뉴 중 하나인데 주위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식 카레집을 열었어요.” 모루식당의 주인 장은혜 씨는 서울 출신이다. 창원으로 시집오면서 부산에 자신만의 작은 일본을 꾸미게 됐다. 새우크림카레가 메인이고, 야채카레, 시금치카레, 콩카레 등 매일 다른 ‘오늘의 카레’를 선보인다. 주인장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가구와 소품은 일본을 오가며 직접 수집한 것. “누군가의 집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가 콘셉트예요. 마고걸스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과 수시로 캠핑을 즐기는데, 캠핑 크루를 위한 아지트 겸 소박한 식당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이 공간에서의 행위가 이전과 달리 보인다. 기다리고, 주문하고, 신발 벗고, 올막졸막 붙어 앉아 맛보는 자극적이지 않은 맛의 카레 1접시. 만약 이곳이 내 친구의 집이라면, 사소한 불편함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고, 좁은 공간 구석구석에 닿은 손길에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 모루식당 카레 8,000원, 12pm~재료 소진 시까지(브레이크 타임 3pm~7pm),

   일,월요일 휴무,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서전로38번길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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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카페를 옮겨놓은 듯한 모루식당의 내부 풍경과 야채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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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개성 넘치는 콘셉트의 상점이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다.
전포동 카페거리 초입에 있는 카페 애드오그램(add5gram)의 빈티지한 내부.

 

 

Activity


Man 끝까지 가봐야 하는 산책로


부산에서 산책이라 하면 해운대나 광안리의 해변 보행로를 따라 걷는 일이 전부라 여겨왔다. 실제로 1.5킬로미터에 달하는 두 해변의 깔끔한 보행로는 산책을 즐기기에 손색없다. 물론, 가는 도중 바다 혹은 길 건너편의 호텔이나 식당으로 빠지는 일이 다반사일 테지만 말이다. 만약 제대로 된 하이킹 코스를 찾는다면 도시 외곽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영도의 흰여울길, 해운대 달맞이고개의 문텐로드, 가덕도의 둘레길 등 곳곳에 훌륭한 해안 도보 코스가 숨어 있다. 그중 용호동의 오륙도 해맞이공원과 동생말 사이를 잇는 이기대 해안 산책로는 과거 군사지역에 속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즉 자연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길이라는 의미다. 또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 770킬로미터가량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총 4.7킬로미터의 이 해안 산책로는 순환 코스가 아니기에 한번 발을 내딛는 이상, 끝까지 가야 한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하이킹을 시작한다면 워밍업 차원에서 바로 앞에 있는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올라보자. 35미터 높이로 솟은 절벽에 설치한 유리 전망대. 발 아래로 철썩거리는 파도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유리 전망대에 오르려면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스머프가 신을 법한 검정 덧신을 신발 위에 감싸야 한다. 아찔한 전망대 위에선 점점이 떠 있는 오륙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헤아려본 섬의 수는 달랑 5개뿐. 오늘처럼 물이 차오른 날에는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방패섬과 솔섬이 하나의 섬처럼 보여 5개 혹은 6개의 바위섬이라는 의미에서 ‘오륙도(五六道)’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왼쪽으로는 기암절벽이 오른쪽으로는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 해안 산책로를 한참 오르내리면 자연스레 숨이 거칠어진다. 길 이름만 믿고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즐기러 왔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 초입에 있는 해파랑길 관광안내소에선 성인 남자는 1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다고 알려줬지만, 이는 순전히 앞만 보고 전진 또 전진했을 때의 얘기다. 곳곳에 가파른 계단길이 이어지는 데다, 해안절벽과 바다가 어우러진 빼어난 풍광을 곁에 둔 이상 누구라도 걸음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산책로 중간 즈음에 있는 치마바위에 다다르자 길 바깥의 갯바위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현지인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바위 위에 서서 가만히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꾼의 모습이 좀 고독해 보이는 한편, 내심 부럽게 느껴진다. 그들이야말로 낚싯대 하나만 어깨에 멘 채 이 길을 여유롭게 산책하듯 오갈 테니까.

 

길 막바지에 있는 이기대 어울마당에는 널찍한 갯바위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매점 겸 쉼터가 하나 나온다. 그리고 그 앞으로 멀찍이 광안대교와 함께 초고층 빌딩이 스카이라인을 채우는 해운대 마린 시티가 펼쳐진다. 거친 대자연과 초현대적 도시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부산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직 힘이 남아 있다면 기세를 몰아 종착지인 동생말에서 언덕길을 따라 백련암까지 올라보자. 전망이 끝내주는 곳이라고 택시 기사가 일러준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딱 여기까지다. 자고로 남자란 맺고 끊을 줄 알아야 하니까. 결코 다리에 힘이 풀려서가 아니다.

 

- 오륙도 스카이워크 무료, 9am~6pm, 부산광역시 남구 오륙도로 137.
   동생말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1-4.

 

 

SIDE T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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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대 해안 산책로를 걸은 뒤에는 용호동의 할매 팥빙수 단팥죽에서 휴식을 취하자.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오랜 시간 머물기엔 눈치가 보이지만, 진한 팥과 부드러운 빙수가 어우러진 팥빙수 1그릇은 갈증과 피로를 한 번에 풀어줄 것이다. 가격 또한 놀랄 만큼 저렴하다. 팥빙수 2,500원, 051 623 9946,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로 90번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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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와 해운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이기대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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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륙도 스카이워크는 이기대 해안 산책로 하이킹의 출발지다.
바다의 절경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만끽할 수 있도록 조성한 산책로.

 

Woman 원도심 골목 탐방


근대 문화유산 둘러보기는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여행 테마 중 하나다.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을 버텨온 건축물을 바라보는 경험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세월, 실재하는 과거를 마주한 기분이랄까? 영화 <동감>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21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담벼락을 손으로 쓰다듬는, 그런 순간처럼 말이다.

 

사실 부산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조선 시대 일본의 거주지인 왜관(倭館)을 설치할 만큼 오랜 세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도시니, 군산 못지않게 잘 보존된 적산가옥이 분명 있지 않을까. 찾아보니 부산 원도심 곳곳에 당시 건축물이 꽤 여럿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서로 가까이에 자리한 초량동 일본식 가옥과 수정동 일본식 가옥(옛 정란각)이 비교적 일본식 고급 주택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문제라면, 일맥문화재단과 부산 동구청에서 각각 관리하는 두 집이 모두 보수 작업 중이라는 것. 밖에서도 외관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공사는 올 연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라니 적산가옥 투어는 내년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대신 초량동 골목을 걷는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은 꼭 적산가옥이 아니어도 가능하니까. 게다가 이곳엔 ‘부산 최초의 근대식’이라는 수식어를 단 유적이 2개나 있다. 옛 백제병원과 남선창고 터가 바로 그것이다. 부산역에서 중앙대로를 건너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4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22년 설립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이다. 병원에 이어 중국요릿집 봉래각, 일본인 장교 숙소, 중화민국 영사관이 이 건물을 거쳐갔고, 1970년대 화재 이후 거의 방치된 상태다. 현재 1~2층은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버려진 지 오래라 구석구석 짙게 밴 손때를 제외하면 딱히 볼거리는 없다. 백제병원 바로 옆에는 남선창고 터가 있다. 남선창고는 1900년 부산 상인이 직접 지은 도시 최초의 근대식 물류 창고로, 함경도 원산에서 실어 온 명태를 보관하던 곳이다. 당시 명칭은 북선창고 또는 명태고방. 2009년 창고를 철거한 자리엔 대형 마트가 들어섰다. 한때 3,000여 제곱미터 규모에 이르던 창고 부지는 마트 주차장 한구석에 남아 있는 벽돌 담장으로 대체되었다. 그마저 주차장 관리실과 벤치, 쓰레기통으로 가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온다. 안내판조차 없었다면, 이 담장 따위가 무엇인지 알게 뭐람? 병원 건물이나 창고 터 모두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괜찮은 공간이 될 것 같은데, 아쉽고 씁쓸한 마음에 괜히 대형 마트와 나란히 있는 초량전통시장을 1바퀴 돈다.

 

초량동이 과거의 유산과 개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외지인의 발길은 부쩍 늘었다. 옛 백제병원과 남선창고 터, 초량교회, 168계단 등 기존 명소에 새로 지은 자료관과 기념관, 산복도로 전망대 등을 더해 조성한 ‘초량 이바구길’ 덕분이다. 내친 김에 168계단으로 향한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르 흐르는 오늘 같은 날, 그늘 한 자락 없는 계단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계단이 산비탈 집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인 이들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아득해진다. 계단 양옆으로 몇몇 집이 헐렸다. 그 자리에 모노레일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계단 꼭대기 언덕에 자리한 이바구공작소를 지키는 것은 지역 어르신들. 초량 이바구길의 득을 따진다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바구 자전거, 168도시락국, 이바구충천소와 이바구공작소까지 동네 어르신이 직접 여행객을 안내하고, 식사와 잠자리, 정보까지 제공하는 것. 공작소 안 의자에 넋 놓고 앉아 땀을 식힌다. 벽에는 산복도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펜화 작품이 걸려 있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유치환의 우체통이 설치된 전망대가 나온다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다. 산복도로는 해 질 녘에 올라갈 생각이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겠다.

 

- 옛 백제병원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209번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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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옛 백제병원 건물.
초량 이바구길의 하이라이트 168계단.
초량전통시장에 가면 부산의 명물 국포국수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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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계단 중간에 위치한 김부민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Nightlife


Man 리얼 부산 맥주


부산에서 택시를 타면 다소 위축이 된다. 일단 된소리가 잔뜩 섞인 기사님의 사투리가 귓가에 울리는 순간, 서울말로 대꾸하는 일이 좀 부끄러워진다. 어디 그 뿐인가? 택시를 타고 부산 시내를 통과할 때 대수롭지 않게 골목 사이를 헤집고 질주하는 운전 솜씨엔 혀를 내두르고 만다. 그렇다고 마냥 뜨내기 티를 낼 수만은 없는 법. 일단 기사님께 광안리 갈매기 브루잉으로 가달라고 부탁하자. 그럼 십중팔구 “거가 어딘데예?”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럴 때 “진주아파트 앞으로 가주세요”라고 아는 체하며 덧붙이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액셀을 밟을 것이다. 갈매기 브루잉 앞에 도착한 뒤에는 안으로 들어가 서슴없이 갈매기 IPA 1잔을 주문하면 된다. 뜨내기에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칭다오(靑島)에 칭다오(Tsingtao) 맥주가, 캘리포니아에 인디카(Indica) 맥주가 있다면 부산에는 갈매기 맥주가 있다. 크래프트 맥주 애호가 사이에서 최근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갈매기 브루잉의 맥주. 이름만으로 당연히 부산 토박이가 만들었겠거니 짐작했는데, 이를 탄생시킨 이는 캐나다에서 온 스테판 터코트(Stephane Turcotte)다. 9년 전 영어 강사로 부산에 온 그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뒤 아예 부산에 정착했다. “캐나다에서 제가 살던 곳은 밴쿠버 아일랜드(Vancouver Island)의 빅토리아(Victoria)예요. 부산에 온 순간 고향과 꼭 닮은 도시의 풍경이 마음에 쏙 들었죠.” 여기까지는 보통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이후 터코트의 행보는 좀 남다르다. “캐나다나 미국의 각 도시에는 저마다 특색 있는 브루어리가 있어요. 부산에도 그런 로컬 맥주가 하나쯤 있었으면 했죠. 그래서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를 이름으로 내걸고 브루어리를 열었어요.” 홈 브루잉에 관심이 많던 그는 아내와 함께 작은 펍을 운영하다 1년 전 브루 펍(brew pub, 직접 만든 맥주를 파는 술집) 갈매기 브루잉을 차린 것이다.

 

 “한국 남자는 맥주에 관해서라면 좀 보수적인 것 같아요.” 터코트는 자신의 브루어리에서 양조하는 에일 맥주를 흥미롭게 즐기는 여자 손님에 비해 남자 손님 대부분은 기존의 라거 맥주를 선호한다고 덧붙인다. 맥주는 목넘김이 부드러워야 한다는 선입견 탓인지 홉의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에일 맥주는 처음 접한 이에게 좀 낯설게 다가오게 마련. 마침 오늘은 터코트가 직접 양조를 담당한 날이다. 갈매기 브루잉을 연 지 1주년을 기념해 제조한 ‘돌잔치 더블 IPA’를 1잔 내어 준다. 맥주치고는 알코올 도수가 제법 높은 8.5도의 에일 맥주다. 첫맛은 예상대로 씁쓸함이 강하게 풍기는데, 이내 복숭아와 살구 향이 은은하게 입안을 감돈다. 보란 듯이 1잔을 시원하게 비운다. 

 

갈매기 브루잉에서는 돌잔치 더블 IPA를 포함해 블론드 에일과 페일 에일, 스타우트 등 총 아홉 가지 크래프트 맥주를 양조한다. 또 터코트의 첫 번째 펍인 인근의 탭 하우스에선 다른 브루어리에서 양조한 맥주 또한 취급한다. 이쯤 되면, 갈매기 브루잉을 시작으로 하룻밤에 여러 펍을 순례하며 다양한 맥주를 마시는 ‘펍 크롤(pub crawl)’을 시작해도 좋겠다. 1블록 너머에 있는 보틀 숍 식스팩에선 세계 각국의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병맥주를 구경하고 맛볼 수 있다. 밤이 차츰 깊어가고 광안대교에 알록달록한 조명 빛이 더해질 즈음에는 광안리해변가에 있는 HQ 광안으로 향할 차례. 창밖으로 보이는 광안대교의 야경과 부드러운 오트밀 스타우트 맥주의 궁합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런 밤에는 맺고 끊을 줄 몰라야 더 유쾌한 법이다.

 

- 갈매기 브루잉 갈매기 IPA 6,000원, 월요일 휴무, 6pm~12am,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남로 58, galmegibrewing.com
- 식스팩 월요일 휴무, 7pm~11pm, 금~일요일 1pm까지,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남로 78, blog.naver.com/6packbt
- HQ 광안 생맥주 6,000원부터, 월요일 휴무, 6pm~1am, 금요일 3am까지 토,일요일 11am~3am,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해변로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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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광안에서 바라본 낭만적인 광안대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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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갈매기 브루잉의 아늑한 1층 바. 안쪽에는 브루어리 시설이 있다.
탭에서 직접 내려 주는 돌잔치 더블 IPA 맥주.

 

Woman 산복도로의 밤


“그, 수정동 꼭대기에 있는 그예?” 부산동여자중학교로 가달라고 하자 택시 기사님이 되묻는다. 나는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본 부산 야경을 보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한다. 그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택시가 망양로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생중계가 시작된다. 1964년 10월 20일, 망양로(望洋路)가 개통됐다. 중구 영주동에서 진구 범천동까지 이어지는 부산 최초의 산복도로. 산 중턱을 따라 구불구불 달리는 이 길에선 이름처럼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오늘날 3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산복도로가 부산 6개 구의 산동네를 연결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곳에 먼저 마을이 있었고 도로가 나중에 생겼다. 일제강점기 도심의 평지를 차지한 일본인에 밀려난 조선인,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 한국전쟁이 끝난 뒤 오갈 곳 없어진 피란민이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았다. 이후 도시 정비와 근대화를 명분으로 도로가 들어섰고, 판잣집을 허물었고, 연립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맨땅에 겨우 집을 짓고 힘겹게 버텨온 산동네의 삶은 그 덕분에 한층 고단해졌겠지.

 

수정동 산복도로 만디(부산 사투리로 ‘제일 높은 곳’이라는 뜻)에 내려, 온 길을 천천히 되돌아간다. 도로 아래로 무수히 많은 집이 언덕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낮게 깔린 지붕 틈에서 비죽 솟아 있는 것은 오래된 목욕탕 굴뚝뿐. 사이사이 계단은 또 어찌나 많은지. 어느 새 해가 넘어가고 하늘빛은 점점 짙어진다. 비좁은 골목의 낡은 가로등에도 불이 들어온다. 망양로 곳곳이 야경 포인트지만, 영주동 삼거리 인근에는 아예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이름하여 역사의 디오라마(diorama, 축소 모형). 새까만 하늘 아래 불빛을 반짝이는 산동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환상적이라거나 아름답다는 감탄에 앞서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든다. “와, 집 정말 많다!” 

 

 ‘부산 사람 모두 이곳에 모여 사는 건 아닐까?’ ‘옆집 창문 너머, 앞집 옥상이 전부 들여다보일 정도니 이 산자락에 비밀은 없겠군.’ ‘그래도 전망은 끝내주겠지!’ 여백 없이 꽉 들어찬 산복도로의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최근 감천동 산복도로 지역이 알록달록한 색을 입고 감천문화마을로 인기를 끌면서 산복도로 또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산복도로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이름의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란다. 하긴, 조금 전 택시 기사님도 요즘은 감천마을을 찾는 사람이 많다며 굳이 수정동을 외치는 나를 의아해했다. 하지만 해운대나 광안리의 매끈하고 화려한 야경 대신 부산의 자연스러운 밤 풍경이 보고 싶어 산복도로를 찾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옥상에 널린 빨래처럼 일상의 속살이 아무렇지 않게 삐져나와 있는 삶의 터전이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처럼 전형적인 관광 명소화된 모습엔 그다지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캄보디아 씨엠립 호수에서 남의 수상가옥 거실을 들여다보며 느낀 불편한 마음은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분명 아름답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한 밤이지만, 섣불리 그 말을 입 밖에 내뱉지 못한 채.

 

- 역사의 디오라마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로 93.

 

 

SIDE TRIP 산복도로 야경을 즐기는 법


1. 버스
산복도로를 오르내리는 86번(서면~국제시장)과 186번(청학동~서부터미널) 버스를 타고 창밖 풍경을 즐기면 된다.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는 영주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


2. 택시
원하는 전망 포인트가 있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산복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많아 내려올 때도 택시 잡기가 수월한 편이다. 부산역에서 부산동여자중학교까지 약 5,300원.


3. 도보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하이킹 삼아 걸어서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초량 이바구길 코스인 유치환의 우체통에 이르면 산복도로와 부산항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영주동에 설치된 오름길 모노레일을 이용한 뒤 산복도로를 따라 역사의 디오라마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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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에서 서면 영주동 산동네부터 부산 앞바다까지 시야가 탁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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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부산의 오래된 야경을 볼 수 있는 산복도로.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옛 동네에는 계단이 즐비하다.

 

 

Shopping


Man 서핑하듯 쇼핑하라


요즘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액티비티를 하나 꼽자면 역시 서핑이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또한 이런 흐름에 발맞춰 지난 호에 ‘서핑 초심자 가이드’ 기사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사실 우리나라 서핑의 역사는 그리 긴 편이 아니다. 이른바 서핑 1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서핑을 시작한 때는 2000년대 초. 갓 10년을 넘긴 정도니 대중적인 액티비티로 자리 잡았다고 하기엔 아직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부산의 송정 해변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산에서 처음 서핑이 시작된 곳이자 오늘날 12개의 서프 클럽이 들어선 이곳은 양양의 죽도, 제주 중문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 서핑 해변으로 거듭났다.

 

최근 부산에는 서퍼를 위한 색다른 공간 하나가 문을 열었다. 도시 한복판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건너편에 들어선 킬러스웰. 부산의 로컬 브랜드 안티도트에서 만든 서프 숍 겸 카페다. 3년 전 남포동에 남성을 위한 패션 제품을 선별해 판매하는 편집매장 고사우스를 연 안티도트는 그 연장선상으로 서핑에 집중한 공간을 새롭게 선보인 것이다. 그런데 뜨겁게 서핑 붐을 일으키고 있는 송정이 아닌 도심 속에 터를 잡은 사실이 좀 의아하다. 

 

“해외의 유명한 서핑 도시에서 서핑 전문 숍은 모두 시내에 위치해 있어요. 좀 더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서핑 정보와 장비를 제공하려면 보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도심이 여러모로 나으니까요.” 부산의 서핑 1세대이자 킬러스웰을 운영하는 박재현 씨가 설명한다. “부산을 여행하는 이들이 한 번쯤 가볍게 들렀으면 좋겠어요. 부산으로 처음 서핑 여행을 왔다면 출발지로 삼기에 제격이죠. 일종의 인포메이션 센터처럼요.” 숍 안에는 서프보드부터 슈트, 쇼츠 그리고 서프보드 핀 같은 액세서리까지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다. 꼭 서핑 관련 제품뿐 아니라 도심 속에서 즐겨 탈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를 비롯해 파나마 해트, 셔츠 같은 스트리트 패션 제품과 가방, 수제 비누 등 아기자기한 소품도 판매한다. 숍 중앙을 차지하는 바에선 커피와 맥주를 주문해 잠시 쉬어 가는 것도 가능하다. 즉 이곳은 서퍼와 서핑에 호기심을 보이는 이가 자연스레 뒤섞일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부산에는 송정 말고도 서핑을 즐길 만한 해변이 무궁무진해요. 일반인은 잘 모르는 광안리, 다대포, 해운대 등지에도 숨은 서핑 스폿이 있지요.” 박재현 씨가 부산 곳곳에서 즐겨 타던 자신의 서프보드를 꺼내며 말한다. 왁스에 닳고 닳은 보드의 표면은 그의 오랜 경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처음 서핑을 했을 때,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 무척 강렬했어요. 바다와 나 그리고 보드가 하나가 된 그 순간에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죠.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고 할까요? 아마 그 느낌 때문에 서핑은 평생 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수록 서핑에 도전하고픈 마음이 샘솟는다. 남동풍이 부는 여름은 부산의 해변에 가장 높은 파도가 밀려오는 시기. 그러나 정작 해수욕장 개장과 맞물리면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서핑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그 때문에 파도의 힘이 아직 남아 있고, 관광객이 빠져나가는 9월과 10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이라고 한다. 이번엔 여정 막바지에 호기심이 동해 잠시 들렀지만, 다시 부산을 찾는다면 아마 가장 먼저 킬러스웰로 향하지 않을까? 일단 아쉬운 마음에 벽에 멋스럽게 진열해놓은 서프보드 핀 하나를 집어든다. 언젠가 내 서프보드에 꽂을 날이 오길 바라면서.

 

- 킬러스웰 11:30am~9pm,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24.

 

그의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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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스웰에서 판매하는 캡틴핀의 서프보드 핀.

꼭 서프보드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장식용으로도 그럴 듯하다. 1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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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부터) 서핑을 테마로 한 장식이 곳곳에 진열되어 있다.
숍 안의 카페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부산의 서핑 정보를 물어보자.
자신의 체형에 맞는 커스텀 보드를 주문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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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스웰 운영을 맡은 박재현 씨는 부산에서 12년 동안 서핑을 즐겨왔다.

 

Woman 동네 책방에서 살 수 있는 것


지하철 장전역 1번 출구. 내가 부산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 동네까지 찾아올 줄이야. 뙤약볕이 내리쬐는 부산의 늦여름을 제대로 경험하며 일렬로 늘어선 빌라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고 완만한 경사면을 오른 지 3분쯤 지났을까. 왼편 모퉁이에 군더더기 없는 (심지어 간판도 없는) 단정한 가게가 모습을 드러낸다. 긴가민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는데, 쇼윈도 너머로 황톳빛 고양이 2마리가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제대로 온 것 같다.


나는 여행지에서 지갑을 잘 여는 편이 아니다. 충동적으로 샀다가 괜히 필요 없는 짐만 늘고 결국 쓰레기를 만들까 봐. 그런데 요즘은 실용적인 것이든 아니든,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 하나쯤 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다. 남포동 국제시장이나 부평 깡통시장은 워낙 유명하고, 더베이 101이나 센텀시티에서 살 수 있는 건 서울에도 있다. 그러니까 부산에서 쇼핑을 한다면,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것 혹은 부산이기에 의미 있는 것을 사고 싶었다. 샵 메이커즈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다.

 

“작년에 공간을 확장하긴 했지만, 같은 자리에서 5년째예요.” 이 독특한 서점의 공동 운영자 중 1명인 구나연 씨의 말에 깜짝 놀란다. 5년 전이라면 서울에도 동네 책방이 얼마 없던 시절 아닌가. 독립 출판의 개념도 확산되기 전이고. 지금이야 소규모 서점이 일종의 트렌드지만 말이다. “2009년부터 <크래커 달지 않은>이라는 미술 비평 잡지를 4년간 발행했어요. 잡지를 만들다보니 그 결과물을 좀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간을 꾸리게 됐죠.” 몇 권 안 되는 책으로 시작한 샵 메이커즈는 이제 입고 요청을 다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독립 출판물은 물론, 개인이나 소규모 브랜드가 제작한 소품, 음반 등을 판매하고, 숍인숍 형태로 부산의 핸드메이드 가구 브랜드 우드웍스30의 쇼룸도 겸한다. 그리고 고양이 붐과 민율의 쉼터기도 하다.

 

비율로 따지면 90퍼센트 이상이 부산 외 지역에서 만든 제품이지만, 그 틈에서 10퍼센트의 보물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 눈썰미가 남다른 이라면 부산 진시장에서 패브릭 공방 겸 카페를 운영하는 지논(Zinon)의 가죽 제품,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그린그림에서 리소 프린트로 제작한 사진집, 부산의 변화하는 공간을 수채화로 담은 그림 엽서 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꼭 메이드 인 부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빈티지 연필이나 핸드메이드 향초 같은 것도 있다. 책과 아기자기한 소품, 손으로 만든 가구가 어우러진 공간. 작지만 특별한 물건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온 지 2시간이 다 되어간다. 신기하게도 아직 그 문을 나설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 샵 메이커즈 12pm~9pm, 일.월요일 휴무, 051 512 9906,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4번길 120 1층, shopmakers.kr

 

 

그녀의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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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스튜디오 니나내나에서 만든 에코 백 1만5,000원.
부산 여행 에세이 <원도심 낭만을 거닐다> 1만 원.
엽서 시리즈 형태로 제작한 매거진 <얇은 안부> 7,700원.
빈티지 연필 1개당 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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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책과 아기자기한 소품, 손으로 만든 가구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공간.

책방의 또 다른 주인인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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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하나 없이 심플한 샵 메이커즈의 외관.

 

 

고현과 표영소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조지영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사진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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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8월 [2015]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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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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