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각으로 서양미술을 이해하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다’라는 말의 일차적인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혹은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인데, 이 앎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 무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다’라는 말의 일차적인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혹은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인데, 이 앎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 무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하다’라는 말의 풀이에 안다는 말이 들어간 것은 항상 100퍼센트 확실히 안다기보다 최소한 그 상황이나 사정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앎을 갖는다는 의미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다’의 사전적 정의에는 ‘양해하다’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라는 뜻이 더불어 있다. 그러니까 상대 혹은 대상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우호적인 방향으로 판단해 수용하거나, 상대 혹은 대상을 수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존재하는 당위로서 긍정한다는 뉘앙스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이해’라는 타이틀로 서양미술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강의를 해온 지 햇수로 어언 17년이 되었다. 내가 이 강의의 타이틀에 ‘이해’라는 말을 쓴 데는, 우리가 서양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서양 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으니, 한국인의 입장에서 서양미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아려 수용하는 게 좋을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역사 경험과 문화가 크게 다른 까닭에 우리가 서양 사람들처럼 서양미술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없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입장에서 느끼고 바라보자, 곧 이해를 추구하자는 게 이 강의의 취지였다.
사실 우리는 서양미술, 서양미술 하지만, 서양에서는 한국인 혹은 동양인 들이 구분하듯 서양미술을 동양미술과 등가적인 대칭성에 입각해 바라보지 않는다. 서양미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로는 ‘Western Art’ 혹은 ‘Art of Western World’가 있다. ‘Eastern Art’ 혹은 ‘Art of Eastern World’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곰브리치의 명저 『서양미술사』의 영어 타이틀은 그냥 ‘The Story of Art’이다. ‘Western’이라는 말이 아예 없다. 역시 『서양미술사』를 한국어 제목으로 쓰는 저명 미술사가 H.W. 잰슨의 책도 영어 타이틀이 ‘History of Art for Young People’이다. 우리말 제목이 『웬디 베케트 수녀의 명화 이야기』인 웬디 수녀의 책 ‘The Story of Painting’은 그래도 ‘서양’이라는 단어를 써서 번역하지 않았지만, 책 내용은 총체적으로 서양 회화사에 관한 것이다. 어쨌든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이 책들에는 공통적으로 ‘Western’이라는 단어가 없다.
물론 고대 이집트나 근동의 미술 등 서양으로 한정할 수 없는 지역의 미술에 대한 소개가 일부 들어 있긴 하다(곰브리치의 책에는 중국, 일본 등 동양미술에 대한 소개도 아주 약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고대라는 시점에 국한된 것으로, 그 미술이 궁극적으로 서양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에 이에 대해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 어려워 서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서양미술에 대해 개관하면서도 이 필자들은 구태여 서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art’ 혹은 ‘painting’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미술에 대해 서술할 때 단순히 ‘미술의 역사’라고 쓰지 않는다. 물론 우리 필자가 서양미술사에 대해 쓸 때도 단순히 ‘미술의 역사’라고 쓰지 않는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에 비해 양洋의 동서를 보다 분명히 갈라 미술을 범주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명의 발전 경로 및 문명 사이의 경쟁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무엇보다 근대화에 있어 동양이 서양에 뒤졌던 아픈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이 우리를 의식하는 것에 비해 훨씬 자주, 많이, 깊이, 서양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게 불가피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서양미술을 서양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우리 자신의 시선으로 꾸준히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서양 사람들이 때로 그냥 ‘art’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왜 항상 ‘western art’로 불러야 하는지 그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 경험을 좀 더 발전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자산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니 말이다. 그런 동기에서 모자란 지식을 동원해 거칠게나마 시도해본 것이 이 강의이다.
앞서 이 강의를 해온 지가 햇수로 17년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햇수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강의를 만든 계기가 1997년에 발생한 ‘IMF 경제위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IMF 경제위기’와 이 강의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지난 1997년 말,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전 국민을 공황상태에 빠뜨린 ‘IMF 경제위기’가 온 것이다. 이 사건은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할 정도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이 속으로 그토록 부실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런 난국을 맞게 되었을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 끝에, 그동안 우리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한다고 하면서도 본질은 도외시한 채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흉내 낸 탓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이른 것이다.
비서구권 지역에서 근대화는 늘 서구화를 동반했다. 서구화가 없는 근대화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서구화가 진행된다고 모든 게 서구처럼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서구적 가치가 스며들어 사회 전체의 성격이나 구조가 바뀌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한중일 삼국은 과거 근대화 과정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니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니 ‘화혼양재和魂洋材’니 하는 구호를 외치며 그간 지탱해온 정신과 문화를 ‘무균질’로 지키면서 필요한 서구의 성취, 그 가운데서도 기술적?제도적 성취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서구화는 근본적으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화학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서구화가 일어나면 ‘동도서기’뿐 아니라 ‘서도동기西道東器’ 현상도 발생하는 것이고, ‘중체서용’뿐 아니라 ‘서체중용西體中用’ 현상도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어떤 서양적 가치를 인위적으로, 선택적으로 수용해 그것만 발달시키겠다는 것은 머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구화는 근대화처럼 전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한 그간의 역사는 이를 여실히 증명해 보여준다. 유신공화국 시절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같은 구호를 외쳤으나 현실적으로는 불합리한 오류로 귀결된 게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므로 서구화 과정에 있는 사회는 인위적으로 그 일부를 선택해 수용하려 하기 이전에 서양문명의 본질과 성격, 장단점 자체에 대한 이해를 먼저 돈독히 쌓을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라도 자기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철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토대가 있을 때 서구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화학적 현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추적할 수 있고, 그 자연스러운 생장生長 경로를 따라, 또 사회적 가치의 진화와 구성원들의 컨센서스에 따라, 부양할 것은 부양하고 위축시킬 것은 위축시켜 나가는, 좀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한 사회의 문화는 주변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한다. 주체와 정체성은 과거의 것을 고집한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라 상황을 남이 아니라 내가 주도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체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는 유입되는 문화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가져야 하고 그 공동체의 가치 지향에 맞게 효율적으로, 합리적으로 컨센서스를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후 서양미술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서양미술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좀 더 명료한 상을 갖고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미술을 낳은 서양인들의 사고방식과 정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술은 양식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서양인들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는 ‘IMF 경제위기’와 같은 재난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앞서 근대화를 달성한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술은 우리에게 그런 이해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미술과 같은 예술에는 이를 창조하고 수용해온 사람들의 미적 지향과 성취뿐 아니라 그 근본이 되는 내면의 풍경, 곧 사고방식이 어려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정신이 미술을 통해 어떻게 드러났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런 만큼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사물을 대하는 심리적 태도에서부터 가치관,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이 서양미술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나름대로 따져보고 파악해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가상했는지 여러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이 강의는 지금껏 다양한 청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고, 마침내 이렇게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이라는 책으로 엮이어 나오게 되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이뤄지는 강의, 특히 큰 주제를 대관大觀하는 강의 일반이 그렇지만, 서양미술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몇 가지 주요한 특징으로 압축해 설명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미술은 오랫동안 복잡다기한 변화를 겪었다. 또 공간적으로 같은 서구권이라 하더라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 미술의 성격과 사람들의 취향에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이를 몇 가지 대표적인 특징으로 묶어 정리하는 것은 비약과 왜곡을 낳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를 한 것은, 그 같은 접근이 서양미술과 문화에 대해 우리에게 좀 더 또렷한 상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편의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분명한 상이 있어야 이해가 빠르다. 나아가 우리 미술과 대비되는 점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우리 미술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그런 비교의 과정에서 애초의 상이 지닌 한계를 좀 더 명료히 인식하고 진일보한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실익이 많은 접근법이다.
그래서 우리 미술과 비교되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의 성격을 압축해 정리해보았다. 인간 중심적인 성격과 사실주의적인 성격, 감각적인 성격의 세 가지 특징이 그렇게 정리되어 나왔다. 강의는 이 세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서양미술의 상을 만들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오늘날 서양미술은 한국미술 못지않게 가깝고 친근한 미술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서양 고전미술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술 전시들이 우리네 미술관과 갤러리를 채워 심지어 어떤 서양 미술가들의 이름은 웬만한 우리 미술가들의 이름보다 더 친숙할 지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양미술은 더 이상 타자의 문화에 머물지 않고 우리 조형문화의 중요한 젖줄로 기능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서양미술의 본질에 대해 좀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입문서가 그 이해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물론 모자라고 미진한 부분이 많은 책이다. 독자 여러분의 미술에 대한 너그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주헌의 서양미술특강 이주헌 저 | 아트북스
믿고 읽는 ‘아트 스토리텔러’ 이주헌이 17년 동안 이어온 강의 내용을 압축한 결정판이다. 저자는 서양미술에서 핵심만 정리한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우리 미술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점을 바탕으로 세 가지 특징을 추출해낸다. 인간 중심적인 성격과 사실주의적인 성격, 감각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책은 이 세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의 상을 만들어가는 강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서양미술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세 가지로 압축하는 것이 자칫 비약과 왜곡을 낳을 위험도 따른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서양미술을 다뤄온 저자답게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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