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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사, 스타 중심보다는 저변이 탄탄한 인문학이 필요
역사의 대중화를 넘어서 다양한 인문학적 실험을 진행 중인 역사비평사
지난 달에 이어 이번 달의 주인공도 역사 전문 출판사다. 역사비평사는 1987년 이후부터 27년째 역사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계간지와 단행본으로 내고 있다.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역사비평사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1987년 <역사비평> 무크지로 창간. 1988년 계간지로 등록, 첫 단행본 발간. 이렇듯 역사비평사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지금은 서울 시장이 된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해 이이화 역사학자, 서중석 역사학자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역사문제연구소가 역사비평사의 모체다. 역사의 대중화를 목표로 해서 만들어진 연구소는 목표에 걸맞게 여러 연구를 진행했고 그 성과를 계간지와 단행본으로 대중과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학연구총서’ 시리즈, 유홍준 선생의 『화인열전』 등 500여 종의 단행본을 냈다. 최근에는 ‘20세기 한국사 시리즈’를 10권으로 완간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한국의 근현대를 조망했으나 최근에는 조선사와 동아시아사, 서양사 등 폭넓게 책을 내고 있다. 『젠더의 역사』, 『조선을 떠나며』 등 미시사에 관한 관심도 놓지 않는다. 역사비평사 조원식 실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역사비평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면.
이이화 선생님, 박원순 변호사, 서중석 선생님 등이 주축이 되어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역사 대중화가 과제였다. 연구소의 부속 출판사처럼 시작한 게 역사비평사다. 처음에는 계간 <역사비평>을 만들었고 점차 단행본도 기획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는 여러 가지 이념적 실험을 많이 했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근현대사 중심으로 책을 냈다. 2000년대 들어서 외연을 넓혔다. 전근대까지 포함해서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서양사도 다뤘다. 지금까지 계간지는 108호까지 나왔고, 단행본은 500여 종 냈다.
한국에서 계간지를 계속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일 아닌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1990년대만 해도 계간지가 상당히 많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2000년대 초반에 그 많던 계간지가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지식 인프라에 비해 계간지가 과잉된 경향이 있었다. 계간지가 활성화되기에는 필자, 논자가 부족했다. 그래서 <사회평론>을 비롯해 많은 계간지가 폐간됐다. <역사비평>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무래도 연구소가 있었다. 연구소를 중심으로 해서 필자, 연구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비평사가 변한 점이 있나.
초기에는 ‘역사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했다. 지금도 유효하지만 세월이 많이 변했다. ‘역사 대중화’만이 아니라 인문학 관련해서 다양한 책을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웃음) 역사비평사, 하면 좋게 표현하자면 뚝심 있게 어려운 책을 잘 내는 출판사로 인식한다. 나쁘게 말하면, 고루하다는 뜻이다. 장점이자 단점인데, 여전히 숙제다. 지금도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책과 필자가 역사비평을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들이 진지하고 어려운 걸 좋아한다. 역사 전문 출판사 중에서는 역사비평사가 아무래도 아직 이미지가 딱딱하다. 그래서 모비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미스테리 소설, 작법, 자서전 등 역사비평사로는 못했던 자유로운 책을 3년째 내는 중이다.
500여 종이라고 했는데, 이중에서 반응이 좋았던 책을 꼽아 달라.
유홍준 선생의 『화인열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는 다른 형태로 인물 평전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화가를 묶어서, 소평전처럼 썼다. 한명기 선생의 『광해군』. 나온 지 오래 됐지만, 영화 <광해> 덕을 조금 보기도 했지만 영화와 무관하게 꾸준히 스테디셀러였다. 이이화 선생님의 『한문공부』. 입문자부터 중급 초반까지 독자에게 좋은 학습서다. 한길사에서 절판된 책을 역사비평사에서 다시 낸 책인데,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좋은 기억이 있었다. 한문 공부에 지침서가 되는 책이다. 최근에는 전근대, 그러니까 조선 관련한 책이 인기 있다. 오항녕 선생의 『조선의 힘』, 이정철 선생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가 대표적이다.
기대보다 반응이 없었던 책은?
애정과 정성이 안 깃든 책이 어디 있겠나. 굉장히 많다. 꼽으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야스쿠니는 계속 논쟁거리다. 원제에 '결코 피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야스쿠니가 왜 군국주의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가를 구조적으로 다룬 명작이다. 한국과 대만, 동아시아 문제를 다각적으로 다뤘다. 일본에서도 많이 팔린 책이다. 한국에서는 시사적인 문제로 신경을 쓰지만, 막상 이문제로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작년에 냈던 『식민지 불온열전』. 이 책도 재밌다. 식민지 때 학생이었던 주인공이 식민지가 된 조국 조선에 살면서 겪는 불화를 다룬다. 미시사적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세트』가 생각만큼 조명을 못 받는 것 같다.
학술적인 책은 독자층이 두텁지 않으니 품절, 절판되는 경우가 많은 듯한데.
우리는 가급적 품절 안 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비평사 책이 유행을 타는 책이 아니라 언제든 독자가 읽어도 될 책이 많다. 그래서 가급적 절판을 안 시키고 유지하려 노력은 하지만 워낙 종수가 많고 유통, 보관 문제가 있다. 1년에 100권 이하, 50권 이하로 안 나가는 책은 재쇄를 찍을 수가 없다. 앞으로는 종이책으로 절판이나 품절되더라도, 전자책으로라도 데이터를 살려서 공유할 수 있게 전환하는 중이다.
1987년부터 시작해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역사비평사만의 문화가 있나.
특별한 건 없다. 매일 같이 밥을 먹는다. 도시락을 싸오고, 이곳에서 국이나 찌개를 만들어 먹는다. 식사를 같이 하는 게 팀워크에 도움이 된다. 밥 먹으면서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설거지는 당번도 안 정하고,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결정한다.
역사, 하면 떠오르는 게 답사인데. 혹시 답사도 함께 가고 그러나.
같이 답사 갈 여유는 없다. (웃음) 각자 개인적으로 한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유독 서점에서 ‘인문학’ 제목을 한 책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인문학 유행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인문학의 중요성이 이야기된 건 15년, 20년이 됐다고 본다. 그때마다 화제가 되는 중심 인물이 바뀌었을 뿐이다. 원조로는 도올부터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오래됐다. 다만 인문학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면 답이 쉽지 않다. 1990년대, 특히 2000년대 이후를 문화의 시대라고 표현할 만큼, 문화가 사회적 이슈보다 중요해졌다. 다양한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핵심적인 가치를 논의하려면 결국은 역사, 철학, 사회학, 윤리학 등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그 전에는 이데올로기, 가치 투쟁을 했다고 본다면 지금은 문화투쟁이다. 실제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테제보다는 문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인터넷 논객도 많고 일베 문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문화 헤게모니 싸움이다. 인문학이 강조되는 건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유행은 유행일 뿐, 짧다. 그에 비해 내가 몸 담은 사회는 오래 됐고, 오래 갈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인문학을 논해야 한다. 지금만이 아니라 우리가 왔던 과거와 가야 할 미래까지 포괄하는 의미에서 인문학에 접근해야 한다. 스타 중심의 열풍보다는 좀 더 체계 있는 인문학 공부를 기본부터 천천히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좋겠다.
대학에서는 인문학 쪽 전공이 폐과되는 추세인데.
시대가 그렇다. 역사나 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이 많지 않다. 취업이 중요하니까. 과도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쏠림 현상이 심한 거 같아 아쉽다. 우리 때만 해도 젊을 때 다양한 공부를 하고, 취업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너무 팍팍하다. 학문이나 교육 장이 스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 시스템 속에서 소수의 스타가 나오고, 그 사람이 마치 모든 걸 끌고 있는 것마냥 보이지만, 저변이 약해지고 있다. 영화를 보면 한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수많은 스탭의 역량이 축적 되지 않으면 좋은 영화를 못 찍는다. 인문학도 다양한 장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이 해나가야 한다.
독서 풍토는 어떻게 바뀔까.
디바이스가 훨씬 저렴해지고 쓰기 편해진다면 디지털화가 많이 될 것이다. 다만, CD에서 음원으로 넘어오면서 LP시장이 열렸지 않나. 매체가 자라다가 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듯하다. 종이책이 더 귀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본다. 대세는 디지털화가 맞겠지만, 종이책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문화적 실험이 안 끝났다. 콘텐츠가 정말 좋은, 잘 만든 종이책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앞으로 나올 책은.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에 관한 책이 나온다. 벤야민이 글을 쓰고 공부한 방식에 관한 내용을 묶었다. 내년에 크게 기획하는 게 『주자평전』이다. 신국판 기준으로 2,000쪽 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오항녕 선생님의 조선왕조실록 연구서를 2권으로 준비 중이고, 『광해군』 개정판을 내년에 낼 수 있을 듯하다. 우리에게는 『옹정제』로 알려진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학자가 있는데, 이 학자의 책을 3권 연속 내려고 한다. 수양제, 과거, 중국 명재상과 명군, 이렇게 3권이다.
* 역사비평사에서 낸 책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권내현 저 | 역사비평사
신분제도를 둘러싼 조선의 생활사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개한다. 호적에서 관직 기록을 해독하는 방법인 행수법(行守法), 기혼 여성들의 호칭 차이, 노비의 현실과 양반의 집착, 노비에게 붙여진 이름에 담긴 사회적 천대와 멸시, 노비를 소유한 노비, 재혼을 포함한 결혼제도의 변화,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군역의 변질, 성씨와 본관의 획득 과정, 가문의 대를 잇는 일에 가운을 거는 관습으로 생겨난 입양제도의 변화 등 조선시대 일상의 세밀한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이화의 한문공부
이이화 저 | 역사비평사
>한문 문법과 관련된 저서들이 많이 나왔지만, 너무 전공학자 위주로 짜여 있거나 예문이 중국 경서 위주로 제시되어 있어 교양으로 한문을 공부하려는 일반인이나 이제 막 학문 세계에 입문한 초학자들이 쉽게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저자 또한 어린 시절 한학자인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기본 소양을 갖추긴 했지만, 정식으로 역사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고 한다. 저자 스스로 국사학도로서 한문 사료를 독해하는 데 한문 지식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면서도 체계적으로 정리된 한문 문법서가 절실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문자학이나 한문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초학자 시절부터 틈틈이 정리해온 자료를 검토하고 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온 경험을 보태어 역사 연구 과정에서 스스로 깨친 한문 공부의 노하우를 정리하였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이정철 저 | 역사비평사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에 관한 평전.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주제하에 조선시대 경세가인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의 일대기를 다룬 작은 평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평전 속에서 각각의 삶과 이념, 그 시기의 정치 상황과 사건 전개, 그리고 인물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저자 이정철은 율곡 이이를 ‘개혁의 좌표를 설정한 인물’로 그려낸다. 사회제도적 측면의 경세론을 탄생시키고, 그 성과가 대동법으로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 오리 이원익은 묵묵히 개혁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논의가 시작된 공물 변통을 항구적인 제도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포저 조익은 ‘현실에 참여한 지식인’으로, 잠곡 김육은 ‘안민을 실현한 정치가’로 표현한다.
조선을 떠나며
이연식 저 | 역사비평사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이다.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한국고문서학회 저 | 역사비평사
한국고문서학회와 역사비평사는 고문서를 통해 전통 사회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조선시대 생활사’ 시리즈를 꾸준히 펴냈다. 앞서 펴낸 조선시대 생활사 3권은『의식주, 살아 있는 조선의 풍경』으로, 다양한 풍속화와 고문서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의생활?식생활?주거생활을 살펴봄으로써 그들 삶의 모습에 다가서고자 하였다. 이번 조선시대 생활사의 테마로 잡은 것은 ‘분쟁과 소송’이다.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립과 갈등, 분쟁과 소송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 삶의 근원적 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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