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아름다운 휴양지 이탈리아 마르케

마르케에서 보낸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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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북부에 자리한 마르케. 부드러운 곡선의 언덕과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아드리아 해를 만날 수 있는 곳.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와인을 즐기며 라파엘로와 로시니를 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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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곡선의 초록색 구릉과 붉은 지붕의 집들,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마르케의 풍경.



당신이 모르던 이탈리아,


우리가 진정으로 즐겨야 할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는 알이탈리아항공 기내에서 문득 20여년 전의 어느 여행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김포발 베이징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솜털 같은 구름이 날개 아래로 펼쳐졌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네이멍구(?蒙古)의 사막까지 열차 여행을 할 예정이었는데, 내게 그 여행은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여행이자 바다를 건너는 첫 여행이기도 했다.


많은 여행이 그렇듯 그 여행도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떠나기 며칠 전, 친구가 물었다. “여행 가지 않을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자. 그런데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야 하지?” 내가 되물었다. 친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아마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기 어려울 거야.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까 말이야. 그때가 되면 지금 여행을 떠나지 못한 걸 엄청나게 후회할 거야.” 그렇게 시작한 여행. 아마도 사막이었던 것 같고, 밥을 먹을 때마다 모래가 한 움큼씩 씹혔던 것 같다. 어쨌든, 난생처음 탄 비행기가 지상을 벗어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중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 약 5도 정도로 선체를 기울인 비행기가 공항을 한 바퀴 천천히 선회할 때, 나와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날아가고 있어.’ 평생에 딱 한 번, 딱 그 순간만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어쩌면 여행 작가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나고 있다’는 그런 느낌. 비행기가 텅 빈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 가슴 가득 차오르던 위안의 분위기. 그것은 분명 기차나 버스, 자동차가 출발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세금과 할부금과 가족과 보고서, 가뭄과 홍수와 지진과 학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시시하고 빤하고 잔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안도감. 몇년 전 시칠리아를 여행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도, 베로나(Verona)와 벨라지오 술 민치오(Bellagiosul Mincio)라는 작은 마을의 파스타 가게를 취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도 같은 감정과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는 내게 언제나 설렘과 위안, 안도감을 선사한 것 같다.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는 런던이나 시애틀, 시드니, 방콕,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와는 뭔가 다르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탈리아 어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있으면 ‘아, 나는 정말여행이란 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마르케라는 낯선 곳을 향해 날아가는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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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는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한 도시다. 회벽을 칠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마르케의 오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셰프 마우로 울리아시는 마르케산 식자재를 사용하면서도 심플한 요리를 만든다. 


오징어 먹물이야 묻든 말든


마르케는 이탈리아 중북부 동해안에 자리한 주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쯤 된다. 아드리아 해와 마주한 이곳은 이탈리아 사람이 길고 긴 여름휴가를 즐기러 가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르케에 별장을 두고 있는 현지인도 많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온화한 곡선의 구릉지대. 그 위를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 이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절로 순해지고 느긋해진다. 


마음은 살아가는 곳의 풍경을 닮는 법. “마르케는 맛있는 요리 같은 곳이랍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셰프가 말한다. 미슐랭 스타 셰프 마우로 울리아시(Mauro Uliassi). 깊은 눈과 멋지게 쓸어넘긴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 그는 항구도시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그가 내놓은 오징어 먹물을 잔뜩 올린 요리를 먹으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지?” 하며 감탄하던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입술에 먹물을 묻히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맛있는 요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죠. 마르케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마르케를 여행하는 동안 당신은 당신과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거에요.” 그는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물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테고요.”


열일곱 살에 요리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는 여자친구의 생일에 처음 요리를 해봤다고 한다. “수박에 주사기로 럼을 넣어 내놓았죠. 그걸 맛본 친구들이 저를 감동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더군요.” 그리고는 두손을 모아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요리가 지닌 힘을 믿어요. 아내는 저의 손에 영혼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가 요리의 힘을 믿듯, 나 역시 여행과 풍경이 지닌 힘을 믿는다.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를 보다 선한 인간으로 만든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킨다. 나는 그가 내놓은 생선 요리, 그가 내놓은 파스타와 초콜릿을 먹으며 세니갈리아의 밤바다와 이탈리아의 달콤한 공기를 마음껏 학습한다. 오징어 먹물 따위야 입에 묻든 말든.


추가 정보

 ▶ 레스토랑 울리아시(Restaurant Uliassi) 파스타 25유로, 5코스 메뉴 100유로, uliassi.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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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코나를 걷다 아코니언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를 만났다. 

아침에 마시는 진한 에스프레소 1잔은 이탈리아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입안 가득 사과 향을 머금고


푸른 하늘에 양 떼 모양의 흰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언덕 기슭의 색깔은 갑자기 기묘한 색으로 빛나기도 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깃털처럼 생긴 미루나무를 흔들어댄다. 이런 날씨에 ‘완벽하다’는 찬사를 붙여주지 않는 것은 불경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완벽한 날씨를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짙은 그늘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일 역시 최선의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탈리아 여느 지역이 저마다 자랑할 만한 와인을 갖추고 있듯 마르케도 마찬가지다. 우르비노(Urbino), 안코나(Ancona), 페르모(Fermo),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 페사로(Pesaro) 등 마르케 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다양한 와인을 맛보았지만, 예시(Jesi)라는 중세 도시에서 맛본 베르디키오(Verdicchio) 와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예시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가 태어난 곳으로, 그를 기념하는 극장도 있다. 


고대 로마의 거리를 간직한 지역으로 잘 알려진 도시인데, 골목을 따라 걷다 우연히 어느 에노테카(enoteca)에 들어섰다.“베르디키오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재배했다는 청포도 품종이죠.” 검은 테 안경을 쓴 안드레아(Andrea)가 시음용 와인을 졸졸졸 따라준다. 이 에노테카는 마르케와인협회에서 운영하는 곳. 마르케에서 생산하는 와인을 진열해놓았고 테이스팅도 해볼 수 있다. 오후 3시지만 와인을 맛보느라 볼이 빨개진 사람들이 기분 좋은 얼굴로 가게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안드레아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아무래도 관광 면에서 인근의 토스카나(Toscana)와 움브리아(Umbria)에 밀리다 보니 와인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베르디키오는 마르케 토착 품종이다. ‘푸르다’는 뜻의 ‘베르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포도에는 푸른빛이 돈다. 와인잔을 코끝에 대고 숨을 깊이 들이킨다. 상쾌하면서도 신맛이 느껴지는 향이 파고 들어 미간을 살짝 찡그리게 만든다. 안드레아가 말한다. “베르디키오는 숙성력이 탁월합니다. 빈티지가 좋기만 하면 10년은 너끈히 묵힐 수 있죠. 잘 숙성된 베르디키오에서는 농익은 사과 향이 난답니다. 양조장에 따라 포도 늦게 수확하기도 하는데, 이는 산도를 낮추고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죠.”


시음해본 베르디키오는 정말 맛있다. 깊은 맛은 부족하지만 아주 상큼하고 향기롭다. 금방 빚어 내놓은 듯한데, 아몬드 향이 나는 것도 같고 여름의 쌉싸래한 풀 향도 섞여 있는 것 같다. 독특한 이 와인이 맘에 들어 프로슈토와 치즈를 집어 먹으며 꽤 많이 마셔버렸다. 이 매력적인 와인은 그렇지 않아도 속수무책으로 느긋한 여행자의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만든다.


시음을 마친 후 거리로 나온다. 늦은 오후의 거리는 부드러운 질감의 햇살로 넘쳐나고, 도시의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거리로 몰려 나와 햇살 속을 물고기처럼 나른한 동작으로 헤엄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오후의 햇살을 그냥 놔두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어디든 햇살 바른 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카드 놀이를 하거나 맥주라도 마시든지, 하다 못해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는 바느질이라도 하든지.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게 이탈리아 사람인 것이다.


나 역시 근처의 바로 들어가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각설탕 하나를 넣는다. 왠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오후다. 달콤 쌉싸래한 커피를 마시며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과 수염을 기르고 한껏 멋을 부린 청년, 상냥한 이탈리아 아가씨를 오래오래 바라보던 오후 5시. 내 생애 가장 완벽했던 어느 날의 오후.


추가 정보

 마르케 주 예시 에노테카(Enoteca della Regione Marche, sezione di Jesi) www.imtdoc.it



리와 축구 그리고 휴가 이야기로 바쁜 하루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이탈리아 인은 다들 별로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몇 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깨달은 것인데, 그들은 정말 쉬는 틈틈이 아주 잠깐씩 일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침이면 점심에 먹을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점심을 먹을 때는 저녁에 나올 요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저녁 식사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맞다. 내일 먹을 요리와 축구 그리고 휴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밤 11시가 되고 볼에 키스를 나누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니갈리아에서 맛 본 셰프 울리아시의 음식도 인상 깊었지만, 안코나에서 경험한 탈리아텔레(tagliatelle), 우르비노에서 맛본 알리오 올리오와 치즈 그리고 송아지 스테이크, 아스콜리 피체노에서 먹은 아스콜라나 올리브(Olive Ascolana) 튀김도 잊을 수 없다. 이 음식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먼저 탈리아텔레. 이 음식은 이탈리아 가정식이다. 우리나라 칼국수처럼 납작한 면으로 만든 파스타의 한 종류다. 라 토레(La Torre)라는 레스토랑의 주방에 들어가 셰프가 탈리아텔레를 만드는 과정을 구경했는데,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선 밀가루에 달걀을 넣는다. 100그램당 달걀 하나. 그 후에는 그냥 열심히 반죽을 치대는 일이 전부다. 마르코(Marco)라는 건장한 셰프는 굵은 팔뚝으로 아주 오랫동안 반죽을 치대는데,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다. 


한참이 지나 마르코는 반죽이 마음에 드는지, 야구 방망이만 한 밀대를 밀며 면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칼국수 만드는 것과 놀랄 만큼 똑같다. 그다음 조리 과정은 이탈리아 스타일. 새우와 조개 등으로 만든 육수를 붓고 알맞게 볶고 조리면 완성이다. 쫄깃한 면발이 해산물 육수, 올리브 오일 등과 어우러져 풍미가 보통이 아니다. “면을 어떻게 하면 이처럼 탄력 있게 반죽할 수 있나요?”하고 마르코에게 물으니 이탈리아 인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당신 어깨가 빠져나갈 때까지요.”


우르비노의 우르비노 리조트(Urbino Resort)에서 맛본 알리오 올리오도 “파스타는 역시 이탈리아야”라는 감탄을 쏟게 했다. 염소 치즈를 살짝 올린 알리오 올리오는 지금까지 먹은 모든 알리오 올리오를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만든 맛이었다. 그리고 13시간 동안 찬물에 담가 부드럽게 숙성시킨 송아지 스테이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입에 들어가자마자 눈처럼 녹아 내렸다. 야생 사과로 만든 잼을 발라 먹은 치즈와 나무 화덕에서 막 구워낸 빵은 이탈리아 여행 내내 도시락으로 배달시켜 먹고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아스콜라나 올리브. 이 음식은 엄청나게 비싸거나 고급 요리가 아니다. 올리브를 튀겨낸 단순한 요리다. 아스콜라나 올리브는 알이 굵기로 유명하고 주로 마르케와 움브리아 지방에서 많이 생산한다. 씨를 빼고 그 안에 쇠고기나 돼지고기, 닭 가슴살, 채소, 토마토, 육두구 같은 것을 버무린 소를 채우고 얇은 튀김 옷을 입혀 튀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이 즐겨 먹은 음식으로, 짭조름한 맛과 고소한 기름 맛이 어울려 중독성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맥주나 와인과 함께 먹어야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마르케를 여행하는 동안 허리띠가1칸은 늘어났는데, 아마도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댄 아스콜라나 올리브 때문일 것이다.


추가 정보

 ▶ 리스토란테 라 토레(Ristorante La Toree) 파스타 12유로 latorrenumana.it

 ▶ 우르비노 리조트 숙박 95유로부터, 리조트 내 레스토랑 우르비노 델 라기(Urbino del Laghi)

 메인 요리 14유로부터 tenutasantigiacomoefilippo.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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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아텔레를 만들고 있는 셰프 마르코. 

올리브를 튀긴 아스콜라나 올리브는 마르케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


마르케에는 우르비노라는 도시가 있다. 주도인 안코나보다 더 유명하다. 우르비노가 유명한 이유는 화가 라파엘로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서양미술의 지존의 자리를 지킨 인물. 1483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자 1504년 피렌체에 입성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에게 작은 도시 우르비노는 우물처럼 좁았고 그는 우물 속 개구리로 살기 싫은 야망에 찬 젊은이였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두 거장이 버티고 있었다. 운이 좋았을까. 라파엘로는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실을 꾸밀 기회를 얻고, 유명한 <아테네 학당>이라는 프레스코화를 그린다. <아테네 학당>은 웅장한 축물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명망 있는 철학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후 라파엘로는 일약 스타로 등극한다. 괴팍하고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사근사근한 성격의 라파엘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르네상스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상냥하고 유쾌하면서도 우아한 사람’이었으며, 라파엘로의 성품은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서 짐승들까지 그를 사랑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미남이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여리고 섬세한 외모의 소유자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길고 섬세한 콧날,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는 턱 그리고 순하고 맑는 눈. 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질투한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라파엘로는 많은 여인을 사랑했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절제하지 않고 연애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가 있었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의 모습을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그러니까 ‘빵집 딸’이라는 제목의 회화로 남겼다. 5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작품 속 여인이 라파엘로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왼팔에 마치 큐피트의 사랑의 리본처럼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서명을 새겼다는 점, 왼손 약지에 은밀하게 반지가 끼어 있다는 점 등은 이 둘이 분명 사랑하는 사이라는 증거. 우르비노 시내에는 14세기에 지은 라파엘로 생가(Casa natale di Raffaello)가 자리하고 있다. 중정을 품은 3층 저택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화구를 놓곤 하던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론 이곳에는 라파엘로의 흉상도 서 있는데, 그 앞에선 여성 관객은 5분 넘게 흉상을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때 전성기를 이룩한 도시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1998년 우르비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아마도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사실 이 도시의 전성기를 이룩한 주인공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da Montefeltro)다. 이탈리아 최고의 용병으로 활약하던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으로 르네상스 초기 궁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지었다. 몬테펠트로는 무식한 용병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이탈리아 역사는 그를 ‘성공한 용병 장군’이 아니라 ‘The Light of Italy(이탈리아의 빛)’로 기억한다. 그는 궁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청했고 수많은 화가와 건축가, 공예가, 조각가가 이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궁전 안에서 라파엘로를 비롯해 ‘회화의 군주’로 불리는 티치아노(Ticiano)의 작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걸작 <세니갈리아의 성모(Madonna di Senigallia)>

등 눈부신 르네상스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추가 정보

 ▶ 라파엘로 생가 입장료 3.5유로, accademiaraffaello.it

 ▶ 두칼레 궁전 입장료 5유로, palazzoducaleurbino.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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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모습을 잃지 않은 우르비노는 1998년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거리 가득한 선율 그리고 위로


지금까지 마르케의 음식과 와인 그리고 르네상스의 미술을 즐겼다. 그렇다면 뭐가 남았을까? 바로 음악이다. 음악을 즐기려면 페사로(Pesaro)에 가야 한다. 우르비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인구가 1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지중해의 바다를 옆에 앉은 이 다정한 도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로시니(Rossini)가 태어난 곳이다. 1792년 페사로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열네 살에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가 첼로와 피아노,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운 곳은 볼로냐 음악 학교인데, 지루한 수업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그너를 기념하는 독일의 바이로이트,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잘츠부르크 등과 같이 음악가를 위한 축제가 열리는 도시가 바로 페사로입니다. 그만큼 로시니에 대한 페사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죠.” 1819년에 설립한 유서깊은 극장 로시니 극장(Teatro Rossini)의 음악 감독인 안토니오(Antnio)는 매년 8월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기간이 되면 전 세계 오페라 마니아들이 이곳 페사로로 몰려든다고 자랑한다. 시내 한편에는 1882년 로시니의 유산으로 세운 로시니 음악 학교(Conservatorio di Musica)도 있다. 학교를 기웃거리다 어느 피아노실을 엿보는데, 호기심 어린 낯선 여행자를 발견한 한 학생이 ‘세비야의 이발사’의 한 대목을 신 나게 연주해준다.


마체라타(Macerata)도 흥미로운 곳이다. 이 도시에 자리한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Arena Sferisterio)은 원래 스포츠 경기장이던 곳을 공연장으로 꾸민 것. 1921년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처음 상영한 이후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오페라 공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92년부터는 한여름에 서너 개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했다. “반원형 구조의 특이한 극장 형태가 음향을 완벽하게 전달합니다. 아무런 음향 장치의 도움 없이도 소리가 2배가 되어 울려퍼지죠.” 이곳의 아트 디렉터 프란체스코 미첼리(Fracesco Mochelli)는 “지금까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해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스페리스테리오의 무대에 앞다퉈 올랐습니다. 한국의 정명훈도 언젠가 이곳에서 공연해주길 바랍니다”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그리고 안코나. 와인과 파스타와 라파엘로와 로시니를 지나 다다른 마르케 여행의 종착지. 마르케의 주도인 안코나는 제법 번화하고 세련된 거리와 산 치이라코(San Ciriaco) 대성당이 있는 곳이다. 커다란 아코디언을 둘러멘 거리의 악사는 피아졸라를 흥겹게 연주하고,나는 거리를 걸으며 티셔츠 몇 장을 산다.


젤라토를 먹으며 오후의 거리를 지나와 부둣가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마르케의 햇빛은 다른 어떤 곳의 빛과도 다르다. 투명하고 찬란하고 거리낌이 없다. 찬란하던 한낮의 햇빛은 저녁이면 불타듯 붉어진다. 손을 대면 델 것만 같다. 저녁의 항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나간다. 부드러운 침묵만 사방에 가득하다.


“부부부부웅~” 하며 커다란 기적을 울리는 크루즈 1척이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간다. 크로아티아를 향해 가는 배다. 뱃전에는 선원인지 여행자인지 모를 한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아마도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는 건 두렵지 않지만, 이런 곳을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건 약간 서글플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쨌든 여기는 마르케이며, 마르케에서 보낸 며칠 동안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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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 planet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 9월 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정이나 비행기 탑승 시간 등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 혼자만 현지에 남는 경우가 생긴다. 이미 오랜 외유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터라 귀국한다는 마음으로 들뜬 사람을 혼자 배웅하는 기분은 썩 좋을 리 없다. 혹시 현지인에게 박대라도 받는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 찢어질 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울 마음이 가득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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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론리플래닛 매거진은 세계 최고의 여행 콘텐츠 브랜드 론리플래닛이 발행하는 여행 잡지입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을 손에 드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까지 꿈꿔왔던 최고의 여행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 영국,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인도 등 세계 14개국에서 론리플래닛 매거진이 제안하는 감동적인 여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9월 [2014]

안그라픽스 편집부5,600원(20% + 1%)

부록 : 책자 1 (책과랩핑) 지구촌 여행지를 다룬 여행전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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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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