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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것보다 세세히 기억하는 게 중요

삶을 사는 비법을 배우는 한 작가 은희경식 기억법, 현재의 길목에서의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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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사건도 사소하지 않았고, 사소하고 세세한 일들을 우리는 인간의 일로 부각시킬 수 있었으리라. 이 세세함은 항상 옳다. 그러니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보다 더 옳다.

다른 도시로 떠나온 나의 여행은, 장소를 바꿔 세상을 경험한다는 뜻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엔 시간을 바꾸어 세상을 살아보는 것에 해당될 때가 많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방은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쪽모이세공의 마루바닥이 ('안나'의 자취방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쪽모이세공의 마루는 길게 세로로 난 무늬가 아니라 빗살무늬의 사각형이 연속적으로 펼쳐진 무늬이다. 이 무늬를 나는 정겨운 무늬라고 표현할까도 생각해 보았고 그냥 옛날식 무늬라고도 표현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옛날식이고 그래서 정겨운 무늬인 셈이다.

 

마룻바닥만이 그런 건 아니다. 수도꼭지도 그렇고, 다락방의 형상을 한 천장이 그렇고, 한쪽 벽면에 난 창문이 그렇고, 전등이 그렇고, TV가 그렇다. 부엌에 걸린 냄비와 프라이팬, 커피잔과 접시에 새겨진 문양에서도 옛날식의 정겨움이 발견된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옛날식의 어떤 것은 정겨움이고 어떤 것은 지겨움인지. 정겨움과 지겨움이라는 정서적 반응은, 실은 옳고 그름을 덜 직접적이고 내성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어떤 것은 언제나 옳기 때문에 정겹고, 어떤 것은 언제나 그르기 때문에 지겹고 나쁘다.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소설이 쓰여질 때에는 이 경계가 꽤 분명하다. 언제나 옳기 때문에 정겨웠던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언제나 그르기 때문에 지긋지긋하고 나쁜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가가 있다. 불러내어 현재의 어리석은 국면을 돌아보는 데에 환기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계몽적이다. 이 때문에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못한다. 경계가 분명한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 삶을 너무 단순한 것으로 몰아세워 쉽게 각성에 연결되려는 경향을 띤다. 은희경의 소설들을 따라 읽으며 내가 가장 행복해하고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경계가 분명한 이야기를 내내 비꼬면서, 경계가 불분명한 이야기 속에 깃든 내면적 진리들을 너무도 선명하게, 게다가 왜곡 없이, 온전하게 복원해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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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식 기억법, 현재의 길목에서의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


기억은 골똘하게 집중할 때에만 가까스로 완성된다. 완성된 기억은 향후 반복해서 상기하는 것으로써 어쩔 수 없이 변형된다. 변형된 기억은 종내는 완고해진다. 섬세함은 유실되고 이데올로기가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은희경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되새김질하듯 소설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쓰여지는 방향에 두터운 진실들을 채워나가기 위하여 기억을 비로소 소환한다. 기억술이 뛰어나서라든가 소중히 기억해오던 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위하여 집필을 시작한 걸로 짐작되진 않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이름이 주어지는 순간에, 캐릭터의 시선을 따라가는 순간에, 캐릭터의 처지를 풍경처럼 바라보는 그 순간에, 마치 빵조각에 모여드는 개미들처럼 기억들이 깨알같이 일렬로 다가와 달라붙는 식이다.

 

은희경식 기억법은, 기억을 기억의 상자 속에서 꺼내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길목에서의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과 같아진다. 그러니 나쁜 기억마저 반갑고 새롭다. 그러니 은희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기억력이 지닌 완고함이나 변형이 전혀 없을 수밖에 없다. 작가에 의해 재단된 어떤 삶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냥의 삶이 있다.

 

문학에 있어서 신선함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단연코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은희경의 이야기는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번번이 가장 신선한 하나의 사건이어왔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안에 들어 있는 단편들은 각각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다른 시간을 만나 다시 삶과 마주치는 같은 이야기들이다. 연작이라고 말해도 좋고, 번번이 다시 쓰여지는 이야기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한 사람이 한 평생 결코 같은 사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소설 속에서 입증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시간을 포함한) 다른 조건에 놓이게 되는 한 인간은 전혀 다른 작품의 전혀 다른 인물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다른 사람들을 겹쳐놓아야 한 사람이 비로소 완성된다.

 

대단한 이야기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확하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또한 정확하다는 의미에서 유일한, 한 사람이 비로소 이 소설집 속에서 삶을 완성해나간다. (미완성이 아니라) 비완성으로써. '단 하나의 눈송이'를 발굴해내는 사이토 마리코의 시에서처럼, 순일하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으로써 단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마침내 시간이 낯설게 소환될 때에 우리가 우리 삶에 미묘한 애착을 장착할 수 있다는 것을 조용조용 알려 준다. 다른 장소를 꿈꾸지만 결국은 다른 시간을 꿈꾸는 일이 여행인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여기에 있는 셈이 된다. 장소를 마치 여행을 떠난 자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 일과 같이.

 

혼자 있는 밤 그녀는 자리에 누워 양과 돼지와 지팡이와 구름을 셌다. 남편이 꿈에 대해 물었을 때 왜 하필 프랑스가 떠올랐는지도 생각해보았다. 집 떠나기를 꺼리던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만약 프랑스에 간다면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기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한 장소에 며칠 머물고 나면 미처 다 풀지도 않은 여행가방을 다시 꾸려 기차를 타고 낯모르는 도시로 이동해가는 것이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해바라기밭과 올리브 언덕과 포도밭, 붉은 지붕의 낮은 집들과 초록색 벌판과 염소떼, 그리고 길고긴 강과 로마시대 다리들, 아담한 시골 카페와 남부 지중해의 푸른 해변에 깔린 검은 자갈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의 크게 뜬 눈동자와 달싹거리는 입술들. 그것들을 바라보다 잠깐씩 졸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동전을 꺼내 계산을 하기도 하고 손수건으로 사과를 문질러 윤을 내거나 우박설탕이 붙은 슈게트를 먹기도 하고 카드를 꺼내 혼자 솔리테어 게임을 하고 다른 여행객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보낸다. 그때에 시간은 기차에 앉은 채로도 저절로 움직여 흘러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中 단편 「프랑스어 초급과정」)

 

언젠가부터 은희경은 나에게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한 작가가 아니라, 삶을 사는 비법을 배우는 한 작가가 되어 있다. '작가의 말'에서 다음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풍경은 늘 그렇게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조금은 다를 것이다. 결국 시간이 개입된다는 뜻이겠지.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었으므로 서툴렀고 어리석었으나, 우리는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다행이었고 기뻤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사건도 사소하지 않았고, 사소하고 세세한 일들을 우리는 인간의 일로 부각시킬 수 있었으리라. 이 세세함은 항상 옳다. 그러니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보다 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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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저 | 문학동네
1995년 데뷔, 등단 20년차인 작가에게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눈송이』)는 그의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이다. 연재를 하고 계절마다 단편을 쓰고, 그것들을 모으고 정리해 책을 내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작가는 그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작품을 쓰고 책을 묶었다. 20년, 작가의 첫 책 『새의 선물』 에 열광했던 이들의 딸들이 자라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드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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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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