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 워 이후 마블을 말하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에도 계속 변화하고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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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휴먼과 외계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거짓말이나 몽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들이 마블 유니버스에 점점 더 많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마블은 『시빌 워』 이벤트를 시작한다. 마크 밀러가 쓰고 스티브 맥니븐이 그린 『시빌 워』는 이후 마블만이 아니라 슈퍼히어로물의 지형을 흔들어놓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전에도 대형 크로스오버는 있었다. DC와 마블의 캐릭터가 함께 등장하는 크로스오버도 있었다. 하지만 『시빌 워』는 단지 규모만 커진 크로스오버가 아니었다.

 

정의를 구현하는 슈퍼히어로와 악의 상징인 슈퍼빌런의 대결만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구도는 이미 해체되고 변형된 지 오래지만 『시빌 워』는 똑같이 ‘정의’와 ‘선’을 추구하면서도 의견이 갈리고 대립하여 결국 극단적인 ‘내전’으로 돌입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무엇이 선이고 정의인지, 누가 동료이고 적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진 세상에 대한 직접적 비유인 동시에 우리가 알던 슈퍼히어로들이 적으로서 싸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렇게 『시빌 워』는 마블 유니버스를 바꾸어 놓았다. 이후 슈퍼히어로들의 내면과 행동을 바꾸어 놓았다. 『시빌 워』는 단지 이벤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블 유니버스의 ‘세계 대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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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는 스탬포드 사건으로 시작된다. 리얼리티 TV쇼에 출연하는 뉴 워리어스 멤버들은 빌런들과 싸우는 장면을 찍다가 거대한 폭발사고를 일으킨다. 무려 600여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슈퍼 휴먼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의회에서는 ‘슈퍼 휴먼 등록법’을 만들게 된다. 슈퍼 휴먼은 누구나 정부에 등록하고 신분을 공개하여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스탬포드 사건 이전에 『시크릿 워』와 헐크의 라스베가스 난동이 있었다. 닉 퓨리가 비밀리에 슈퍼 휴먼을 이끌고 참가했던 비밀작전의 여파로 공격을 당하고 맨해튼 일부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슈퍼 휴먼에 의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자 정부와 여론은 법안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슈퍼히어로들 역시 개인의 입장을 정하고 밝혀야만 한다.


『시빌 워』의 홍보문구는 ‘당신은 어느 편인가?’였다. 아이언맨은 정부와 협조하여 등록법에 찬성하고 주변의 슈퍼히어로들을 설득한다. 스파이더맨도 아이언맨의 설득에 넘어가, 카메라 앞에서 마스크를 벗고 피터 파커임을 밝힌다. 반대파의 리더로는 캡틴 아메리카가 나선다. 미국의 가치를 대변하는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 정부에 반대한다고? 캡틴 아메리카는 과거의 인물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인물. 스티브 로저스는 자유와 정의를 옹호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시스트와 싸웠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그 무엇, 국가보다도 우선한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슈퍼 휴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려 한다. 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캡틴 아메리카이지만 슈퍼 휴먼 등록법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자이지만 기업가인 아이언맨은 반대로 지지해야만 하고. 대립이 격화되면서 토르의 클론이 등장하고, 판타스틱 포 내에서도 입장 차이가 생기고,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슈퍼히어로들이 서로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완벽한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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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는 한권 분량으로 결말이 지어졌지만, 여파는 끝없이 이어졌다. 『시빌 워』 본편과 연결된 공식 외전만도 40여 타이틀에 이른다. 『시빌 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빌 워: 아이언맨』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 등으로 이어지는 외전은 각 캐릭터들이 ‘시빌 워’ 전후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이언맨이 왜 지지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스파이더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편을 바꾸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아직 국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키는 엑스맨의 이야기인 『엑스맨:시빌 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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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는 이후에 나오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에 큰 영향을 끼친다. 『스파이더맨 백 인 블랙』은 등록법에 찬성하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지만, 입장을 바꿔 반대파에 가담한 스파이더맨이 난국에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숙모가 총에 맞아 생명이 위험하자 스파이더맨은 과거에 입었던 검은 코스튬을 입는다. 그것은 곧 ‘살인’까지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민의 좋은 친구인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당신들에 맞서 싸우고 때로 죽일 수도 있다는 처절한 선언.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은 시빌 워 직후에 법정에 출석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누군가 암살하는 사건을 그린다. 그리고 윈터 솔져가 되었던 스티브 로저스의 절친 버키가 대신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시빌 워’는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9.11처럼 이후의 모든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놓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시빌 워』의 성공으로 마블은 블록버스터급 크로스오버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파괴력 있는지를 절감했다. 그리고 『시빌 워』가 변화시킨 마블 유니버스를 더욱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워런 엘리스와 마이크 데오타토 주니어의 『썬더볼츠』는 슈퍼 휴먼 등록법에 반대하는 슈퍼 휴먼들을 잡아들이는 법집행기관 ‘썬더볼츠’의 이야기다. 그런데 ‘썬더볼츠’의 국장은 스파이더맨의 숙적인 ‘그린 고블린’ 노만 오스본이고 구성원은 빌란인 베놈, 불스아이, 송버드, 소드맨 등이다. 선한 슈퍼히어로들을 잡아들여 감옥에 보내기 위해 악당들을 고용한다. 합법의 이름으로 진행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빌란들의 마음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대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국가에 충성, 아니 요구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떤 악행도 합법화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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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 헐크』의 헐크는 어벤져스 동료들에 의해 우주 끝으로 보내진다. 지구 전체를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제어가 불가능한 힘이기에 격리시켜 버린 것이다. 먼 행성에 도착한 헐크는 검투장의 영웅이 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월드 워 헐크』에서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지구로 돌아온다. 자신을 버린, 과거의 동료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마크 밀러는 『시빌 워』에서 ‘9/11 이후로 자유보다는 안전함을 선호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것이 가능해진 사회. 사회의 상식적인 규범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슈퍼히어로에게 변화한 세계는 그 자체로 위협이었다.

 

반면 엑스맨은 『시빌 워』가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없었다. 이미 엑스맨은 ‘차별’에 익숙한 존재다. 슈퍼 휴먼이 아니라 뮤턴트 등록법안은 끈질기게 시도되었고, 차별과 박해에 의해 뮤턴트가 사라진 미래세계도 등장했었다. 그러니 엑스맨이 ‘시빌 워’에서 중립을 지킨 것도 이해가 간다. 시빌 워에 참가하지 않은 엑스맨에게는 새로운 이벤트가 있었다. 『엑스맨: 메시아 콤플렉스』, 『엑스포스/케이블: 메시아 워』, 『엑스맨:세컨드 커밍』은 뮤턴트의 멸종을 막기 위해 유일한 희망인 ‘메시아’를 구하는 스토리다. 사이클롭스의 아들인 케이블이 메시아를 구할 엑스맨으로 발탁되어 시간을 넘나들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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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시아를 없애려는 센티널 바스티온, 윌리엄 스트라이커와 퓨리파이어가 계속해서 뒤를 쫓는다. 『엑스맨:세컨드 커밍』에서는 호프와 케이블이 현재로 돌아오고, 엑스맨을 말살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 엑스맨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태어날 때부터 시작했다. 뮤턴트가 절멸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리더가 된 사이클롭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들을 미래로 보내기도 하고, 살인까지 감행하는 특수부대 엑스포스도 만든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이건 생존의 문제이니까.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에도 계속 변화하고 확장된다. 이제는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까지 연결되어 더욱 광활해졌다. 아직 영화와 드라마에서 ‘시빌 워’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9.11 이후에 변화한 세계를 이미 <아이언맨3>『캡틴 아메리카:윈더 솔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슈퍼 휴먼과 외계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거짓말이나 몽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들이 마블 유니버스에 점점 더 많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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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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