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택광의 영어로 철학하기
It is not your business와 자유주의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 개인의 자유
우리는 변화무쌍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계를 발명하고, 그 기계들은 더 나은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된다. 우리는 정치, 교육, 심지어 도덕에서도 개선을 염원한다.
영어가 어떤 사고방식을 통해 작동하는지 명쾌하게 알 수 있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It is not your business”가 아닐까. None of your business 라고 말하기도 하고, 한국어로는 “네가 알고 싶어할 필요 없다” “네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로 번역된다. 즉 받아치는 뉘앙스를 지닌 말로서 한 마디로 “관심 꺼”하고 쐐기를 박는 말이다.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에 business가 들어있는 것일까. 더구나 business가 왜 ‘알다(know)’나 ‘관심 갖다(concern)’라는 뜻과 관련 있는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상하지 않은가. 그냥 영어니까 그렇게 쓰는 건가. 이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도 없고 이유 없는 business도 없는 법이다.
일단 business라는 말부터 보자. 그렇다. 한국어로 ‘비즈니스’ 라고 쓰는 그 말이다. 사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업’이라고 한국어로 옮겨놓으면, it is not your business라는 말은 더 이상하게 들린다. 그건 네 사업이 아니라니. Business라는 말의 어원은 busy와 같다. 바쁘다는 말이다. 이쯤 말하면 감이 온다. ‘아, busy가 바쁘다는 말이니까 business는 ‘바쁜 것’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매사가 이렇게 잘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크게 틀린 추측은 아니지만, 아귀가 잘 맞다고 하기도 어렵다. 먼저 ‘바쁘다’의 한국어 의미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바쁘다’를 ‘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인하여 딴 겨를이 없다’로 풀이해놓고 있다. 여기에서 ‘겨를’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어로 busy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신경 쓰다’ 또는 ‘걱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business와 별반 관계가 없다. 물론 열심히 일하면 ‘딴 생각’을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business는 busy의 원래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후일 네덜란드어의 영향으로 ‘계속 고용되어 일한다’는 의미가 추가되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계속 고용되어 일한다’는 의미와 “관심 꺼”라는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기에 “it is not your business”가 가능하단 말인가. Busy라는 말에 곁가지가 있다는 것이 실마리다. Busy에 포함되어 있던 ‘신경 쓰다’ 또는 ‘걱정하다’가 발전해서 ‘신경에 거슬리다’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그러니까 까마득한 옛날 16세기 무렵에 영국인들은 busy라는 말을 ‘신경 쓰이게 만든다’라는 뜻으로 썼다. 이때 busy는 나쁜 뜻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을 뜻하는 business에 밀려 busy라는 단어에는 ‘바쁘다’는 뜻만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남의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사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오지라퍼’를 뜻하는 busybody다.
이제 명확해졌다. It is not your business 라고 할 때, 이 business는 한국어로 사업이라고 번역되는 그 말과 같은 게 아니다. 이 표현에 등장하는 business는 busybody에 쓰인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이 말은 “너 따위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깔보는 뉘앙스를 포함하게 되었다. Business라는 말도 변천을 거듭했는데, 15세기에 직업을 뜻하다가 18세기에 오면서 상업적인 거래, 무역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는 business야말로 영어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사례다. 왜 그런가. 영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나’다. 이 '나'는 개인의 단위이자 결코 침범 당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다. 너와 내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 그 다른 것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명의 진보에 합의하고 들어가는 영어의 사고방식이다. 『자유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진보와 개인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물질의 진보가 개인성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했다. 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변화무쌍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계를 발명하고, 그 기계들은 더 나은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된다. 우리는 정치, 교육, 심지어 도덕에서도 개선을 염원한다. 물론 이런 개선의 생각은 다른 이들을 우리만큼이나 선하게 만들기 위해 설득 또는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에 반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역사상 누구보다도 우리가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스스로에게 아첨한다.
우리가 전쟁을 선포한 상대는 개인성이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어슷비슷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룩한 경이로운 업적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유형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깨닫고 타인의 우수성에 주목하거나, 아니면 둘의 장점을 합쳐서 둘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따져보게 만드는 중요한 동기다. ( 『자유론』中 일부 발췌 )
밀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자유주의 중에서도 공리주의를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그의 면모를 짧은 인용문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공리주의는 경제 제도를 제대로 갖추어서 물질적인 만족만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다면 만사형통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사회적인 부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분배의 문제를 정치의 핵심으로 간주했던 이들도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경제였다. 경제를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 이를테면 공리주의적인 기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밀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공리주의적 기획이 누락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다.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을 생각해낸 제레미 벤담처럼,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고유한 자유를 잠시 구속해서라도 설득과 강제를 통해 번듯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야한다는 것이 정통 공리주의의 주장이지만, 밀은 이런 생각이 우리 모두를 '어슷비슷한 존재'로 만들고 있음을 경고한다.
물질적인 진보가 다양성을 압살할 수 있다는 밀의 생각은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너도나도 소비자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당신만을 위해 만들었습니다’라고 광고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소비자가 똑같은 상품을 구매하여 어슷비슷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서, 동일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때 중학생들 사이에서 ‘등골브레이커’라고 불렸던 값비싼 아웃도어 재킷이 있다. 이 재킷을 입지 않으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례는 밀이 염려한 물질적인 진보의 디스토피아를 제대로 보여준다. 상품이 인격의 품위를 결정하는 이런 전도현상을 밀은 이미 예측했던 것이다.
영어의 사고방식으로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그 자체가 무례한 일이다. “무례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상대방에게 쏘아 붙이는 것은 말 그대로 상대방을 확실하게 비난하는 행위다. 개인을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보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영어를 통해 형성된 삶의 규범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한국에서 만난 한 캐나다 친구는 처음 만난 한국인들이 대뜸 미국인이냐고 묻는 것에 짜증이 난다고 했다. 한국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작가인 마가렛 애트우드도 젊은 시절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들이 미국인이냐고 물었는데, 번번이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짜증나 나중에 그냥 그렇다고 응대해버렸다는 일화를 자서전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애트우드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이 미개해서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신성불가침으로 믿는 영어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묻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받아들이게 한다. 말하자면, 언어에 배어 있는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언어행위의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폭력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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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이택광, 철학, 영어철학,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저/<박홍규> 역9,000원(10% + 5%)
오랫동안 ‘자유’를 체제와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아온 한국 사회에서 『자유론』이 갖고 있는 ‘고전’으로서의 가치와 ‘원리’로서의 가치를 탐색하면서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긴요한 과제인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지방자치, 그리고 교육자치 등의 문제를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