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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되는 살인사건, 연극 <날 보러 와요>
한 공간에 담아낸 그날의 사건 오늘도 “날 보러 와요”
1986년부터 1991년 동안 화성에서 벌어진 무참한 연쇄 살인사건.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날의 살인사건은 아직도 이야기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뉴스가 그날의 일을 시간의 더께로 묻고 덮으려고 해도, 매년 다시 기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연극 <날 보러 와요> 덕분이다.
1986년부터 1991년 동안 화성에서 벌어진 무참한 연쇄 살인사건.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날의 살인사건은 아직도 이야기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뉴스가 그날의 일을 시간의 더께로 묻고 덮으려고 해도, 매년 다시 기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연극 <날 보러 와요> 덕분이다.
아직도 무대 위에서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한 편의 연극이, 예술이 팩트를 전달하는 뉴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물론 이 연극이 그때 벌어진 사건사고를 세세하게 전달하거나 범인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남긴다.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 문제나 사건사고를 소재로 삼은 연극, 영화도 많다. 하지만, 연극이라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관객을 끌어들이게 할 만한 연극적 재미를 갖춰야만 한다. 그래야 계속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날 보러와요>는 진정한 미덕을 갖춘 작품이라고 꼽을 수 있다. 내용이나 의미는 둘째치고, 정말 재미있고, 맛깔스러운 연극이기 때문이다.
지난 19년 동안 이 연극이 무대 위에 몇 번이나 올랐음에도, 이 연극이 훌륭하다는 풍문을 숱하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보러 가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망설이고 있을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고 소식으로, 지하철 사고 소식으로 연이어 마음 아픈 뉴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눈에 띄는 요즘, 아니 그런 사고 소식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일상에 치이는 삶에서 이런 무겁고 어두운(이라기보다는 어두워 보이는) 연극을 보러 발걸음을 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번이나 거듭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면서도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연극이 정말 놓치기 아까 운 작품이라는 거다. 왜 사건이 끝난 지금까지, 그토록 무거운 사건임에도 아직까지 무대 위에 오르고 관객의 사랑에 받을까. 그 이유는 무대 위에 있다. 연극을 보며 섬짓 놀래기도 하고, 이어지는 난감한 상황 속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믿기 어렵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이 웃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행여나 누군가 이 연극 포스터의 컬러 때문에 놓칠까 봐 노파심에, 이 글을 쓰는 셈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 원작, 영화와는 또 다른 무대만의 맛깔스러움
연극 <날보러와요>는 1986년부터 1991년. 화성군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10여 차례에 이르는 강간, 살인사건이 벌어졌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아, 범인이 화성에서 왔다는 얘기가 떠돌 정도였다. 억울하게 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던 용의자도 여럿이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작가 김광림은 여러 명의 용의자를 한 사람이라고 설정한 뒤, 이 묵직한 사건을 희곡으로 그려냈다.
당시에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던 이 작품은 초연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다가,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각본, 배우들의 호연, 좁지만 무궁무진 깊어질 수 있는 무대의 맛을 잘 살린 연출 덕에 1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많은 관객의 발걸음을 끌어들이고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날보러와요>는 신인감독 봉준호를 영화팬들에게 인지시킨 작품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기도 하다. 10차례에 거친 살인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뒤쫓는 형사의 이야기가 한 무대에 담길 수 있을까? 물론 연극이 먼저 창작되고 이를 영화로 만들었지만, 영화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과연 한 무대 위에 그렇게 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담길 수 있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무대는 오롯이 경찰서 사무실로 꾸며져 있다. 무대 전환은 없다. 이 작품이 사건의 현장보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범인을 쫓고 추적하려는 형사들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테다. 과연 이 좁고 한정된 무대가 배우들의 어떤 말과 움직임으로 얼마나 넓고 깊은 공간으로 확장될 것인가? 무대 앞에 앉으니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네 명의 형사가 등장한다. 두어 달을 넘지 못하고 반장이 갈아치워 지고 있음에도, 직접 해결해보겠다고 서울에서 자원해 내려온 김반장, 매일 클래식을 즐겨듣는 엘리트 시인 지망생 김형사, 시골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푸근한 외모의 지역 토박이 박형사, 무술 9단에 성질이 불같은 조형사가 무대 위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여기에 쑥다방에서 커피를 나르는 미쓰김과 경기일보의 열혈 박기자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생략된 캐릭터인 미쓰김은 시인을 우러러보는 소녀 같은 아가씨로 김형사와 멜로 라인을 만들어나간다. 열혈 박기자 역시 조형사와 거래인 듯 사랑인 듯 알쏭달쏭한 연애 관계에 놓여있다. 이런 인물들 간의 관계가 극 속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그날의 사건을 보여주고 오늘의 우리를 말하는 무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게 이 연극의 주된 이야기이자 인물들의 목표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건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대한민국, (이 말이 거창하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시골에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아무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인의 체모라도 찾아내려고 현장의 흙을 파 와서 돋보기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근처 목욕탕을 뒤지며 무모증의 남자를 수색하는 등 원초적인 방법도 마다치 않는다.
이렇게 밤을 새워가며 범인을 쫓는 형사들 위에는 책상 앞에서 명령하는 서울의 상사들이 있다. 잘못 나간 신문이나 책상 위로 올라오는 보고서만 받고 판단하는 상사들은 오히려 형사들의 수사를 방해할 뿐이다. 박기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취재한 내용이 데스크에 의해 엉뚱하게 보도되면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또 기자의 권위로 공무원에게 인사권을 휘두르기도 한다.
당대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보를 내거나, 주류 정치에 묻어가는 기사를 쓰는 언론의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 비추어봐도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늘날 참사를 불러온 비극의 씨앗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느꼈다. 그날의 사건을 보여주고 오늘의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 연극 <날보러와요>를 통해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됐다.
"인간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사표 써야 할까 봐요"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범인을 잡으려고 고군분투하는 형사들이다. 그들의 목적이 범인을 잡는 것이라면, 무대 위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이 작품은 그들의 열정이, 범죄를 막고 싶다는 간절한 투지가 서서히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 하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은 무력감. 그건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여느 드라마나 헐리우드 영화처럼, 무조건 해피 엔딩을 보장해놓고 달려가는 작품은 아니다. 형사들 역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끔찍한 범죄에 몸서리치고, "인간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사표 써야 할까 봐요"라고 직업에 회의감까지 느낀다.
이건 이런 끔찍한 사건뿐 아니라, 어려운 일 앞에 놓인 사람들이 으레 읊게 되는 친숙한 대사다. 무대 위에는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라는 특별한 직업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무대에서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사회 풍경, 그리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모습- 매일매일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애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범인도 잡히지 않아 영원한 미스터리로 사라진 연쇄 살인사건. 작가는 왜 이걸 연극으로 만들었을까? 그 당시에는 공소시효라도 있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효과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연이은 용의자 검거에 실패하다 보면, 형사뿐 아니라 관객들 역시 제발 이 지루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이게 실제 사건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도, 결과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참한 뒤쫓기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 형사들을 응원하게 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관객은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연극이 선사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의미를 떠나, 연극적으로 관객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연극에 몰입하고 빠져드는 게 단순히 배꼽 잡는 웃음이나 예상치 못한 반전 같은 장치 말고, 이렇게 살아있는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이야기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날 보러와요>는 보여준다.
지난번에 이어 김반장 역할을 맡은 손종학은 극 중 가장 고참으로, 영화 <살인의 추억> 송강호와는 다른 캐릭터지만 무게를 잡고 웃음과 비극의 균형을 잡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감수성 넘치는 김형사 역의 이원재, 주먹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 조형사 역의 조태일, 시종일관 푸근한 리액션으로 유머를 담당하고 있는 박형사 역의 서성중은 그야말로 리얼한 생활연기로, 진짜 어디선가 볼 수 있을 법하다 싶을 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극이 실감나면서도 유쾌하게 관객들을 잡아끄는 데에 배우들의 열연이 톡톡히 제 역할을 해낸다.
하 수상한 시국. 지금과 머지않은 시간, 한 시골동네의 고군분투가 어쩐지 위로가 된다. 절망 속에서 희망 따위의 낯간지러운 이야기보다 더욱 절절하게, 우리 각자의 몫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들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군분투가, 우리의 안간힘이 헛된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연극 <날보러와요>는 6월 1일까지 혜화역 아트센터K 세모극장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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