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사는 힘으로 누군가가 위안을 받거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스무 살 때 힘들었던 시기를 선후배들의 많은 도움으로 이겨내고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관객이든 후배 배우든 누구에게나 선한 기운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그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10년 가까이 공연을 취재하면서 기자에게는 기억에 남는 인터뷰 장소가 몇 군데 있습니다. 기억에 남았다 함은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은 곳이겠죠. 배우 정한용 씨의 차를 타고 대학로에서 여의도까지 이동하며 인터뷰한 적이 있고, 김중성 씨를 객석에서 만났으나 무대 공사 때문에 복도로 자리를 옮겨 30분 넘게 서서, 트랜스픽션 멤버들을 롤링홀의 발 딛을 틈 없는 통로에서 역시 서서 인터뷰한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사롭지 않은 장소입니다. 기획사 담당자가 배우에게 알리러 간 사이, 한 남자가 들어서다 기자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남자 탈의실에 여자가 정자세로 앉아 있으니 놀랄 만도 하겠죠.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 연습 중인 이정열 씨를 만나러 왔다고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이 탈의한 바지가 나뒹굴고 샤워실의 습한 공기가 가득한 이 공간을 떠돌고 있네요.
“피곤한 건 사실인데 몸이 움직여지고 아침에 눈이 떠지는 걸 보면 좋은가 봐요. 다른 작품들도 소중하고 귀중하지만 이 작품은 그냥 제 몸이 좋아하네요.”
기자는 전날 ‘막공’이 다가오고 있는 뮤지컬 <카르멘>을 봤는데, 이정열 씨가 시장으로 나오더군요. 휴일까지 공연에 계속되는 연습. 너무 힘들지 않을까 물었더니 작품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고, 못 풀어낸 이야기잖아요. 우리 이야기인데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걸 무대 위로 끄집어내는 거니까, 배우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까지는 아니어도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제가 맡은 베르사미라는 인물이 좀 세요. 작품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자’라고 마음먹은 다음부터는 얘가 제 안에서 다른 걸 못하게 막고 있어요.”
인터뷰에 앞서 영화를 다시 보려다, 어차피 독립된 작품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습니다. 원작이 따로 있는 경우 배우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때그때 다른데,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안 보는 편이에요. 라이선스 작품도 요즘은 자료가 많은데, 스스로 정돈이 되기 전까지는 찾지 않아요. 무대라는 공간은 판타지이고 상상의 공간인데, 어떤 정형화된 그림이 접해지는 순간 내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제약을 받을 것 같거든요. 관객들도 영화와 분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분명히 다른 작품이고 다른 장르니까요.”
몸이 저절로 반응할 만큼 좋다고 했으니 작품 자랑을 좀 하시면 저절로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의 매력이 드러날 것 같습니다.
“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열심히 준비했고 정말 좋다고 말하는데, 이번 무대는 그런 말을 잘 못하겠어요. 예쁜 여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멋진 남자배우들은 많지만(웃음) 대부분 유부남이고, 무대장치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음악도 5인조 기본편성이고. 사실 ‘우리 이렇다’라고 보여줄 카드는 없어요. 다만 제가 70년을 산다면 70가지 파이 중에서 2014년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함께 무대에 올렸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인생에서 1/70이 작지는 않을 텐데, 그런 마음으로 준비했고, 제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그래서 분단을 다룬 콘텐츠는 많지만, 기자를 비롯해 정작 국민들은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 아버지도 피난민이셨어요. 60여 년 전 제 아버지는 개성 아래 시골에서 친구들과 놀았고, 할아버지는 경기도 광주까지 장사를 하러 다니셨고요. 이게 통일 전의 베를린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가 앉아 있는 곳에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잖아요.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것은 사실이고 전적으로 우리 세대의 책임이죠. 그래서 더 잘 풀어내야겠다는, 많은 어른 중의 한 명으로써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데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할 것은 아니라고 봐요. 친구끼리도 화해하는 데 오래 걸리고 편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토라진 마음을 돌려세울 아주 작은 기운, 공연을 보신 분들이라도 이게 공상 속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초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영화와 가장 달라진 틀, 바로 이정열 씨가 맡은 베르사미 소령입니다. 여성 장교를 남성으로 바꾼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에서는 이영애 씨가 맡았는데, 그래서 농담 삼아 ‘산소 같은 남자’라고 말합니다만, 원작 소설에서는 남자예요. 그것도 영화감독의 연출이겠죠. 여자 장교가 등장함으로써 좀 더 유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그 베르사미의 아버지는 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서 결국 제3국으로 가죠. 남북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경계인이 됐고, 그 경계인이 유럽 여인을 만나서 생겨난 아이. 그 남자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복잡 미묘하겠어요. 작게 보면 이 남자의 정체성 찾기이고, 정체성을 찾다 보니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말도 안 되게 친형제 간에 총을 겨누는 상황이 고착화되고 있는 거죠.”
지그 베르사미까지 모두 16명의 배우가 남자. 거기에 무대 감독과 조연출 등도 모두 남자라고 합니다. 여자 스태프들은 냄새가 난다며 연습실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말도 있던데요.
“칙칙하죠. 그 작품을 여대에서 연습하고 있어요, 모순이죠. 남자들끼리만 있어서 편하고 좋은데 재미는 없어요. 연습실 나오는 에너지도 떨어지고(웃음). 남자 배우들로만 구성됐고, 화려한 쇼 뮤지컬도 아니고, 다분히 연극적인 음악극 형식이지만 관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드릴 자신은 있네요.”
이정열 씨는 내년 상반기까지 공연 스케줄이 잡혀 있습니다. 2012년 말 위암 수술 이후 지난해 봄부터 쉬지 않고 무대에 서고 있는데, 건강에 무리는 없는지 걱정입니다.
“상태가 가볍지는 않았는데, 깊은 대신 넓지는 않아서 수술이 잘 됐어요. 암 수술 받은 환자들이 이후 1년이 가장 힘들고, 2년이 지나면 나름 안정기라고 하는데, 천만다행으로 저는 지금 항암치료도 거의 없는 상태에요. 항암치료 때는 힘들어서 살이 20kg이나 빠지더라고요. 그렇게 못 끊던 담배도 안 피게 되고. 무엇보다 이게 배우로서 큰 은혜라고나 할까, 무대에서 놀고 움직이다 보니까 몸이 좋아지네요. 일을 하면서 받는 격려와 관객분들의 박수가 가장 큰 치료제인 것 같아요.”
<카르멘> 커튼콜 때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차지연 씨 뒤로 후배들보다 신나게 춤추는 이정열 씨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대에 서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듯한 모습이랄까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수술날짜를 받아놓고 <아이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동료들에게 ‘수술 잘 하고 올게’라고 말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병실에서 창문을 여는데 공연장이 보이더군요. 미치는 거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신기해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동네 한 바퀴도 잘 못 걸었는데. 어렸을 때 이후로 기도라는 걸 해봤어요. ‘다시 걷고 무대 위에 서게 해 준다면…’ 무척 감사하고 고맙죠. 그래서 그런가 무대에 서는 게 참 좋아요.”
이정열 씨는 붉어진 눈시울로 쉽게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위로에 약한 기자는 손수건을 건넬 생각도 못하고 함께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다만 무대를 즐기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런 마음들이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났구나’ 생각했습니다.
“왜 이러냐 갑자기(울다웃다^^;)… 저한테는 중요한 계기였고, ‘참 건방지게 살았구나’ 반성도 많이 했죠. 사실 저도 모르게 나태해진 건 사실이에요. 관성으로 무대에 서고 치열하지 못하고, 관객들에 대한 예의보다 자존을 우선시 하고… 이런 걸 싫어했는데 비슷해져 있더라고요.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고, 그래서인지 이제 무대마다 늘 떨리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인터뷰 분위기가 무겁거나 심각한 것은 아니에요!) ‘그대 고운 내 사랑’ ‘첫사랑’ 같은 고운 노래들도 많은 팬들이 좋아했습니다. 가수 이정열 씨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는 걸까요?
“다시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것처럼 노래하는 게 싫을 때가 있었어요. 가요판의 모습도 싫었고, 실질적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조건도 안 됐었고. 그러다 뮤지컬과 연극 쪽에서 손을 내밀어 주셔서 일하게 된 건데, 이제는 가수로서도 좀 편안하게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겨울쯤 준비해서 내년에는 오랜만에 앨범이 나올 겁니다.”
고비와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곤 하는데, 2014년 2월 이정열 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사는 힘으로 누군가가 위안을 받거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스무 살 때 힘들었던 시기를 선후배들의 많은 도움으로 이겨내고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관객이든 후배 배우든 누구에게나 선한 기운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그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는 2월 27일부터 4월 27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됩니다. 개막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연습도 강행군, 점심시간을 쪼갠 인터뷰라 기자는 이정열 씨와 욕심껏 시간을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위 건강에는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아쉽지만, 이 순간 좋은 기자 대신 좋은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로 합니다. 이정열 씨가 ‘요즘 커피를 다시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굉장히 좋다’고 하더군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터뷰였습니다. 개인의 삶도, 우리 민족의 분단도. <공동경비구역 JSA>를 북한에서도 공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단 잘 만들었는지, 남한에서 먼저 보시죠!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빈자의 미학' 승효상 건축가가 마지막 과제로 붙든 건축 어휘 '솔스케이프’. 영성의 풍경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 사유하고 성찰하는 공간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이기에, 스스로를 어떻게 다듬으며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여정은 담담한 울림을 선사한다.
‘이기주의 스케치’ 채널을 운영하는 이기주의 에세이. 일상의 순간을 담아낸 그림과 글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소재를 찾는 것부터 선 긋기, 색칠하기까지,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인생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그림과 인생이 만나는 특별한 순간을 마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