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러시아의 진정한 술꾼들을 만나러 가다 - ‘보드카’

무미(無味)의 술이 지닌 미학 KGB요원들과 한 잔 했던 비밀스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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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맛도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마시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거죠. 자기 감정이 이입되는 술이라고나 할까요.”


2011년 7월 러시아 남서부의 끄트머리, 캅카스에서 유럽의 유목민 발카르족을 취재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자동차로 1,700킬로미터. 이틀 동안 길 위에서 숙식과 샤워를 해결해야 했던 이 고달픈 여정은 캅카스 산맥을 무대로 활동한 유럽인의 원형을 찾아온 길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진정한 러시아의 술꾼들을 만나러 온 길이기도 했다.

최근 몰도바, 체코, 헝가리 등의 약진(?)으로 1인당 주류 소비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긴 했지만, 음주로 인한 사망률 면에선 여전히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굳이 뉴스나 기사를 볼 필요는 없다. 그들이 마음먹고 술 마시는 모습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2004년 러시아의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여행한 적이 있었다. 승객 한 명이 무료함을 느꼈는지 머리 위 선반에서 보드카 한 병을 꺼냈고, 아주 자연스럽게 옆사람에게 권하기 시작했다. 술잔이 돌아가는 범위는 점점 넓어졌는데, 조금 소란스럽긴 해도 정겨움이 느껴져서 슬며시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일어나서 휘청거리는 몸으로 복도를 서성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강권했다. 그때까지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보여주던 러시아 승객들의 얼굴도 살짝 찌푸려졌고,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누가 불러서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에로플로트 항공의 스튜어디스들은 승객 따위가 부른다고 오는 사람들이 절대 아니니까!). 금발에 차가운 표정이 어딘지 비밀경찰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그 스튜어디스는 술 취한 승객의 한쪽 팔을 꽉 잡고 뒤쪽의 비상구 앞 공간으로 데려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국 같으면 당장에 ‘무개념 알코올 승무원녀’로 SNS 공간을 장식할 만한 일이었을 테지만, 그 모습에 동요하거나 이상하게 보는 러시아 승객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실을 오가느라 그들 앞을 지나치며 자연스레 보드카를 한 잔씩 받아 마시거나, 잠깐 이야기를 거들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러시아 사람들도, 그리고 아에로플로트 항공 스튜어디스도 그 정도는 아닐 테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술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다.

2011년, 다시 러시아를 방문하며 보드카를 맛볼 수 있단 생각에 들뜨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캅카스의 산골마을로만 돌아다녀야 하는 여정은, 순박한 시골사람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하루 최소 다섯 잔 이상 보드카를 받아 마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나중에 생각해보니 다섯 잔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캅카스 사람들에게 보드카는 ‘마음’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그들은 기쁨도, 슬픔도, 환대도, 정성도 모두 보드카로 표현한다. 하물며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잔에 가득 따른 보드카 석 잔을 마시고 나서야 이제 슬슬 인사말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캅카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선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결혼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건, 연령대별로 차려진 테이블에 앉아 서로 건배를 제의하고 잔을 비우는 일이다. 어느 자리에서든 되도록 환영받는 손님이 되어야 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의 숙명상, 애써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신랑 신부가 잔칫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신 보드카만 벌써 한 병이 넘어가고 있었고, 취재를 마치기까지 그만큼을 더 마셔야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출연자와 손을 맞잡고, “알지? 한국인은 정신력이야!”라며 서로를 노려보지 않았다면 진작에 테이블 밑에 뻗은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다. 같은 보드카라도, 맛이 점점 달라진다. 처음 이 마을에 와서 긴장이 덜 풀렸을 때 마셨던 맛은 씁쓸했고, 촬영하느라 몸이 한창 힘들었을 때의 맛은 묵직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후의 맛은 희미하지만 분명히 단맛을 내고 있었다.

보드카는 밀, 보리 등의 곡류나 감자로 만든다. 러시아에서는 밀로 만든 보드카가 가장 흔하다. 보드카 제조의 특징은 자작나무나 숯을 이용한 여과 과정에 있다. 알코올 증기가 숯과 모래가 들어있는 증류탑을 통과하면서 모든 향미 성분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드카는 무색, 무미, 무취인 것을 최고로 친다. 일반적인 술로서는 매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보드카는 칵테일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베이스가 된다. 함께 들어가는 재료의 맛을 가리지 않으면서 술로서의 중량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 맛도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마시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거죠. 자기 감정이 이입되는 술이라고나 할까요.”


러시아에서 10년을 보낸 출연자 박정곤 교수(고리키 대학 동양학부의 교수)의 이야기다. 결혼식 다음날, 양떼를 쫓아 해발 2,000미터 산속을 헤매 다니다가 텐트를 쳐놓은 곳으로 돌아오니 낯선 사람 두 명이 와있었다. 박 교수가 귓속말로, “KGB예요.”라고 속삭인다. 지금은 FSB(연방보안청)로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공산주의 시절부터 악명이 높던 정보기관의 요원들이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 두메산골까지 몸소 사찰을 나왔던 것이다. 정보력을 떠나 그 성실한 업무처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반 노숙자 분위기의 외국인들이 양떼나 쫓아다니고 있고, 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에서 현지의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러시아 외교부의 허가를 받고 들어온 팀이라고 한다. 이내 경계심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둘 중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부하를 시켜 뭔가를 내민다.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그려진 보드카 한 병이다.

“제법 괜찮은 보드카요. 아무쪼록 우리 지역을 잘 좀 소개해주시오.”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있었던 정보기관 요원들은 그렇게 총총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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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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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탁재형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정훈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더 이상 어디 틀어박혀 공부하는 게 신물이 나 외주제작사에 들어갔다가, 호랑이 같은 감독님을 만나 박박 기면서 방송을 배웠 다. 때려치울까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술힘으로 버텼다는 소문이 있다.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SBS 모닝와이드>, <KBS 영상앨범 산>,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프라임 - 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다. 현재는 해외콘텐츠 전문 프로덕션 ‘김진혁공작소’에서 다큐멘터리 PD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행 많이 하니 좋겠다’며 부러워하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시청률이라는 굶주린 양떼를 몰고 아이템의 초원을 찾아 떠도는 생계형 유목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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