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을 소재로 한 영화 < I'm Not There >에서는 그의 삶과 음악을 줄기로 7가지의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한데 덧놓는다. 음악적 변신으로 비난받는 뮤지션, 인기 포크 록커, 가스펠 가수의 모습은 대중이 알고 있는 외형을 그려낸다. 은퇴한 총잡이와 시인, 음악적 스승을 그리는 모습은 모든 영감의 원천을 위시하는 또 다른 자아를 표현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를 연기하는 밥 딜런은 그가 아니면서도 그를 닮아있는 미묘한 인상을 새긴다. 작품 속에서는 끊임없이 변화시켜온 자신의 초상을 비춰내지만 결국 누가 ‘진짜 그’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 ‘밥 딜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다면, 아마 밥 딜런 같은 사람이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 밥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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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스타의 삶이 그렇다. 공적이거나 사적인, 혹은 환상적 인간의 일면을 하나의 ‘자신’으로 이미지화해 그 삶을 산다. 그리고 팬들은 다중(多衆)의 그들 중에서 ‘영웅화된 이미지’로만 기억 하고자 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다. 미국 대중음악의 현자(賢者)인 밥 딜런도 자아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서나 음악계에서나 ‘하나’로 수렴되지 못한 까닭이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다수의 음악 애호가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우상들의 수많은 ‘설(說)’은 마치 우화나 전래 동화처럼 전해져 왔을 뿐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당시의 삶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와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 뮤지션 ‘존 메이어’라는 인물 말이다.
우선은 그는 ‘우월한 외모’를 지닌 남자다. 191cm의 훤칠한 키와 매력적인 마스크는 물론 왼팔을 휘감은 화려한 타투와 소박하지만, 자신의 매력을 어필 할 줄 아는 패션 감각. 필연적(?)으로 어이지는 화려한 여성 편력은 뭇 남성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알려진 것만 해도 재니퍼 애니스톤, 제시카 심슨은 공식 커플이었으며, 최근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Dear John」이라는 곡까지 헌정(?) 받는다.) 하지만 그는 단순 TV스타가 아닌 음악가다. 음악성을 차트 기록과 수상경력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총 7회의 그래미 수상과 11번의 노미네이트, 전 세계 1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라는 기록을 가진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촉망받는 아티스트’의 위치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걸출한 기타 잡이’다. 2007년 「Rolling Stone」지에서는 ‘새로운 기타의 신들(The new guitar gods)’ 중 한 명으로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 데렉 트럭스(Derek Trucks)와 함께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며 기타리스트로서의 위치를 확인받았다. 에릭 클랩튼의 아호(雅號)인 ‘슬로우핸드’를 이어받아 ‘슬로우핸드 주니어’라는 명예를 얻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이뿐이랴. 뛰어난 언변으로 스탠딩 코미디에도 능숙해 미국 쇼프로그램 캐스팅 타깃이 될 정도의 ‘타고난 능변가’이기까지 하다.
다음은 최근작인 5번째 스튜디오 앨범
< Born And Raised >에 모셔온 연주 명인들의 리스트다. 지루한 이름 나열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해보자. 공동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돈 워스(Don Was)는 롤링 스톤즈와 밥 딜런, 비비 킹, 보니 레이트의 작업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또한, 롤링 스톤즈와 에릭 클랩튼, 올맨 브러더스 밴드에서 명(明) 키보디스트로 이름을 떨쳤던 척 리벨(Chuck Leavell)이 건반 위에 앉았고,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앨범과 밥 딜런의 동반자였던 짐 켈트너(Jim Keltner)는 「Something like oliva」에서 드럼 스틱을 잡았다.
타이틀 트랙 「Born And Raised」는 포크록의 아이콘인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Crosby, Stills And Nash)의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그레이엄 내쉬가 보컬로 참여해 ‘크로스비, 매이어 & 내쉬’의 환상적 하모니를 들려준다. 눈에 익은 인물들이 많지 않은가. 수많은 거장들을 든든하게 지원했던 ‘연주계의 어르신’들은 막내 아들뻘인 그를 위해 기꺼이 악기 앞에 서기를 마다치 않는다.
남성적 매력, 뮤지션, 기타리스트, 쇼맨, 마에스트로 뭐하나 빠지는 게 없어 비인간적인 느낌마저 든다. 인간계에는 합당치 못한 ‘제거 대상’이다. 얄미울 정도로 잘났다. (인간 됨됨이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보통 잘난 사람들은 성격도 좋더라.) 하지만 여기에 허상은 없다. 모두가 ‘존 메이어’라는 인물 그 자체다. 이 1977년생 ‘젊은 장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시작은 ‘주목할 만한 신인’이라는 출발점에서부터였다. 데뷔 시기인 2000년대 초반의 록씬의 상황은 그야말로 과포화 상태였다. 포스트 그런지와 하드코어라는 양분된 상황은 끝없는 재생산만을 자행하고 있었을 뿐 ‘들을 만한 음악’은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인위적 소음만이 판치는 시류에서 대중들은 환멸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존 메이어의 처녀작
< Room For Squares >는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단비 같은 존재로 주목받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말쑥한 청년은 통기타를 들고 블루스와 컨트리라는 ‘낡은 포맷’으로 단숨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9.11 사태 이후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희망의 음악’들이었다. 특히 「No such thing」이나 「Your body is a wonderland」, 「Why Georgia」에서 담백한 멜로디와 부드럽게 퍼져 울리는 어쿠스틱 사운드는 소녀들의 가슴앓이를 하게 만들 법한 달콤한 속삭임 같았다.
이 작품의 힘은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였다. 이 ‘소리의 마력’을 알아본 제45회 그래미는 제임스 테일러, 스팅, 엘튼 존 같은 ‘당대의 목소리들’을 제치고 약관인 그에게 ‘최우수 남성 팝 보컬상’의 영광을 건네준다. 이로부터 존 메이어는 ‘그래미가 사랑하는 뮤지션’이라는 기분 좋은 인연을 만들기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미 수상 이력은 다음과 같다. 2002년 「Your body is a wonderland」로 ‘최우수 남성 팝 보컬상’ 수상, 2004년 「Daughters」로 ‘최우수 남성 팝 보컬상’과 ‘올해의 노래’ 수상, 2006년
< Continuum >으로 ‘최우수 팝 보컬 앨범’ 수상, 같은 앨범에 수록된 「Waiting on the world to change」로 ‘최우수 팝 보컬상’ 수상, 2008년 「Gravity」로 ‘최우수 솔로 록 보컬 상’ 수상, 2008년 「say」로 ‘최우수 팝 보컬상’ 수상까지. 확실히 그래미는 존 메이어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듯하다.)
‘새천년 최고의 기타 히어로’라는 수식어를 얻어내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시기에 등장한 ‘기타 맨’들 중 단연 돋보이는 연주를 선보임은 물론 이였고, 다면(多面)의 소리를 가진 연주자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런 기타리스트로서의 강렬한 인상은 라이브 앨범
< Try! John Mayer Trio Live In Concert >에서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며 방점을 찍는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단출한 밴드 포맷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공명, 스티브 조단(Steve Jordan, 드럼)과 피노 팔라디노(Pino Paladino, 베이스)와의 음악을 통한 화학적 공감을 통해 연주자의 위치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맛본다.
다른 설명보다 그를 정확히 대변하는 말은
‘2000년대가 낳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일 것이다. 2006년에 선보인 작품
< Continuum >의 수록곡 「Slow dancing in a burning room」의 톤과 선율은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의 빙의였다. 일렉기타로 주조해내는 클랩튼만의 ‘중용의 미덕’을 존 메이어는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냈다. 선구자들에 대한 경외와 탐미는 또 어떠한가. 답은 후속작품
< Battle Studies >의 「Crossroads」에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감성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미묘한 ‘갈림길’에서 혼란은 없다. 송라이팅에 대한 확고한 자기 다짐은 올해 발매한
< Born And Raised >에서 온연히 드러난다. 「Shadow days」에서 전하는 컨트리의 잔향은 ‘록의 근간’에 대한 탐구자로서의 자세다.
음악 안에서의 자아에 대한 고민과 고뇌, 깨달음에 대한 메시지 역시 완성된 음악가로서의 모습 그 자체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신념, 영감을 얻게 해준 선배들에 대한 공경, 그리고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음악적 신념은 언제나 올곧다.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시대와 세대의 감성’을 완벽히 부합한다. ‘블루스’라는 확고한 아이덴티티는 미국에서 나고 자라며 자신을 있게 해준 ‘근원에 대한 경배’의 자세를 견지함이다.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베테랑 음악가’로서의 이미지를 아로새기며 시대의 인정을 받아냈다.
존 메이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이런 ‘다중의 성향’들이 각기 다르게 부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돌적인 측면도, 성숙한 음악가의 모습도 ‘각자 다른 하나’가 아닌, 한곳으로 수렴하는 ‘결합으로서의 하나’로 자신을 드러낸다. 존 레논의 목표는 명확했다.
‘To the toppermost of the poppermost!’라는 일념으로 대중음악 최고봉의 자리에 섰다. 아마도 그 자리는 영원히 그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존 메이어는 그 위치를 탐하거나 억지로 올라서기를 거부한다. 순수하게 음악 안에서 자신이었던 모든 것을 써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순리대로 나아가며, 그것을 따를 뿐이다. 그 음의 흐름은 유유히 시대의 기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