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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순간들은 저절로 소중해진답니다. - 『우리가 보낸 순간』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타의 98퍼센트의 글. 매일 읽고 쓰는 것이 '일'이지만 글쓰기는 그저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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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김연수 저 | 마음산책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으로 평가받는 작가 김연수가 새롭게 펴낸 산문집이다. 첫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에 이어, 그가 아끼는 소설과 산문에 자신만의 감상을 덧붙인 것으로, 날마다 읽은 책에서 소설과 산문 49편을 가려 뽑고, 한 편 한 편에 특유의 감성적인 언어를 더해 들려준다. 사랑했던 날들, 어릴 적 추억,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가슴 저렸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잔잔한 글을 만날 수 있다. 때로는 따뜻함을, 때로는 아릿함을 주는 문장들. 낱말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인용 작품의 글귀와 그것을 품에서 꺼내 보이는 작가 김연수의 마음이 만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타의 98퍼센트의 글. 매일 읽고 쓰는 것이 '일'이지만 글쓰기는 그저 두렵기만 하다. 어떻게 쓰나, 그보다 무얼 읽어야 하나. 비좁은 책꽂이에 야무지게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눈에 들어왔다. 애초의 목적은 잊은 채 죽죽 읽어가며 「얄미운 사람」만 불러대다, 옆에서 남자친구와 통화하던 동생에게 한 소리 들었다. 사랑 이야기라면 질색하면서 왜 그걸 꺼냈대?

‘여성들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수식어를 어디에서 봤더라. 나도 보통 여성인지라 김연수를 좋아한다. 한동안은 이상형이라 말하고 다녔다. 물론, ‘내게 얼굴은 천형처럼 문학 인생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고 혼자 고민하면서 지새운 숱한 밤들이 있었다’고 작가 스스로 거시기한 고백을 하게 만드는 외모를 말하는 건 아니다. 결코.

대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필수로 들어야 했던 국어 강의에서 김연수의 단편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를 가지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이후 별다른 악감정 없이 그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닌데, 그래도 김연수의 책은 거의 다 보았다. 그러니까 그 이유. 무엇보다 잘 썼으니까. 그리고 글도 글이지만 글쓴이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매력 때문(속고 있는 걸까).

대체 이 양반은 어떤 사람이길래? 같은 궁금증.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더 끌렸다. 그는 소설의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러니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에세이에 흥미가 가는 거겠지.

마침 새 산문집이 도착했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다. 그래 사랑이 다 뭐라니, 소설은 접어두고 신간을 들자. 분명 자신에 대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쪾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게는 반가운 책이었다.

다독하기로 유명한 김연수가, 날마다 읽은 소설 중에서 아끼는 글들을 고르고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였단다. 소설 두세 페이지 뒤에 작가의 글 한 페이지를 넣었다. 책의 3분의 1 가량만 직접 쓴 셈이니, 그가 썼던 글이나 그라는 사람에게 관심 없는 이들에겐 시원찮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애정 가득한 독자에게는 49편의 소설 목록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랑과 글쓰기와 살아온 날의 기억을 ‘순간’이라는 화두로 풀어낸 짧은 글들이 선물로 다가왔다.

실은 지쳐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말에도 출근해 밀린 일을 처리하길 두어 달. 밤이 되면 아무렇게나 엉겨 붙어 가라앉는 감정 덩어리들을 흩어 내려 바둥거렸다. 지난주에는 유행에 뒤지지 않기 위해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영양 부족이란 의사의 말을 들은 후에야 밥은 결코 보약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지난 열 달 동안 잊고 지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독한 겨울이 되리라 생각했다.

작가는, 우리 인생보다 더 오래가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볍게 웃으면서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저 다행히도 점점 더 행복해지고, 점점 더 슬퍼질 뿐이다.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짧은 찰나, 기나긴 인생을 이루는 그 순간들. 살아있는 동안에는 소중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결코 찾을 수 없겠지만, 돌아보면 지나온 모든 시간은 저절로 소중해질 것이며, 왜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들의 우주는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이라는 그의 말이, 그대로 큰 위로가 된다. 고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들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사시길. 다른 모든 일에는 영악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 앞에서는 한없이 순진해지시길. 지난 일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것. 나는 변해서 다시 내가 된다는 것. (…) 우리는 변하고 변해서 끝내 우리가 되리라는 것. 12월 31일 밤,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겨울나무가 새해 아침 온전한 겨울나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다들 힘내세요. (p.200)

김연수는 팔 년 동안 거의 매일 글을 쓰면서 자신이 원하던 사람이 되어 갔다고 한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된 건 전적으로 날마다 글을 쓴 덕분이라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이들에게 좋은 글을 읽을 기회를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말하고, 그건 생각으로 들리고, 눈으로 읽”히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가 쓰는 글은 곧 우리가 듣는 말이며 우리가 읽는 책이며 우리가 하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했다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말들을 쓰고, 듣고, 읽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날마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나는, 글쓰기는 곧 고통이라 여기는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읽고 쓰기 시작해야겠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김연수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역서로는 『대성당』(레이먼드 카버), 『기다림』(하 진), 『젠틀 매드니스』(니콜라스 바스베인스), 『달리기와 존재하디』(조지 쉬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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