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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재탄생한 슬픈 그리스 신화 사랑 이야기 - <흑인 오르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부활한 오르페우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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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부조상들이 보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다. 은은한 분위기의 보사노바 곡 「행복」이 흘러나온다. 갑자기 그 감미로움을 깨면서 신나고 시끌벅적한 삼바 리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며 거리를 지나간다.

<흑인 오르페>(Orfeu Negro 또는 Black Orpheus, 1959년, 프랑스-이탈리아-브라질 합작)
음악: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루이스 봉파(Luiz Bonfa)
감독: 마르셀 카뮈(Marcel Camus)
주연: 브레누 멜루, 마르페사 돈

<흑인 오르페> 포스터. 감독 마르셀 카뮈는 이 영화로 프랑스 누벨바그 거장들의 반열에 올라선다.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지만, 마르셀 카뮈의 영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단 한 편 <흑인 오르페>만은 세계적인 찬사를 이끌어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었고, 배우들도 무명이었다. 음악도 이국적이었고 낯설었다. 이런 무명들의 조합으로 <흑인 오르페>는 195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같은 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그리고 이듬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휩쓸었다. 평단뿐 아니라 대중들도 큰 호응을 보냈다.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이 관객들에게 어필했다. 그리스 신화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브라질을 배경으로 재탄생했고,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새로운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올림포스 산에 살고 있는 신들과 뮤즈들의 이야기, 그리스 신화는 불멸의 고전이다. 서구 전통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의 토대가 되었으며 다양한 해석을 통해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로 재탄생했다. 문학과 미술, 그리고 영화 등에서 그리스 신화는 계속 퍼내고 퍼내도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이야기의 원천을 제공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중 하나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영화에서는 프랑스식 표기인 ‘오르페’와 ‘유리디체’로 나옴)의 사랑 이야기다. 리라를 연주하면 동물들까지도 귀를 기울였다는 리라의 명인 오르페우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상심한 그는 모든 연주를 중단해버린다. 마침내 그는 기적을 믿고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가 지배하는 명부(冥府)의 세계로 들어간다. 얼음처럼 차갑고 어두운 명부에서조차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는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단 하나, 조건이 있었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오르페우스 뒤를 따르는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절대로 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마르셀 카뮈는 오르페우스의 전설을 브라질로 가져온다. 그리고 춤과 노래로 뒤범벅된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니발 속으로 전설을 끌어들인다. 남국의 짙은 원시적 색채, 흥겨운 삼바 리듬, 광란의 도가니나 다름없는 카니발의 어느 하루 속에다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전설은 브라질 삼바축제의 한가운데서 재탄생한다

마르셀 카뮈는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의 뮤지컬 <성모수태축일의 오르페>(Orfeu Da Conceicao)를 각색해서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시인이자 작사가이기도 했던 비니시우스는 보사노바 음악인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풍의 음악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젊은 음악가들이 삼바의 격렬한 리듬에서 벗어나 차분함과 서정성을 강조해 만들기 시작한 보사노바는 아직 대중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마르셀 카뮈는 과감하게 이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어 원작 뮤지컬의 음악을 작곡했던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도 영화 작업에 합류시킨다. 팀이 구성됐고, 영화를 위해 새로운 곡들이 쓰였다. 그가 작곡하고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작사한 「행복」(A Felicidade)은 이렇게 하여 보사노바의 영원한 걸작이 된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루이스 봉파도 작업에 참여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래들 중 그가 작곡한 것은 두 곡인데, 그 중 하나가 영화를 통해 크게 히트한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aval)이다.

그리스 신화의 부조상들이 보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다. 은은한 분위기의 보사노바 곡 「행복」이 흘러나온다. 갑자기 그 감미로움을 깨면서 신나고 시끌벅적한 삼바 리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며 거리를 지나간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촌. 물을 길어가는 아낙들의 엉덩이가 삼바 리듬에 들썩거리고, 사람들의 걸음걸이마저 춤을 추는 것 같다. 삼바 리듬이 지나가고 나면 「행복」은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노래로 이어진다.

슬픔에는 끝이 없지만
행복에는 끝이 있어요.
행복은 바람이 하늘로 띄워준 깃털과 같아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그 생은 너무도 짧아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주기만 바랄 뿐이죠.

행복은 꽃잎 위에 머무는 이슬방울 같아
평화롭게 빛을 내기도 하지만,
작은 흔들림에도 떨다가
사랑의 눈물처럼 떨어지지요.

가난한 이들의 행복이란
카니발의 커다란 환상과 같아
한 순간의 꿈을 위해 일 년 내내 일하면서,
왕이거나 해적이거나 정원사이거나
맡은 장면을 연기하지만,
모든 건 재[灰]의 수요일이 되면 끝나고 말지요.


「행복」과 함께 메인타이틀이 오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바닷가 절벽 옆에 어린 두 소년 제카와 베네디토가 등장한다. 파란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연들이 날고 있다. 베네디토는 바람을 실어 연을 날리고 제카는 연실을 당기면서 조종한다. 그러나 끈은 이내 끊어져버리고 노란 연은 바다를 향해 추락한다. <흑인 오르페>는 처음부터 비극적인 암시로 시작된다. 비상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연의 이미지처럼. 반대로 영상은 더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닭과 고양이, 그리고 염소가 함께 사는 집. 오르페는 두 아이 앞에서 기타를 치며 「카니발의 아침」을 불러준다. 신화에서도 그랬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뜯으면 갓난아기도 울음을 그쳤고, 꽃과 나무들도 흔들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으며, 짐승들도 모여들어 음악을 들었다고. 마르셀 카뮈는 신화의 묘사를 고스란히 영화 속에 옮겨 놓는다. 오르페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아이들과 짐승들은 꿈꾸는 듯 행복한 듯 오르페 주변에 모여들어 음악을 듣는다. 가난한 브라질 오두막의 풍경이지만, 거기엔 사랑과 행복이 머물고 있다.

리라 대신 기타, 고대의 음악 대신 보사노바를 부르는 오르페우스를 상상해내는 것이 영화다.

아침! 이토록 아름다운 아침에는,
내 인생에 새로운 노래가 샘솟아요.
오직 그대 눈동자, 그대 미소, 그대 두 손에
바치는 노래랍니다.
당신이 찾아온 그날이거든요.

내 기타의 줄들도 당신의 사랑만을 찾고,
거기서 흘러나온 목소리도
당신 입술에서 길 잃은 키스에 대해 이야기하죠.

나의 가슴은 노래 부르고,
기쁨은 다시 돌아왔어요.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랑의 아침인가요!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어느새 집안에 들어와 춤을 춘다. 청순하기 그지없는 소녀, 그녀를 발견한 오르페는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묻는다. “유리디체예요.” 옆방에서는 아이들이 기타를 가지고 「카니발의 아침」의 멜로디를 뜯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르페는 말한다. “우린 이미 사랑했었지.” 신화가 반복되듯이, 수많은 슬픈 사랑 이야기가 반복되듯이,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만난다. 그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으며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바람둥이인 오르페는 그녀를 유혹한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이렇게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부활한다.


카니발이 절정에 다다른 밤이다. 질투심에 불타는 오르페의 애인 미라는 눈을 부라리면서 오르페를 찾아다니고, 해골 의상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유리디체를 쫓아온다. 그는 유리디체를 데려가려는 ‘죽음’이다. ‘죽음’에게 쫓기던 유리디체가 전선줄을 잡고 있을 때 오르페는 그만 전기 스위치를 올리고 만다. 감전된 유리디체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오르페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주술사까지 찾아가지만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유리디체는 숨을 거둔다. 마치 신화 속 주인공과 같은 카니발 의상을 입은 오르페는 하얀 옷을 입은 채 영원히 잠들어버린 유리디체를 안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노란 카니발 드레스를 입은 미라가 달려와 화를 내면서 돌을 던진다. 돌은 오르페의 이마를 맞추고, 오르페는 유리디체를 가슴에 안은 채 절벽으로 떨어져 숨을 거두고 만다. 미라는 절규하지만, 카메라는 차갑게 죽은 두 연인의 시체를 비추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천히 주위를 돌다가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라스트 신은 매우 인상적이다. 오르페는 죽으면서 다시 신화가 되었다. 오르페를 따르던 어린 두 소년 제카와 베네디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르페가 죽은 언덕으로 온다. 바다를 바라보며 제카는 기타를 친다. 유리디체처럼 하얀 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다가와 이야기를 건넨다. 옆에 앉은 베네디토가 소녀에게 말한다. “입 다물어! 지금 해돋이를 만드는 중이란 말이야.” 해가 뜨는 게 아니라 해가 뜨게 하려고 기타를 친다는 얘기다. 베네디토에게 그것을 가르친 건 오르페였다. 소녀는 꽃을 건네면서 자기를 위해 연주해달라고 부탁한다. 기타 연주는 흥겨워지고 소녀는 리듬에 맞춰 귀엽고 신나게 삼바 춤을 춘다. 제카도 기타를 뜯으며 흥겨운 멜로디로 노래한다. 「오르페의 삼바」(Samba De Orfeu)는 기타 하나만으로도 흥겹다. 어느새 슬픔은 모두 잊어버린 듯하다. 카메라가 서서히 왼쪽으로 돌면, 소녀가 앞장서고 두 소년도 삼바 리듬에 발맞추며 달려 나가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태양 아래서 어린아이들은 이제 새로운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참이다. 아이들이 춤추는 모습에 오버랩되어 그리스 신화의 조각상들이 다시 비춰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보사노바 리듬에 쓸쓸함을 담고.


[Tip 1] <흑인 오르페>는 브라질보다 프랑스, 이탈리아가 합작의 주축이 되어 만든 영화이지만, 주인공은 온통 흑인들이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것도 1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니, 당시 미국 영화라면 상상도 못하던 ‘All Black Casting’이 이뤄진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이렇게 까만 분들만 등장해도 부족함 없이 즐거운 영화가 두 편 있으니, <흑인 오르페>와 <카르멘 존스>(1954)이다.

[Tip 2] 보사노바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조류’(new wave)이라는 뜻이다. 브라질에서 시작, 1958년부터 60년대 초까지 서구에 풍미했던 음악이다. 재즈 스탠더드 음악으로 많이 채용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 우리나라 신중현 음악 등에서도 벌써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보사노바의 거장들로는 본문에서 거명한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조앙 지우베르투,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루이스 봉파 등이 손꼽힌다.

보사노바의 명반들

[Tip 3] 초창기 보사노바 중 가장 성공을 거둔 곡은 루이스 봉파가 작곡한 「카니발의 아침」인데, 「A Day in the Life of a Fool」이라는 영어 제목으로도 번안된 바 있다. <흑인 오르페>의 OST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히트한 보사노바 앨범은 스탄 게츠(Stan Getz)와 조앙 지우베르투가 함께 작업한 1964년 앨범 를 들 수 있다. 이 앨범에서도 특히 인기를 끈 곡은 조앙의 아내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인데, 조빙이 작곡하고 모라이스가 작사한 「가로타 지 이파네마」(Garota de Ipanema)가 원곡이다. 앨범에는 그밖에도 「디자피나두」(Desafinado), 「코르코바두」(Corcovado) 등 보사노바의 명곡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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