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는 기온 탓도 있을 것입니다. 가을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이 시점에서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댄스음악보다는 듣기에 편안한 노래들이 많은 사람에게 채택되는 이유가요.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외국의 음악이든 우리나라 음악이든 다소 차분한 작품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영국 소울의 신성 팔로마 페이스와 한국의 대표 R&B 가수 휘성, 최근 여덟 번째 앨범을 발표하며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데이빗 그레이를 만나 보세요.
팔로마 페이스(Paloma Faith) <Do You Want The Truth Or Something Beautiful?>(2009)
영국의 빈티지 사운드를 향한 애정과 레트로 소울에 대한 각별한 희구는 식을 줄 모른다. 21세기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뤄 낸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의 환생이라는 얘기까지 들으며 기대주로 확실하게 도장을 찍은 더피(Duffy)를 비롯해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미녀 보컬리스트 베스 로울리(Beth Rowley)와 영국 펑크(funk), 소울의 진정한 여제 앨리스 러셀(Alice Russell) 등이 소울 서바이벌의 주역이 되어 음악의 향기를 널리 흩뿌리고 있다. 이들의 출현 및 생존이 가능한 것은 음악가와 청취자 간의 보이지 않는 강한 상호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일 듯하다. 옛것의 질감이 느껴지는 흑인 음악을 찾으려는 마니아에게 이들 뮤지션은 보물이나 다름없다.
여기 보화 같은 인물이 하나 더 나타나 듣는 이들에게 흥분을 예약한다. 팔로마 페이스(Paloma Faith), 한눈에 보기에도 앳된데 목소리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강도를 최고로 올린 건물 청소용 진공청소기의 흡인력이 이 정도일까? 잡아먹을 듯이 귀를 빨아들인다. 청각 신경도 알아서 그녀의 음성을 받아들인다. 어른스러운 목소리뿐만 아니라 능란하게 구사하는 보컬이 귀에 빠르게 투침한다.
이 특출한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전 소울의 모양새를 띤 그녀의 음악이 더욱 고풍스럽고 맛깔 나게 들린다. 가마솥으로 지은 밥을 질그릇에 담아 먹는 기분마저 든다. 어린 시절부터 재즈와 소울에 영향을 받았다는 그녀의 음악적 토대가 얼마나 탄탄한지 작곡 실력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곡의 멜로디 진행이 말끔하고 표현해 내는 보컬이 야무져서 앨범은 곡마다 프로듀서가 다름에도 꽤 통일성 있는 흐름을 나타낸다.
앨범은 재생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곡이 끝날 때까지 듣는 이의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강한 힘을 지녔다. 데뷔 싱글 「Stone cold sober」는 영국 차트 17위에 그쳐 크게 히트는 못했지만, 선율과 가사의 절묘한 화합으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효과를 보이는 코러스, 거기에 깔리는 혼 섹션이 멋스러워 시간이 지나도 마니아들에게는 오랜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1970년대 소울 특유의 고전미를 살리는 스트링과 코러스가 돋보이는 「Smoke & mirrors」와 「Do you want the truth or something beautiful?」, 남성 코러스와의 콜 앤 리스폰스가 노래의 재미를 더하는 「Upside down」도 일품이다.
그렇다고 수록곡 모두가 오직 과거에만 초점을 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이루려는 소녀의 깜찍함과 담대함이 가사에 투영된 「Romance is dead」는 발랄한 분위기로 인해 렌카(Lenka)나 케이트 내시(Kate Nash) 같은 가수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정통 소울보다는 팝에 더 근접한 형태를 보이는 「New York」과 「Stargazer」는 아직 빈티지 사운드에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노래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팔로마 페이스는 마술사 보조, 무용수, 배우 등으로 활약하며 이미 예술가적인 끼를 드러내 왔다. 각각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래를 접해 본 이상 음악이 천직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 훌륭한 보컬과 무르익은 음성을 이제야 듣는 게 야속하기만 하다. 최근 출시된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의 다섯 번째 앨범 <Scars> 중 팔로마 페이스가 객원 보컬로 참여한 「What's a girl got to do?」도 상당히 근사하다. 일렉트로니카임에도 그녀가 입을 떼니 소울로 포장된다. 팔로마 페이스의 등장은 음악에서의 재래식 문법 확장, 복고 소울 필드의 양적, 질적 성장에 건강한 자극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보배 같은 존재, 진귀한 앨범의 등장에 무척 흐뭇하다.
- 글 / 한동윤 ()
휘성 <Vocolate>(2009) 휘성에게 한국의 대표 R&B 가수라는 직함이 통념적으로 인식되어 온 지는 꽤 오래전이었던 것 같다. 흑인 아티스트에게서나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 특유의 기교와 바운스 감각은 물론이고, 국내 정서에 어울리는 발라드적 감성도 치밀하게 건드릴 줄 알았던 능력은 유수의 히트곡을 양산하며 현재까지 휘성의 입지를 굳건하게 축조해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1, 2집의 기록적인 성공은 이후 앨범이 선도해야 했던 정체성 찾기 과정을 교란하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좌충우돌하던 음악적 방향은 여섯 번째 앨범에 이르러서야 시야가 확보된 것처럼 보인다. 다양하면서도 생경한 시도를 절제하는 대신, 안정적인 구도로 앨범을 배치한 휘성의 용단은 프로듀서로서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데에 기인한다.
안정적인 두 축은 표면적으로 전형적인 대중적 발라드와 미디엄 템포의 트렌디한 R&B로 대응되었다. 허나, 실질적으로 6집
<Vocolate>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휘성표 발라드’가 표출하고 있는 정제된 숙련도이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는 기승전결식 구조와 카타르시스를 유발할 만한 매력적인 후렴구는 타이틀곡인 「주르륵」에서 확연하게 발견된다.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확실한 비기를 습득한 모습이라 얄밉기까지 하다.
「주르륵」과 함께 「사랑 그 몹쓸 병」에서도 가성을 도드라지게 내세워 확실한 방점을 남기는 모습이 흥미롭다. 보컬 역량에 대한 자기 확신에 의해 발현되는 특출한 기교는 일반 대중에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생성하기에 이른다. 진성과 가성 사이에서 흠 잡을 곳 없이 연결되는 매끄러운 전환은, 온전한 곡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도록 조력하는 휘성의 또 다른 무기다.
전반부가 애틋한 발라드곡의 향연이었다면, 후반부로 진입하는 순간 클럽 튠으로 주요 구성된 2막이 기다리고 있다. 이쯤 되면 제2의 조력자가 등장할 만도 하다. 아니라 다를까 미국 현지의 트렌드를 준수하게 이식하는 이현도의 손을 거친 트랙들이 모습을 비춘다. 「Rose」로 간단히 몸을 풀기 시작하더니 「Girls」에서는 오토튠 사운드를 토대로 래퍼 버벌 진트(Verbal Jint)를 소환한다. 흡사 티 페인(T-Pain)의 「Chopped n skrewed」를 연상케 하는 유쾌한 조합이다.
발라드와 컨템퍼러리 R&B의 두 축은 장르 본연의 특색을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유지된다. 물론 두 축을 조정하는 소실점에는 휘성이 위치한다. 앨범의 균형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조정될 수 있었고, 상업성의 측면을 효과적으로 녹아들게 한 미묘한 기술이 발휘되었다는 점에서 ‘프로듀서’ 휘성의 첫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진취적인 시도는 어느덧 선배 가수의 위치까지 도달한 현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지라 더욱 의미가 깊다.
- 글 / 홍혁의 ()
데이빗 그레이(David Gray) <Draw The Line>(2009)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데이빗 그레이가 4년 만에 발표한 새 음반. 1993년 데뷔한 이 맨체스터 뮤지션은 음악적으로 세 번의 변화를 겪고있다. 데뷔 음반 <A Century Ends>와 1994년 2집
<Flesh>에서 어쿠스틱 포크의 초연함에 도전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봤고, 1998년 4집
<White Ladder>에서 포크와 록, 컴퓨터가 만들어낸 소리들을 접목시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신보는 바로 데이빗 그레이의 세 번째 음악적 전환을 가져온 작품이라 할 만 하다. 그동안 꽁꽁 감춰뒀던 (혹은 스스로도 몰랐던) 기쁨과 희망, 따사로운 햇살의 리듬과 비트의 문을 활짝 개봉했다. 최대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Babylon」의 시니컬한 웃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맑은 웃음이다.
첫 싱글 「Fugitive」가 잘 말해준다. 가벼운 터치의 피아노와 몸을 들썩이게 하는 비트는 희망의 사운드다. 벤 폴즈의 피아노 록을 연상시키는 「Jackdaw」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레이블에서 새로 짜여진 밴드 멤버들과 함께 작업한 결과이다. 그래서 앨범 타이틀 ‘Draw The Line’도 ‘어떤 것의 종말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물론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듯한 특유의 우울 모드도 여전하다. 멜랑콜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Nemesis」, 안식의 노래 「Transformation」, 불안정한 「Draw the line」 등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데이빗 그레이의 보컬은 유머를 잃고 방황한다. 여가수들의 피처링도 침잠에 한몫을 했다. 미국의 인디 포크 가수 졸리 홀란드(Jolie Holland)와 함께 한 「Kathleen」, 애니 레녹스(Annie Lennox)가 참여한 「Full steam」도 내성적인 포크 록의 전형이다.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긍정의 힘을 받아들인 데이빗 그레이의 판단은 적중해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생기와 온기가 돈다. 따뜻하다. 평생 그늘에서만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 글 / 안재필 ()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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