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한울의 그림으로 읽는 책
“좀 더 괴로워하고 방황해도 괜찮아. 스무 살이라는 건 그러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스무 살 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좀 더 친밀하고 진지하게 공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맘 같아선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한강 근처에 작업실을 얻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한강으로 산책을 나가본 건 단 한 번. 서울 시내를 직접 운전해서 이동해본 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 근방에 작업실을 얻은 이유와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만, 공짜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너무 간과하고 사는 건 아닐까란 생각에 조깅을 좀 해볼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자우림의 <ashes to ashes> 앨범을 들고 드라이브를 하러 나갔습니다. 서울의 낮과 밤은 매우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벽의 강변북로는 너무 평화롭고 여유가 넘쳤으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차들과 호흡하며 한강 특유의 정취가 느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하자니 기분 좋은 멋진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맑고 투명한 밤하늘과 작은 불빛 하나 놓치지 않고 빛내주는 한강 그리고 자우림의 무겁고 몽환적인 <ashes to ashes> 앨범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에 즐거움 가득한 발동작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도중 문득 10년 전 내 자신에겐 조금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저에게 삶의 지침서는 자기개발서나 경제경영서 같은 책이 아니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같은 책들이었습니다. 책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다른 언어를 쓰고 있으며 연관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세상과 환경에 크게 휘둘리며, 방황하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행동들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치라 여겨지는 것들과 부르조아의 형식주의에 대해 거칠게 비판했으며 저항과 피카소 클럽 안을 가득 채운 담배연기만이 진실이었고 날 이해해주는 건 나 자신과 음악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밤하늘과 한강 드라이브라는 명제는 '허풍이나 떠는 위선자들이 하는 부르주아적 취미생활'로 치부하는 직설적이고 좀 어딘가 막힌 친구였단 이야기입니다. 재떨이를 가득 채운 담배꽁초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맥주병들, CD와 스케치북 그리고 책들로 가득 찬 가방…… 모두 소중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지만, 근사한 밤하늘과 한강 그리고 드라이브가 가져다주는 평온이 이런 행복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라는 숫자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방황’과 ‘저항’으로 가득 차야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너무 미래지향적이라 스무 살이 스무 살 같지가 않아요.) <ashes to ashes> 앨범엔 ‘죽인 자들의 무도회’란 노래가 있습니다. “망각의 강을 떠다니는 건 흔해빠진 무용담”이란 소절이 있는데 한강을 달리는 도중 ‘아아… 그렇지, 그렇지.’ 하며 지금 하는 생각들에 대해 무릎을 탁탁 치며 합리화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ashes to ashes> 마지막 곡인 ‘샤이닝’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별이 내리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 있다는 괴로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스무 살 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좀 더 친밀하고 진지하게 공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맘 같아선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좀 더 괴로워하고 방황해도 괜찮아. 스무 살이라는 건 그러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시간이 지나보면 조금은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을 거야.” 라며 등 두드려주고 말이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