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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 -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

이제 머지않아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색맹의 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와 함께 섬 주민들이 공유했던 공통의 기억과 그들만의 신화도 사라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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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어떤 부분을 상실하거나 손상당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올리버 색스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3,900km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 현재 인구는 약 700명. 폰페이를 둘러싼 바다에 점점이 박혀 있는 여덟 개 산호섬 중 하나. 1년에 고작 대여섯 차례, 배 한 척만이 이따금씩 찾아오는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곳. 이 외딴 섬이 바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색맹의 섬, 핀지랩이다.

저자인 올리버 색스는 저명한 신경계 의사다. 그가 핀지랩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사실 단순하다. 그는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완전히 색맹이 된 환자를 진료하게 되는데, 그 환자는 뇌의 손상 때문에 색을 보는 능력뿐만 아니라 색을 상상하거나 기억하는 능력까지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평생 빛깔을 보다가 어느 순간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의 세계가 빈약해지고 괴기스러워지고 비정상이 된 것 같다고 호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색스는 ‘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렸을 때 나는 편두통으로 시각 이상을 겪었다. 그럴 때면 눈앞에 별이 보이고 시야에 이상이 생기는 전형적인 증상만이 아니라 색각에도 이상이 생겼는데, 몇 분 동안 색각이 약해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는 증상이었다. 이런 증상을 겪을 때면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몇 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아무런 색깔 없는 세상을 사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 애가 닳기도 했다.

여기에 미지의 섬에 대한 오랜 환상과 때마침 미크로네시아에서 신경질환을 치료하는 친구의 도움 등이 맞물리면서, 그는 마침내 ‘색맹의 섬’을 향해 떠나게 된다. 핀지랩은 열대초목이 사방으로 무성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한쪽에는 근사한 쪽빛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쪽 숲에선 팔다리가 낭창낭창한 흑인 아이들이 꽃과 바나나 이파리를 흔들면서 뛰노는 곳. 한때 이 섬에는 왕국이 존재했었다. 세습왕 난음와르키가 다스리는 이 왕국에는 복잡한 계급제도, 구전 문화와 신화,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번창하던 사회는 1775년 핀지랩 일대를 덮쳤던 태풍 렝키에키로 인해 비극을 겪는다. 당시 엄청난 힘으로 이 작은 섬을 집어 삼켰던 태풍은 섬 인구의 90퍼센트를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생존자 대다수도 기근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1천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단 몇 주 만에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이곳에선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번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근친교배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전에는 희귀했던 유전적 특징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색맹 돌연변이의 출현…… 그들은 이 기이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마스쿤(안 보인다)’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 태풍으로부터 2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이 섬 인구의 3분의 1이 마스쿤 유전자 보유자이며, 전체 인구 약 700명 가운데 57명이 전색맹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색맹의 발생률은 3만 분의 1 미만인데, 이곳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망막세포의 결함에서 오는 색맹은 대부분이 부분색맹이며, 일부 유형은 아주 흔하다는 것. 적록색맹의 경우, 남성 20명당 한 명꼴로 나타난다. 그러나 선천성 전색맹(全色盲)은 극히 드물어서 3-4만 명당 한 명꼴밖에 되지 않는다. 색맹의 특징은 눈에 원뿔세포가 없다는 것인데, 막대세포에 포착되는 불충분한 정보에만 의존하다보니 밝은 빛 아래에서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고 한다. 햇빛이 강할 때는 시야가 즉각적으로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극도로 시력이 약하고, 눈이 흔들리는 안진증에 시달린다. 색맹인 사람들은 대개 눈을 찌푸리고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환한 곳을 피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핀지랩에 도착한 올리버 색스는 일행과 함께 마스쿤을 앓고 있는 원주민들을 방문해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을 모아 놓고 여러 가지 색맹 테스트를 하면서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준비해 간 돋보기, 선글래스, 외알 망원경 등 시력 보조기구를 선물한다. 사실 핀지랩에도 작은 의료시설이 있긴 하지만, 목숨에 전혀 지장이 없으면서 선천적 비진행성 질환인 ‘마스쿤’은 아예 치료 대상이 아니다. 그는 섬에 머물면서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색맹의 섬』을 읽으면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 하나. 과연 ‘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는 느닷없이 영화 대사 하나가 떠올랐었다. <케이트와 레오폴드>라는 맥 라이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물인데, 19세기에 살고 있는 귀족 남자와 21세기 뉴욕에 사는 여자가 시간을 건너뛰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딱히 기억나는 장면은 없는데, 대사 하나만 또렷이 남아있다. 타임워프(Time Warp: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순간)의 비밀을 처음 발견한 박사가 그 충격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개예요. 다른 모든 개들은 날 믿지 않죠.”


이것은 결핍과 부재를 전제로 한 말이다. 감각이 차단된 상태, 흡사 필터에 의해 중요한 정보가 걸러지고 있는 듯한 답답한 감정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그들이 인지하는 세상은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마스쿤 원주민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스쿤 여인이 어두운 방에서 짠 전통 무늬 깔개를 보게 되는데, 이 깔개는 어둠 속에서 독특한 빛을 발한다. 정교한 무늬들이 서로 다른 밝기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깔개를 환한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순간, 아름다운 무늬들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연한 갈색과 자주색처럼 명도 차이만 있을 뿐, 색채 대조가 별로 없는 색깔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스쿤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능력은 저자의 글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어느 색맹 독자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색맹’ 같은 어휘는 우리에게 없는 것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보고 느끼며 우리가 이루는 그런 세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저에게 해질녘은 마법 같은 시간입니다. 극명한 명암 대비가 없어 시야가 확장되고 시력도 갑자기 좋아집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은 해질녘이나 달빛 아래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 저에게 가장 행복한 추억은 거대한 미국삼나무 숲 속에 누워 별을 구경하던 그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특별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색맹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빛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실내에서만 지내는 사람들. 그들은 워낙 소수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줄곧 또래 아이들의 오해, 그리고 고립과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할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가 섬에서 만났던 색맹 주민들은 달랐다. 핀지랩의 모든 사람이 마스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스쿤으로 태어난 이들이 색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밝은 빛을 견디지 못하며, 사물의 세세한 부분을 볼 수 없는 장애까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핀지랩의 아기가 빛을 보고 눈을 찌푸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이미 그들은 그 아기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 아기에게 필요한 환경과 그 아기의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사회 전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설명하는 신화도 있다. 올리버 색스는 그런 점에서 핀지랩을 명백한 ‘색맹의 섬’으로 규정한다. 다른 곳에서 색맹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어김없이 철저히 고립되거나 오해받으며 살아가지만, 이곳에서는 마스쿤으로 태어난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

섬의 고립성이라는 특수성이 부여한 잠시의 가능성, 짧은 시간 스치고 지나가는, 기이한 유전자 이상, 유전자의 소용돌이. 그러나 섬은 바깥세상으로 열리고 사람들은 죽거나 다른 종족과 결혼하여 유전적 특성은 희소해지고 그러면서 병도 사라진다. 그처럼 고립된 지역에 발생하는 유전병의 수명은 여섯에서 여덟 세대로, 대략 200년이면 그에 얽힌 기억과 흔적과 함께 그침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머지않아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색맹의 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와 함께 섬 주민들이 공유했던 공통의 기억과 그들만의 신화도 사라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소외된 자들의 정신적 쉼터 혹은 고립된 낙원이 사라진다는 느낌. 마치 흑백 영화의 소멸이 자연스런 기술 진화의 과정임을 알면서도 왠지 아쉽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색맹 공동체의 따뜻한 정서와 공감대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이런 고립된 섬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가 이상하게도 삶의 위안이 되어 준다.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저/이민아 역 | 이마고 | 2007년 11월

저명한 신경의이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쓴 미크로네시아 섬 여행기.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색깔도 볼 수 없는 유전적 완전색맹들만이 모여 사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올리버 색스는 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색맹의 섬’을 찾아 핀지랩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인간주의적인 관점으로 질병에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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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저/<이민아> 역12,600원(10% + 5%)

『색맹의 섬』은 저명한 신경의이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쓴 미크로네시아 섬 여행기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색깔도 볼 수 없는 유전적 완전색맹들만이 모여 사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올리버 색스는 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색맹의 섬’을 찾아 태평양 한가운데의 조그만 섬 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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