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과 여행
서머셋 몸은 『인생의 베일』을 쓰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 중 아래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하게 되었다.”
“부디,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이 긴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거든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망령이 말했다네) 나 ‘피아’를 기억해 주세요.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그 경위는 보석 반지로 나를 아내로 맞은 그가 알고 있나이다.”
세인트토머스 의학교의 학생이었던 서머셋 몸은 부활절을 맞아 6주간의 휴가를 얻어 제노바를 거쳐 피사를 거쳐 피렌체로 갔고 라우라 거리에 방을 얻어 셋집 주인의 딸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운다. 그는 그때 단테를 읽기 시작했고 연옥편의 그 구절에 이르렀을 때 ‘피아’란 여자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귀부인이며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부정을 의심했지만 가족이 무서워 죽이지는 못하고 마렘마에 있는 성으로 데려갔다가 창 밖으로 그녀를 내던져버렸단 걸 알게 된다. 서머셋 몸은 그 이야기에 사로잡혀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란 문장을 암송한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얼마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인생의 베일』이다.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라는 셸리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인생의 베일』은 시작된다.
나 역시 서머셋 몸이 매료되었던 바로 그 구절에 매료된다.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그 구절은 수많은 남원댁, 목포댁, 강릉댁, 외서댁의 사연을 궁금하게 한다.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뼈를 묻게 되는 사람들.
인생이 여행이라는 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묘사한 소설가는 세바스찬 폭스다. 그는
『바보의 알파벳』이란 소설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시간에 따른 연대기가 아니라 공간순, 즉 a, b, c, … 이런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도시 이름으로 풀어본다. 주인공인 사진작가 피에트로 러셀이 사는 동안 스쳐 갔던 도시들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 이야기다.
Ghent헨트(1981년 벨기에) 피에트로가 아내 한나를 만난 곳이다.
Jerusalem예루살렘(1982년 이스라엘) 피에트로가 절친한 친구 해리를 방문했던 곳이다. 해리는 ‘키부츠 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엄청나게 많이 했던 섹스’라고 말한다. 군대에서 커다란 총을 들고 다니는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충동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야드 바셈 기념관에선 어두운 홀에 촛불을 밝혀 놓고 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가 나치에게 학살당한 150만 명 어린아이의 이름을 끝없이 읽어 내려가는 도시지만 해리가 그의 아내 될 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도시기도 하다.
Lyndonville린던빌(1971년 미국 버몬트) 그의 나이 스무 살. 미국의 하버드대에 진학한 로라가 피에트로를 그녀의 고향에 초대한다. 그는 로라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한 나머지 늙어버렸다는 기분, 세상을 알아버렸다는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곳 호숫가에서 로라와 첫 번째 섹스를 나눈다. 로라의 몸 위에서 그는 회전하는 지구 위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라는 느낌을 받는다.
New York뉴욕(1973년) 그가 처음 사진을 찍던 곳. 사람들은 뉴욕에서 광란과 속도를 말하지만 그에겐 이 도시엔 사람들 눈에 포착되지 않는 뭔가가 있는 걸로 보인다. 그는 눈 내리는 일요일 오전이면 텅 빈 사무실 건물들을 찍는다. 고향 땅을 떠난 엄청난 이민자들이 이 작은 섬에 쏟아 부었던 피나는 노력을 찍고 싶었지만 건물만 찍혀서 안타까워한다. 피에트로는 이후 사진작가를 직업으로 택한다.
Oxford옥스퍼드(1976년 영국) 로라와 헤어진 피에트로가 옥스퍼드대학의 실험 조교와 견습 교사 중간 정도 되는 일을 하면서 광장공포증을 앓으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던 곳이다.
Sorento소렌토(1958년 이탈리아) 소년이었던 피에트로는 엄마 프란체스카와 여행을 갔던 곳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기억한다.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엄마는 어땠나요? 곧바로 아빠가 좋아졌나요?’
Vladimirchi블라디미르치(1986년 유고슬라비아) 직장이 너무나 싫었지만 아내인 한나와 두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곳이다.
Watsonville왓슨빌(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 로라가 피에트로에게 이별을 고한 곳이다. “난 그만 갈래.” 로라의 말에 피에트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언젠가는 나한테 오늘 일을 이야기해줘, 내가 이해할 수 있게.” 그들의 머리 위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 눈에는 왓슨빌은 도로로 얼룩진 갈색 표면의 한 점에 불과했지만 젊은 피에트로에겐 피 토할 것 같은 이별을 하는 장소였다.
Yarmouth야머스(1991년 영국) 슬픔, 음주, 스트레스, 고립을 겪은 그가 아내 한나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얼굴에 닿는 야머스의 바람을 느끼며 런던 표지판을 향해 운전을 하던 곳이다.
Zanica차니카(1970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휴가 중에 길을 잃은 그의 부모가 허름한 숙소에 들어 피에트로를 수태한 곳이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우리 인생도 한편의 여행기가 된다. 우리도 저마다 『바보의 ㄱ, ㄴ, ㄷ』를 갖게 된다.
이를테면…
‘ㄱ’ 고속터미널은 우리 엄마가 시바 여왕처럼 위풍당당하고 화려하게 서울을 방문하던 곳.
‘ㄷ’ 당진은 조개구이를 먹다가 베트남에서 시집 온 나이 어린 여자애를 보고 당신 고향은 어딘가요? 물을까 말까 망설이던 곳.
‘ㅁ’ 목동은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맥주를 가장 맛있게 먹던 시절의 곳.
‘ㅂ’ 보라카이는 나의 선배가 아이를 가진 해변이 있는 곳.
‘ㅇ’ 터키의 에베소는 이오니아학파를 이해한 곳.
‘ㅌ’ 타이베이는 나의 사랑하는 언니가 깔끔한 해산물 뷔페를 발견하고 나를 데리고 오고 싶다고 생각하던 곳.
‘ㅍ’ 파리는 히치콕을 좋아하던 친구가 어느 날 영화를 공부하러 훌쩍 떠난 곳.
‘ㅎ’ 홍콩은 딤섬과 청도 맥주를 처음 먹어본 곳.
이 이야기는 결코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 같다. 인생은 계속되는 여행이므로.
* 섹스와 여행
돈 주앙보다는 카사노바를 선호하는 섹스광인 선배와 여행광인 내가 어느 날 만나서 한 사람의 인생에 섹스가 더 중요한가? 여행이 더 중요한가? 논쟁을 벌이다가 섹스와 여행 간의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소는 삼청동의 한식집이었다.
- 기대하지 않았는데 황홀한 경우가 있다. 기대와는 달리 허탈한 경우가 있다, 즉 예상대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 한 번의 멋진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다.
- 경험한 지 오래되었으면 간절해진다.
- 체력이 중요하다.
- 파트너가 중요하다. 하지만 혼자일 때가 나은 순간도 있다.
- 절정과 허무가 동전의 양면이란 걸 알려준다.
- 일생 지속되어야 한다.
- 경험 없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충고하려 든다.
결론은 누구의 승리였느냐고? 당시 베네치아에서 톨레도까지, 제네바 호수에서 러시아 초원까지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으면서도 자연이나 건축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여자에게만 집중한 독특한 여행자였던 카사노바의 이 말 “나의 가장 큰 보물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며,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를 섹스에나 여행에나 바치자는 것이었다. 젊은 여인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젊은 여인의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불끈 의욕을 느낀 그 정신을 인생이나 여행에 바치자는 것이었다. 언제나 최고만을 고집하지 않고 주저하거나 고르지 않는 정신, 여자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자세만큼은 배우자는 것이었다.
* 침대와 여행
어느 날 홍대 앞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식빵 냄새를 맡으려고 내가 막 몸을 구부릴 때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흘러나왔고 나와 동행했던 노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강렬하게 나온 영화가 뭔 줄 알아? 바로
<페드라>야. 의붓어머니인 페드라와 정을 통한 아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절벽 밑으로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지. 그때 나오는 음악이 바로 토카타와 푸가야. 페드라! 여자의 이름을 절규하듯 뱉으면서 차가 공중을 날아오르는 순간 오르간이 폭발적으로 울리지, 아주 대단한 장면이지.”
노교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영화
<페드라>의 흑백 장면과 안소니 퍼킨스의 눈동자와 함께 다치바나 다카시를 생각했다. 일본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여행칼럼 모음집인
『사색 기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 것은 언제였던가? 줄스 다신의 영화 <죽어도 좋아(페드라)>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히폴리토스를 현대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아들이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시작되자 문득 토카타와 푸가가 시작된다.”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장면 이야기를 한 것은 그가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서 기습적으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던 순간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문득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의식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오르간 주자가 그저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거대한 음향 공간이 통째로 오르간에 공명하여 울리고 있어 마치 내가 오르간 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바흐였다. 토카타와 푸가였다. 왠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흘렀다. 그때 내가 왜 울었는지 설명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저절로 그런 것이다. 일상성을 뛰어넘은 곳에서 일어난 감정의 분출이라고 할까? 지금도 그 일은 내 인생의 신비한 체험 가운데 하나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홍대 앞 리치몬드 제과점과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은 내게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나는 그 밤에 침대에 드러누워
『스페인사』라는 걸출한 스페인 역사책을 뒤적거렸다. 침대에 누워 다른 나라에 살았던 사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 나보다 먼저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나의 정신은 이미 침대에 속해 있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부유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최고의 여행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침대 속 상상 여행’이야말로 니체에게 보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고 싶은 모습이다. 일찍이 니체는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열매를 맺는,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칭송하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까지 침대 속에서 백 번도 넘게 여행을 갔고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을 만났고 백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되어 왔으니 불쌍한 나를 사랑해 주세요. 니체.
* 나와 여행
- 내게 여행은 “우린 만난 적이 있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떠난 이후에”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 보들레르의 이 말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를 읊조리는 방식이다.
-보들레르의 또 다른 이 말 “우리는 별들을 보았지, 파도도 보았지, 모래도 보았지. 그러나 수많은 위기와 예측 못 했던 재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따분했다네, 여기서와 마찬가지로”를 우아하고 비참하지 않게 읊조리는 방식이다.
- 귀스타프 플로베르에겐 고향 루앙을 떠나 이집트로 가서 낙타를 모는 사람이 되어 하렘에서 코밑에 솜털 자국이 있는 올리브빛 피부의 여자에게 동정을 바치는 꿈이 있었다는 걸 이해하는 방식이다.
- 워즈워스가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점! 인생의 방점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 또 “한때 그렇게 빛나던 광채가 지금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진들 어떠랴, 풀의 광휘의 시간, 꽃의 영광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지 못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라며 영원불멸의 시를 읊던 방식을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것이 나의 여행의 방식이다.
- 단 하나의 삶이 아닌 수백 개의 인생을 꿈꾸는 것이 내겐 여행이다.
-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 마침내 여행을 통해서 낯선 거리에 서서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되었고 나 또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얼마나 나를 우쭐하게 하는지 알게 되었고 늘 지칠 줄 모르고 어디론가 떠나고, 멈추지 않는다는 게 내게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모든 대상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따라 좋거나 나쁜 것으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도 여행 덕에 알게 되었다.
- 마침내 여행 때문에 공항과 터미널과 주유소와 선착장과 갈림길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 곳인지 알게 되었고 동시에 여행 후 돌아온 후 내 방이 얼마나 아늑하고 내게 어울리는 곳인지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