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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신이 없는 시대' 재고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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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평론가가 ‘신이 없는 시대’라는 표현을 토대로 풀어낸 믿음의 문제. (2024.09.20)

'신이 없는 시대'라는 표현은 얼마나 오래된 걸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건 전적으로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이후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은 이 만화를 한번 체크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슬쩍슬쩍 읽다가, 작품 속에서 당대에 대해 '사람의 힘이 강해질수록 신의 힘은 약해지는 시대'라던가 '불가사의가 불가사의로 남은 마지막 시대'라고 서술하는 부분에서 멈춰 서게 된 것이다. 이 만화의 시대적 배경은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두 명의 천황이 한 천하에 재위한 일본 남북조시대로, 서력으로 환산하면 1300년대이다. 과연 21세기의 우리에게 더 적합해 보이는 '신이 없는 시대'를 14세기 일본에 대한 표현으로도 무람없이 쓸 수 있는 걸까? 첨언하자면 이때에 (서)유럽은 시대구분을 빨리 잡아도 중세 말이었고, 한반도는 고려 말이었다.

물론 나 역시 알고 있다, 세계사와 지역사의 문화적 시대구분을 같은 선 위에 놓는 건 동시대/강대국의 관점을 지나치게 보편시하는 그릇된 태도임을. 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지평에 (아직은?) 무지한 후대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를 잘못이라 할 순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생각을 보다 정치하게 만들기 위해, '신이 없는 시대'라는 표현을 역사화하는 일이 필요할 터이다. 돌이켜보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유명한 옛 신화에 있어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 후 '철의 시대',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로크. 혹은 여러 종교에 있어 신앙의 중핵이 되는 종말론과 재림의 모티프는, 현세를 신성(Divinity)이 부재한 곳으로 여기지 않는 한 온전히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 이후 서구에 있어 신이란 신비의 영역을 이루는 복수의 존재나 질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배경이기 때문에, 근대철학에서 '신이 없는 시대'란 세계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하는 절대적 가치 체계가 부재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된다. 이는 계몽주의 이후를 살던 사상가들에게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사유하게끔 만드는 중요한 문제계였고, 하여 신의 정의가 다른 서구와 동아시아에선 이 표현을 소화하는 데에 거의 근원적이라 할 간극이 생겼다. 즉 남한의 우리가 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신이 없는 시대'는 표현 자체만 따질 때 서구의 '마법 없는 시대'와 좀 더 유사한 것이다. 하여튼 이렇게 상세한 맥락과 의미는 제각각이더라도, 넓게 잡으면 '신이 없는 시대'란 초월적인 것에 기대지 않는 세속적 세계관을 이른다는 데에는 일단 다수가 동의할 테다.

그렇다면 질문들이 곧장 따라온다. 금방 스케치한 바에 따르면, 결국 모든 시대는 각자의 방식으로 ‘신이 없는 시대’(를 자처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표현은 결국 모종의 클리셰에 불과한 걸까? 당연하게도, 그렇게만 퉁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난감한 변수는 바로 믿음의 문제다. 하나,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신에 대한 '지속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믿은 다중적이고 변화무쌍한 방식을 과연 지속과 파편의 구도로 이해해도 괜찮은 걸까?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혹은 필요에 따라 마법과 주술과 신앙이 뒤섞인 삶을 살던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 민중들은 어떤가?(『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애초에 보편적인 차원에서 믿음이란 철저한 긍정으로도, 철저한 부정으로도 쏠리지 않는 회색지대에서 더 길고 강력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또 하나, 유머는 믿음의 형식이라고 할 수 없는 걸까? 보통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숭배와 공포의 형태로 이루어진다고들 한다. 이런 인식은 몹시 보편적이라서, 유령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최근의 여러 대중적 서사는 '요즘 사람들은 귀신에게서 멀어졌고 그들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란 판단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의 저자 유진 새커 역시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기술적으로 진보하고 과학이 지배하며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포스트-밀레니엄 세계에는, 악마 같이 상상에서나 나올 법한 것을 위한 여지가 거의 남지 않은 듯하다. 기껏해야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은 (...)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게임 등의 문화산업에만 남아 있다."(42쪽)라고 쓴 바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여기서 악마의 이미지가 유머러스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어쩔 수 없이 눙치고 있다. 그래, '사유의 비인간성'을 논하려는 자신의 기획에 있어 이는 논하기 까다롭고, 나아가 방해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들을 희화화하는 건 믿음의 형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하나, 일차적으로 그 존재들을 효과적으로 세간에 인지시키며, 이차적으로 한 방향으로 경결될 수 있는 믿음에 숨 쉴 틈을 만들고 경계를 넓힌다는 점에서, 유머는 분명한 믿음의 형식이라 해야 한다. 가령 버나드 슈와이저가 『기독교와 유머의 승리(Christianity and the Triumph of Humor)』에서 오늘날의 서구 “기독교[가] 다소 기꺼이 유머의 힘에 굴복”한 게 단지 당대의 대중과 타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억압된 옛 기독교적 유머의 활력을 되살리려는 의식 때문일 수 있다고 쓴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 ‘신이 없는 시대’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다만 ‘신이 없는 시대’란 표현의 복잡한 궤적을 지금보다 더 잘 더듬는 것이 바로 내 몫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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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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