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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헨리 제임스에게 향하는 길 - 『보스턴 사람들』 (上)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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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에 대한 나의 주관을 밀고 나가는 대신, 아마도 그를 읽지 않았거나 아직 초입에서 서성거리고 계실 당신께 도움이 되도록 헨리 제임스에게 향하는 길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2024.05.10)

헨리 제임스(1843~1916)


기쁨과 당황을 함께 머금은 채 물어본다. 왜 헨리 제임스인가? 2024년의 남한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 갑자기 헨리 제임스의 책들이 가득해졌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나온 책들만 셈해도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로 짜낸』, 『사자의 죽음』, 『황금잔』 1·2, 『보스턴 사람들』 등 4종이고, ― 이 책들은 모두 국내 초역이다 ― 곧 민음사 쏜살문고에선 단편선 『밀림의 야수』가 나오며, 여기에 소설가 김사과가 쓴 『헨리 제임스』 역시 추가로 셈해야 할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열렬한 팬인 나로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마냥 어색하고 불편한데, 왜냐하면 헨리 제임스는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상업적인 수요가 높았던 적이 없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성의 페르소나』의 저자 캐밀 파야의 유명한 말,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찢어버리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지 않는 걸까,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 그에게 월계관을 씌우려면 간과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확실히 헨리 제임스는 읽기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캐릭터들, 특유의 만연체와 장황한 묘사, ‘의식의 흐름’, 배배 꼬고 한참 돌아가며 때로 중대한 누락을 내포하기도 하는 모호한 설명… 이 형식적 조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악명 높은 헨리 제임스 소설을 이루는 것이다. 실은 나 역시도 주변 사람에게 헨리 제임스를 추천했다가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여기서는 헨리 제임스에 대한 나의 주관을 밀고 나가는 대신, 아마도 그를 읽지 않았거나 아직 초입에서 서성거리고 계실 당신께 도움이 되도록 헨리 제임스에게 향하는 길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이 소개에 있어 적합한 장편소설은 아무래도 제임스의 중기 걸작 『보스턴 사람들』(1886/2024)일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 이전에 그가 걸은 길과 이 이후에 그가 걸은 길의 여러 단편들이 ‘예비적인’ 상태로서 아주 함축적으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조금 길어도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먼저 소설의 줄거리를 읽어보자. 올리브 챈슬러는 "여성 자코뱅 당원"으로 1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특히나 앞선 시기의 인물이다. 남북전쟁에서 형제를 모두 잃은 북부 사람인 그는, 남부 미시시피 출신의 먼 친척인 베이질 랜섬을 원조하고 보스턴에 초대한다. 남북전쟁 이후 일가가 몰락해 겨우겨우 살아가던 반동주의적 변호사 베이질 랜섬은 그 초대에 응하여 보스턴에 도착한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닮은 듯한 두 사람은 올리브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모임에 어쩌다 보니 함께 참석하게 되는데, 거기서 누군가가 여성 수난사에 관해 아주 강렬한 연설을 한다. 주인공은 최면술 치료사의 딸이자 연설가인 버리나 태런트로, 올리브와 베이질 모두 그에게 한 눈에 반한다. 올리브는 마침내 소울메이트를 찾았다는 생각에 버리나가 자신과 여성운동에 일생을 바치길 바라며, 반대로 베이질은 버리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과 결혼하길 바란다. 버리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생애 전체가 뒤흔들리는 혼란을 겪게 된다.

첫번째 길은 이를 지극히 세속적인 비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여기서 세속적이란 말은 좀 더 주의 깊게, 신앙이나 낭만으로의 귀속을 지양하는 태도로 읽힐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헨리 제임스의 시대인 19세기 후반 서구에 소설이란 주로 자본주의의 부흥에 따라 발생한 신흥 중산 계급 시민들의 자기 재현 욕구에 따라 유행하고 발전하며 활용된, 가장 세속적인 문학 장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위대한 소설가들은 이 세속성을 최대한 증폭하는 방식으로 당대에 맞섰다. 예컨대 19세기 서구 문학의 정전(Canon)에는 로맨스 장르의 관습을 가져가되 그 핵심에 가혹한 돈의 문제를 뒤섞는 작품들이 즐비하며,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조지 엘리엇 그리고 이들의 ‘어깨 너머의 제자’인 우리의 헨리 제임스 역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당장 『보스턴 사람들』만 뒤적여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재력과 이념을 이용해 버리나를 자기 곁에 두는 올리브, 당시 하버드 대학교의 “호화로운” 건물들을 구경하다 “자신이 놓친 기회의 쓰라림”으로 괴로워하는 베이질…

하지만 『보스턴 사람들』의 세속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정치적 이념으로 먹고 사는 이들조차 종종 자신의 이념과 무관하거나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는 ‘진부한’ 진실까지 우리에게 꼼꼼히 전해준다. 이때 중요한 건 제임스가 목표로 삼은 게 그런 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진실이 구체적으로 수행되는 네트워크를 관찰하는 것이란 점이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완전히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미묘한 거리감을 계속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인 게다. 달리 말해 헨리 제임스는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욕망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종종 타협적이고 모순적이며 스스로에게도 불화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과정으로 인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지에 대하여 몹시 민감했다. 그 점에서 분명 『보스턴 사람들』은 감정사회학적 텍스트로 읽어도 손색이 없으리라…


(다음 회에 계속)


보스턴 사람들
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저 | 김윤하 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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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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