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재난이 다가와도 우리는] 유죄를 선고한다
박진영 칼럼 - 1화
재판부의 판단을 바꾸기 위한 수많은 사람의 활동과 그 활동이 모여 이루어지는 변화를 보며 내게 필요한 연습은 쉽게 기대하지 않기보다도 쉽게 비관하지 않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03.14)
재난의 시대, 사회적 연대를 고민하는 박진영 연구자의 에세이.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
해가 바뀔 때면 빈 달력을 쭉 훑어본다. 제일 먼저 긴 연휴나 징검다리 휴일을 확인한다. 연말 휴가를 즐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설 연휴까지 남은 날을 헤아린다.
올해는 특별히 1월 10일이라는 날짜를 눈에 담고 기억하려 했다. 이날은 바로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 항소심 선고일이었다. 지난 2021년 1월 내려진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업체 대표의 무죄 판결 이후, 3년 만에 항소심 재판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1심 재판부는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가 폐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업 측에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살균제 제품에 가장 많이 사용된 화학물질은 옥시 제품에 사용된 PHMG 계열과 애경 제품에 사용된 CMIT/MIT 계열이다. 새해 첫 출근일부터 매일 나의 일과는 포털 검색창에 “가습기살균제”를 검색하며 시작했다. 항소심 재판을 다룬 언론 기사를 검색하고, 전문가의 릴레이 언론 기고 글을 읽으며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선고일을 기다렸다.
나는 왜 그렇게 항소심 선고일을 기다렸을까? 지난해 나는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라는 책을 한 권 썼다. 이 책은 나의 박사논문 주제였던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담고 있었다. 나는 10년 동안 이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활동하고 연대했던 사람들을 기록했다. 항소심 선고일은 그에 관한 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소송의 원고나 변호인단도 아니고, 단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라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평소 나는 대부분의 일에 쉽게 기대하지 않으려 일부러 애쓰는 편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생각하며 내 마음을 지키려 한다. 그런데 이번 선고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쉽게 누를 수 없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활동을 오래 해온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관한 사회의 관심이, 운동을 모을 힘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얘기해 왔다. 연구를 위해 자주 가습기살균제 관련 기사나 논문을 검색하는 내가 보기에도 전국 옥시 불매운동이 있었던 2016년과 비교하면 점차 사회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 판결을 통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관한 관심이 모이고, 참사 해결을 위한 힘이 모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하게 된 것이다.
오후 2시 선고 이후 속보가 올라오며 친구들이 재빠르게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속보] ‘1심 무죄’ 가습기살균제, 항소심서 뒤집혔다… “SK케미칼, 애경 유죄”.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고, 수많은 얼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연구를 위해 참여했던 행사장에서 발언하던 피해자, 1심 무죄 판결에 항의하며 “내 몸이 증거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던 피해자, 확성기를 들고 발언하던 활동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던 전문가 등 내가 보고 듣고 만났던 모든 사람이 떠올랐다. 선고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을지, 어떤 마음과 어떤 목소리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걱정과 염려, 기대와 안도 그리고 내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마음일 것이라는 어떤 거리감…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소식을 전해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겹의 시간을 거쳐 이 재난이 정말로 나와는 뗄 수 없는 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제대로 된 독성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하고 판매한 기업에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을 행한 것이라 말했다. 1심 재판부의 판결을 반대로 뒤집기 위해 변호인단, 환경단체, 전문가와 학회, 국립환경과학원, 피해자 단체, 탄원서에 서명한 시민 등 수많은 사람과 기관이 각자의 자리에서 큰 노력을 했다. 1심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CMIT/MIT의 폐 도달과 폐질환과의 인과성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가 실험하고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증인으로 참여해 몇 시간에 걸친 신문에 응했다. 새로운 연구 결과와 보고서가 증거로 받아들여지며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재판부의 판단을 바꾸기 위한 수많은 사람의 활동과 그 활동이 모여 이루어지는 변화를 보며 내게 필요한 연습은 쉽게 기대하지 않기보다도 쉽게 비관하지 않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재난과 사건을 통과하며 나도 모르게 세상은 더 안 좋아지고 있다고 쉬이 내뱉었다. 매번 해결이 늦어지고 미뤄지는 일들을 보며 어차피 안 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런 내 뒤통수를 치듯 벌어지는 일들을 마주할 때, 나는 다시 재난을 연구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재난이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며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도 마찬가지다. 항소심 판결 후 검사와 피고인이 모두 상고해 이 사건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 판결까지 몇 년이 걸릴지, 어떤 판결이 선고될지 아직은 그 어느 것도 예상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안 좋은 결과를 상상하기보다는 몇 년간 다시 만들어질 연대의 힘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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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학 연구자.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환경과 보건의 교차점에서 과학기술, 사회운동, 정치를 주제로 연구한다. 저서로 『재난에 맞서는 과학』,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공저), 『재난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와 실천』(공저)이 있고, 《한편 13호 집》에 글을 실었다.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공해와 지역 환경재난을 사례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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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속에 있었고 재난을 목격한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오늘의 과학 탐구 재난이 일상화된 시대다. 기후위기가 전 지구에 흔적을 남기며 영향력을 떨친다면, ‘세월호’와 ‘이태원’은 사회적 재난의 상처를 남겼다. 인간, 사물, 사회의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벌어지는 재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