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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딴따라질의 지속 가능성은? - 2023 연말 예능 시상식들을 되돌아보며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0편
언젠가 이 난관이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다면, 그래서 정말로 제도가 무너지거나 축적된 모든 것을 잃는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속을 거닐던 이들은 그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을 터인가? (2024.01.26)
나는 여전히 TV를 붙든 채 살아가고 있다. 친구와 동료를 비롯한 내 많은 또래들은 정규 TV 프로그램 없이도 잘 살아가지만, 나는 그런 정도로는 한동안 넘어가지 못할 성싶다. 기존의 방송 네트워크가 정한 시간대에 맞춰 특정한 작품을 시청하는 반강제성이 내게는 유튜브나 OTT의 자율성보다 훨씬 더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미디어 경험은 아직까지도 거의 TV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종종 또래들과 요즈음의 예능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 우리 사이에는 적잖은 시차가 생기곤 한다. 가령 내가 (얼마 전 폐지된) <홍김동전>을 얘기하면 상대는 <쉬케치>를 얘기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이 역시 TV 바깥 시청자들에 대한 섣부른 일반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차가 예기치 않게 좁혀지는 순간들도 종종 있는데, 지난 2023년 MBC 연예대상에서 풍자가 수상한 신인상의 사례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2021년 웹예능 (당시 프로그램 제목을 그대로 쓰자면) <터키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이래 그의 행보를 쭉 따라온 입장에서 이 사례는 적잖이 감동적이었다. 물론 풍자 개인을 남한 퀴어들의 아이콘 중 하나로 삼고 동일시하려는, 어느 정도 이기적인 마음이 내게 아예 없는 건 아닐 테다. 하나 MTF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전면화한 채 ‘인방(인터넷 방송)’과 공중파 예능을 가로지르는 성공을 거둔 이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나타났다는 데서 오는 감동은 분명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이 수상 현장을 시상식 본방송이 아니라 그 이후의 <전지적 참견 시점> 방영본을 통해 보았는데, 거기서 풍자 말고도 내 시선을 끈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전지적 참견 시점> 팀의 시점에서 풍자의 수상 소감을 재구성할 때 다소 뜬금없게도 <전지적 참견 시점>의 멤버도 아닌 유재석의 리액션이 한 커트 삽입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상식 현장의 넓은 풀 샷 중에서 유재석의 이미지만이 크롭되어 있었다. 이때 유재석의 리액션(에 대한 강조점)은 무엇을 승인하는가? 이쯤에서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유재석과 풍자의 만남에 기대 섞인 긴장감을 느꼈음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유느님’으로서 유재석, 최종 심급으로서 유재석. 그런 유재석의 위상을 이용해, <전지적 참견 시점> 팀은 풍자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승인하고자 한 것이리라.
유재석의 위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절로 또 다른 시상식에 대한 생각이 피어오른다. 사실 지난해의 연말 예능 시상식 중 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된 건 ‘제1회 핑계고 시상식’이었을 게다. 그렇지 않은가? 유재석을 중심으로 한 웹예능인 <핑계고>에서 자체적으로 기획 및 진행한 이 시상식은 웹예능으로선 가장 호화롭고 다채로운 라인업을 가장 좁고 빈약한 공간에 데려다 놓은 채 웃음을 자아낸 독특한 이벤트였다. 이동욱은 시상식 내내 거의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조세호는 키가 축하 무대를 하는 도중에 화장실을 갔다고 “나이가 마흔 세 살에” 혼이 나고, 홍진경은 신인상 수상자인 유연석의 수상 소감이 길어지자 “감사드린다는 말을 지금 몇 번을 하는 거야”라고 큰 소리로 지적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유민상의 “길어”짤처럼) 이런 유머 코드는 보통의 연말 예능 시상식에서도 쓰일 수 있게 된 지 오래긴 하나, 안테나 플러스 사무실이라는 “골방” 속에서 이런 유머 코드는 훨씬 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방금 막 확인해 보니 누적 조회수가 741만 회를 넘겼다) 대상을 받은 건 “유튜버 겸 배우”로 스스로를 소개할 만큼 <핑계고>에서 많은 활약을 한 이동욱이었는데,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배우로도 대상 후보에 못 올라봤는데, 이렇게 또 유튜버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아마도 여기서 풍자의 사례를 다시 떠올린 게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인방’ BJ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연예인으로서 신인상을 받고, 스타 배우는 유튜브 웹예능에서 유튜버로서 대상을 받는다. 혹은 이렇게 달리 써보면 어떨까, 작금에 연예인들이 빈약한 조건을 받아들일 때 인플루언서들은 변변한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예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쓴 적이 있다.
“인플루언서는 그저 인플루언서에 머물 생각이 없고, 또 남들이 그렇게 놔두지도 않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웬만큼 궤도에 오른 인플루언서들은 대안적 권력으로, 보다 명확히 말해 기존 권력을 대신할 권력으로 나서게 되며 이때 제도는 인플루언서들의 인기를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최종 심급의 역할을 그 안에 축적된 것들 덕분에 떠맡는다. 역설적이게도 기성 미디어는 자신의 근간을 위협하는 그 원인 덕분에 (상상적으로라도) 권위를 일부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 지망생만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제도에 새 톱니바퀴가 되어 제도를 부당하게 재특권화한다. 기성과 대안의 기괴한 꼬리 물기.”(「네임드 유저의 수기」,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말하자면 유재석을 매개로 한 짝패로서 풍자와 이동욱이랄까? (이 경우 유재석은 마치 미디어 생태계 전반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보편성’의 화신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바로 반문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기괴한 꼬리 물기”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겠는가? 김구라가 지상파 방송국 3사의 연말 예능 시상식을 통합하자는 말을 SBS 연예대상 현장에서 내뱉은 게 2019년도의 일이지만, 그의 과감함에 걸맞게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유효한 변화가 그 사이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광고 수익의 확연한 약세, 나날이 상승하는 출연자의 페이, 사실상 ‘제작되기 위해 제작될 뿐인’ 무책임한 프로그램 제작 시스템, 시청률처럼 무의미해지는 성공 지표는 기성 미디어들을 감당할 수 없는 난관으로 몰아넣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환경을 조정한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마치 스스로가 전적으로 피해자인 것 마냥 떠들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다(홍세영, 「출연료 10억 시대? 문제 맞죠, 그런데 방송·제작사 책임도 커」, <스포츠동아>, 2024.01.25). 과연 기성 미디어의 적은 OTT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맞을까? 그 앞에는 과거의 자신들이 먼저 적으로 서있는 게 아닐까?
분명 한동안은 풍자와 이동욱처럼 “기괴한 꼬리 물기”를 체현하는 이들이 쭉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등장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언젠가 이 난관이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다면, 그래서 정말로 제도가 무너지거나 축적된 모든 것을 잃는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속을 거닐던 이들은 그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을 터인가? 등 떠밀린 방랑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모두들 이미 자기도 모르게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풍자와 이동욱 덕분에 얻은 감동과 웃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인해 내게 이 시상식들은 장례식의 사전 행사처럼 불안하게 아른거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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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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