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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거듭되는 것 - <어느 멋진 아침>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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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한센 러브의 여자들 역시 때로 비참함과 궁색함, 청승맞은 눈물도 마다않으며 그 불가항력과 순연히 마주한다.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 포스터

파리지앵 산드라(레아 세이두)의 매일을 사회인류학적으로 서술하자면, 그는 생애주기 피라미드의 가운데에 낀 여성들이 흔히 겪는 위·아래로의 과중한 돌봄노동 중이다. 육아해야 할 딸과 간병해야 할 아버지가 머무는 실내에서 산드라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 게오르그(파스칼 그레고리)는 괴테와 카프카를 각별히 여기는 장서가이자 존경받는 철학교수였지만, 이제는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눈앞의 현관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한편 산드라는 핵심적인 경제활동인구이자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중요해진 밀레니얼 세대답게 자기 직업에도 충실하다. 프리랜서 통역가로서 매개자의 소명을 지닌 산드라는 곧 아버지의 언어를 대리하는 인물로도 자리 잡는다. 영화는 나아가 산드라의 인생에 한 가지 임무가 더 부과한다. 바로 사랑이다. <어느 멋진 아침>은 산드라가 줄곧 친구라고 생각해왔던 남자 끌레망(멜빌 푸포)과 어쩌면 연인이 되어볼 수도 있겠다고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 시작된다. 갖가지 역할에 충실한 보편의 사회 성원으로부터 그의 인생을 철학하는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에 이어 산드라에게서도 삶이라는 명제의 필요조건을 조심스레 도출해낸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아버지 또한 팬데믹 기간 중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만 특정한 인생의 경험이 감독을 비로소 촉발시켜 영화 안으로 죽음을 끌어당기게 한 것은 아니다.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센 러브는 자신의 경험을 영화에 투영해왔고 그 집합체 속에는 언제나 사라지는 것들이 주효했다. 데뷔작 <모두 용서했습니다>부터 지금껏 한센 러브의 여성 인물들은 자기 앞에 당도해 온 퇴색의 비애감과 마주하곤 한다. 가족이 죽거나 부부, 연인의 사랑이 끝난다. 자기 자신과 시대의 쇠락도 피할 수 없다. <다가오는 것들>의 철학교사 나탈리는 명석한 후배가 자신의 사유를 이제 낡아버린 것으로 치부할 때 침잠하고,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스웨덴 포뢰 섬을 찾은 영화감독 크리스(비키 크리엡스)는 잉마르 베르히만의 신성한 아우라 뒷면에서 제왕적 가부장의 면모를 보고 실망한다. <어느 멋진 아침>의 산드라는 아버지의 노화로부터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하며, 막 연인이 된 남자에게 언젠가 자신을 안락사해 달라는 감상적인 부탁마저 남긴다. 퇴색과 쇠락으로 명명해 보지만 그것이 꼭 흉흉한 것일 리만은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할 뿐이다. 요컨대 삶의 원리이자 형식이 오직 시간의 흐름에 있다고 바라보는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가 시간과 공간의 표면적 리얼리티를 최상급으로 재현하는 매체라는 점에 철저히 항복하고 만다. 미아 한센 러브의 여자들 역시 때로 비참함과 궁색함, 청승맞은 눈물도 마다않으며 그 불가항력과 순연히 마주한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이 형식에 대한 야심을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숏의 미학을 구사하는 대신 그는 숏의 집합을 본다. 카메라는 일상 이곳저곳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산들가 분주히 살아내고 있는 단면을 지켜본다. 집, 병원, 일터, 잠시 숨 돌리는 거리의 곳곳을 비추는 분절된 장면들을 통해 건져낸 것은 생의 유기적인 편린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장면들이 쌓여 그 연결 속에서 삶의 복잡다단한 파장을 감지하게 한다. 인생의 순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영화가 개념이 아닌 구체성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 <어느 멋진 아침>은 훌륭한 사례다. 스토리텔링의 느슨함, 절정이나 해결 따위는 없는 불명성이 이 영화에선 혼돈이 아닌 동일성의 효과를 낸다. 삶은, 살기로 하는 한 누구에게나, 다가와서 또 멀어지는 것들의 연속이라고 젊은 작가의 지혜는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삶을 모자이크 하는 감독들의 방식이 그러하다. 비선형의 사건들은 분리된 조각 같아 보이지만 인생이라는 거대한 판 안에서 서로 물들어 있다. 영화 초반, 산드라는 멀리 북프랑스 오마하 해변에서 열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한 재향군인회에 참석한다. 배 위에 포탄이 쏟아져 수많은 군인들이 즉사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한 순간을 증언하는 생존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때 카메라는 연단에 서서 통역 도중 눈물이 차오른 산드라가 청중 반대편으로 고개를 조금 비스듬히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핏 그녀 자신의 일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에서조차 산드라는 나이 든 아버지를, 다가올 엄정한 죽음을 느낀다. 슬픔의 속성은 번져나가는 것이고, 어쩌면 이 장면은 하나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겹쳐질 수 있다는 것을 무심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노화나 죽음으로 매개된 세계에서 손을 좀 더 멀리 뻗으면 산드라와 끌레망이 침대에서 보내는 열정의 시간들이 있다. 산드라는 쾌락으로 동요하는 그 시간을 져버리지 않는 한편, 끌레망이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갈 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역시 매한가지다.

버스 차창에 기대어 조용히 실려 가는 여자들의 영화를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간신히 보전된 공백 속에서 종종 눈물을 훔친다. 견주어보면, 감정이 오롯한 순도로 보존될 수 있는 시간은 인생에 많지 않다. 창밖 풍경이 멈추고 탈것에서 내리면 슬픔은 곧잘 웃음기로도 둔갑한다. 이 이격 사이에서 탄생한 훌륭한 예술들이 불시에 우리를 찌를 때까지 일상은 지속되어야 한다. <어느 멋진 아침>의 산드라 역시 예기치 못한 순간 터져 나오는 돌연한 울음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지나가다 만난 행인의 안부에서, 떠났던 연인이 오랜만에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서 산드라는 기습적으로 울거나, 혹은 울면서 웃는다. 그러므로 <어느 멋진 아침>은 결코 잔잔한 영화가 아니라 생존의 시간을 뚫고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내면의 생명력으로부터 역동하는 영화이다.

목구멍까지 넘실대는 슬픔을 알면서도 매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랑과 기쁨, 자질구레한 욕망들도 깨끗이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영화의 태도는 마지막까지 변함없다. 아버지의 병실에서 돌아 나오던 산드라는 외롭게 남은 게오르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가족의 찾을 때 애써 못 들은 체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이 외면은 고통스럽다. 활기찬 거리를 지나쳐, 산드라는 딸, 연인과 함께 몽마르트 언덕을 오른다. 아름다운 파리, 그중에서도 가장 청명하게 빛나는 초여름에 찍은 듯한 이 장면에서 사크뢰쾨르 대성당 꼭대기에 당도한 산드라는 들뜬 관광객들 사이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다. 종전까지 득실거렸던 죽음의 그림자는 잠시 물러나 있다. <어느 멋진 아침>의 모럴은 이런 지나침과 나아감을 기만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일 아침 병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산드라를 위해 어느 멋진 순간은 거듭 주어진다. 적어도 <어느 멋진 아침>은 삶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품는 영화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풍경 앞에 벅차오른 여자의 모습은 슬픔의 종말도 구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영화가 주는 찰나의 회복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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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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