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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기세(氣勢)' : 아이브의 'I AM' 무대
실력, 운, 때, 장소가 맞물리는 순간
기세에 올라 탄 팀의 무대를 보는 건 그 자체로 행운이다. 실력과 운, 때와 장소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일어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케이팝의 사건사고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2023.04.26)
습관처럼 주말 음악 프로그램을 틀었다. 매주 새로운 음악과 무대를 체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만든 습관이기도 하고 사실, 그냥 새로운 무대 보는 걸 좋아한다. 보면서 새삼 느꼈다. 요즘 케이팝 그룹들은 정말 다 '잘한다'. 3~4년 차 이상 활동하며 쌓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찬 그룹은 물론이고, 이제 막 데뷔한 신인도 마찬가지였다. 풋풋하고 서툰 모습이 신인의 매력이라는 것도 이제 옛말이다. 도대체 이 작은 반도 어디에서 저런 친구들이 분기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라는 마음으로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바야흐로 케이팝 상향 평준화 시대의 도래였다.
계속 이어지는 무대를 보며 '잘한다 잘해' 나른하게 쌓아 올리던 상념은, 어떤 무대 하나로 단번에 부서졌다. 지난 4월 10일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 아이브의 컴백 무대였다. 첫 번째 무대는 인기 있는 그룹이 으레 그렇듯 타이틀 곡이 아닌 커플링 곡 'Kitsch'였다. 뮤직비디오에서도 주요 의상으로 쓰였던 빨간 스타디움 점퍼를 입고 안무를 시작한 멤버들은 익히 알려진 이들의 히트곡에 비교하면 비교적 느슨한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바운스를 타기 시작했다. 천년의 센터 원영에서 리즈, 유진, 이서로 이어지다 다시 리즈를 거쳐 가을로 넘어가는 도입부를 보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이건 그런 자세로 볼 무대가 아니었다.
틴 크러시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유진의 후렴구 퍼포먼스에 넋을 잃다 보니 음악은 금세 타이틀 곡 'I AM'으로 바뀌었다. 이쯤에서 솔직해지고 싶다. 'I AM'을 처음 듣고 아쉬움이 컸다. 원인을 찾는 건 쉬웠다. 그만큼 기대가 높아서였다. 데뷔곡 'ELEVEN'에서 작년 'LOVE DIVE', 'After LIKE' 두 곡으로 2022년을 접수해 버린 그룹이 발표하는 첫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에 쏠리는 관심이 애매한 수준일 수는 없었다. 'After LIKE'가 거둔 커다란 성공의 그늘이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노래를 들으며 '그래, 안전한 게 다 나쁜 건 아니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순간, 'I AM'을 소화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한 명씩 돌아가며 늘어진 등짝을 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유진이 있는 힘을 다해 '1, 2, 3 / 1, 2, 3 / Fly up!' 외치는 순간 깨달았다. 아, 이게 기세(氣勢)구나.
'기세'의 사전적 의미는 '기운차게 뻗치는 모양'이다. '상태를 남에게 영향을 끼칠 기운이나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아이브의 'I AM'에 담긴, 그리고 'I AM'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는 지금 데뷔 후 가장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 그룹의 기세가 어려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이다. 목이 터져라 고음을 내지르거나 관절이 부서져라 격렬한 안무를 춘다고 해서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경지다. 감히 '제철'이라 부르고 싶은, 무엇이든 죄다 만발하는 시기에 들어선 아이돌 그룹만이 낼 수 있는 기운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런 때에 들어선 멤버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흔들리는 데 없이 형형하고, 힘 있게 내 뻗는 팔다리가 스친 곳마다 자신감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 무대에서 눈을 돌리는 건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주말 내내 홀린 것처럼 아이브의 각종 직캠을 돌려봤다.
기세에 올라 탄 팀의 무대를 보는 건 그 자체로 행운이다. 실력과 운, 때와 장소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일어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케이팝의 사건사고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2009년 'Gee'로 아이돌 신뿐만이 아닌 가요계 전체를 뒤흔든 뒤 각 맞춰 돌아왔던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가, 데뷔 1년 만에 '내꺼하자'로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고 정규 1집 리패키지 앨범 타이틀 곡 '파라다이스'를 파워풀한 칼군무와 함께 선보이던 2011년 가을의 인피니트가,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뮤직비디오 공개와 함께 2013년 연말까지 내내 '으르렁' 대야 했던 엑소가 그랬다. 예시로 든 가수가 너무 조상님 급이라 이해가 어렵다면 바로 며칠 전, 열 번째 미니 앨범 <FML>로 돌아온 세븐틴의 '손오공' 뮤직비디오를 권하고 싶다. 단순히 숫자나 수치로 말할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모은 기세들이 그곳에 있다. 이것이 바로 케이팝을 가장 뜨겁게 이끌어가는 마법 같은 원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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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