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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누리의 소녀 등장] 용기 : 내 발밑에 작은 평행 세계
생일, "세상에 태어난 날. 또는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해마다의 그날", 표준국어대사전
나는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모습'으로써 기꺼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든 아이돌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2022.11.29)
『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
나는 올해 6월 4일과 10월 20일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작년, 재작년의 그날도 마찬가지다. 스케줄 어플리케이션을 확인하거나, 소셜 미디어와 노트에 기록해둔 일기를 다시 읽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사랑의 순간. 그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있었다.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며 살아온 지 꽤 오래되었다. 아이돌을 모른 채 성장했던 시간보다, 아이돌을 좋아하며 보낸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진 지도 몇 해가 더 되었고. 내가 기억하는 나의 생 곁에는 언제나 아이돌이 있었고, 동경, 용기와 자신감, 믿음이 있었다. 다행히도 —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 좋아했던 마음을 후회하거나 그 시간을 아까워할 필요 없이 사랑은 꼬박꼬박 축적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아이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돌을 열심히 좋아한 덕분에 삶의 조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 나를 조금 더 견디고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종종 글을 왜 쓰는지,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나는 어김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사랑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대답한다. 또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쓴다고 답하기도 한다. 내가 자주 뭉뚱그려 표현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사실 고마움과 미안함, 죄책감, 용기와 의지가 뒤섞여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순간, 사건을 비롯한 모든 대상에 나의 삶을 조금씩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는 5월 25일이며 8월 1일, 8월 19일이 다가오면 그 무렵부터 조금씩 기뻐진다. 1월 16일, 2월 1일, 4월 8일이나 9월 3일, 10월 4일, 10월 14일, 11월 22일도 마찬가지다. 아이돌을 깊이 좋아하는 일은 나에게 축하할 만한 날이 더 많아지는 것과 진배없다.
몇 년 사이 ('아이돌 팬덤'을 비롯한) 여러 '팬덤' 내에서 생일 등 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많이 진행되었다. 지정된 카페에서 음료나 디저트를 구매하면 컵 홀더, 포토 카드, 엽서 등의 굿즈를 배포하는 '생일 카페'는 이제 기본이고 최근에는 '생일 밥집'이나 '생일 꽃집'을 비롯해 다양한 공간에서 생일과 기념일을 축하하고 있다.
지난여름, 이달의소녀 멤버인 최리의 '생일 카페' 두 군데에 다녀왔다. 이달의소녀 최리는 이달의소녀 프로모션1)을 통해 열일곱 살이던 2017년 여름에 데뷔했고, (2022년 기준) 올해 6월 4일은 최리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다. 나는 최리가 보여준 열일곱부터 스물두 살까지의 '시간'을 기억하며, 곧 스물세 살이 될 최리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오래 사랑하고 있는 아이돌 중 한 팀인 레드벨벳은 2014년 8월 데뷔 이후 올해 만으로 8년 차 아이돌이 되었다. 신곡 'Birthday'(앨범 <The ReVe Festival 2022 – Birthday> 수록 타이틀곡)에서 레드벨벳은 '눈뜨면 이 모든 게 사라져도 어때 두 눈을 맞춘다면 매일이 또 Birthday'라며 '너도 느껴지지 내 말이 다 맞지'라며 다시 한번 완벽한 '확신'을 준다. 레드벨벳의 예리는 열일곱 살에 데뷔해 올해 스물네 살이, 조이는 열아홉 살에 데뷔해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슬기와 웬디는 스물한 살에 데뷔해 스물아홉 살이 되었고, 아이린은 스물네 살에 데뷔해 올해로 서른두 살이다. 나는 레드벨벳의 10주년을 기대하고, 이미 미리 그 순간을 사랑하고 있다. 이 마음에는 거짓도, 슬픔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사랑과 기쁨, 기대와 환희로만 가득한 감정으로 '현실'을 견딜 수 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어떤 그룹 혹은 솔로 아티스트의 음악이나 퍼포먼스, 비주얼뿐을 좋아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고 응원하며 동시에 사람으로서 사람의 삶에 ‘연대’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레드벨벳이 데뷔한 2014년에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살아가며 지키고 싶은 것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건 오래 산책하고 또 밤새도록 슬퍼하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런 중에도 레드벨벳을 만나게 되어 기쁘게 기억할 수 있는 한해다. '대중'이 지켜보는-볼 수 있는 모습이 당연히 아이돌 개개인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도 어떤 개인의 보이는 모습으로써 개인을 이해했다고,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모습'으로써 기꺼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든 아이돌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소녀들과 소녀였던 사람들, 소녀로서 — 혹은 소녀로써 — 살아가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살고 싶다.
"라스트 러브. 나는 너를 잊지 못하고 있어.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나는 너를 자꾸 생각하고 있어. 내일처럼 오늘도, 어제처럼 오늘도. 마이 라스트 러브." _조우리, 『라스트 러브』, 창비, 2019
1) 이달의소녀는 '매달 우리는 한 명의 소녀를 만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12명의 멤버를 순차적으로 한 명씩 공개하는 형태로 프로모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달의소녀는 2018년 8월 19일에 12명의 멤버로 '전체 데뷔'했으며, 첫 번째 멤버인 희진이 공개된 시기는 2016년 9월이었다. 희진 데뷔(공개) 이후 현진, 하슬, 여진, 비비, 김립, 진솔, 최리, 이브, 츄, 고원, 올리비아 혜가 차례로 솔로로 데뷔했다. * 이 기사의 제목 '내 발밑에 작은 평행 세계'는 이달의소녀 이브의 '팹(Fab: 케이팝 팬덤 플랫폼 어플리케이션)' 메시지 중 발췌하였습니다.(2022.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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